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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유물론으로 본 그리스도교의 기원

“그리스도교의 기원” 하면 그리스도인들이든 아니든 모두 예수와 그의 열두 제자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요약할 것이다. ‘예수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하게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형으로 처형당했다. 하지만 예수는 부활했고, 평생 잊지 못할 강한 인상을 간직한 제자들은 로마제국의 방방곡곡으로 나가, 박해를 무릅쓰고 예수의 말씀과 삶에 관한 전도 활동을 했다. 그 과정에서 2세기 중엽부터 이단이 생겨났다. 하지만 박해와 이단이라는 내우외환을 성공적으로 물리치고 그리스도교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러다가 4세기 초에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종으로 극적으로 처지가 반전돼, 로마제국 정부의 공인을 받게 됐다. … 등등.’

그러나 예수는 누구였나 하는 논쟁이 ‘원시 그리스도교’(대략 2세기 초반까지의 그리스도교를 가리키는 용어로 이해하면 된다) 때부터 계속돼 왔다. 예수의 정체는 모호해 찾기 힘들고 딱히 뭐라고 규정하기 힘들다. 당시에 예수라는 남자 이름은 오늘날 한국에서 ‘민준’이라는 이름처럼 매우 흔한 이름이었고, 그의 이미지는 여러 가지로 다양했다. 예수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외견상 그의 전기처럼 보이는 복음서들은 저자 미상인 데다 예수 사후 40~70년이 지나서 씌어진 것이어서 고스란히,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게다가 예수에 대해 언급한 그리스도교 외부의 출전도 없다.

예수가 역사상의 실존 인물인지 여부 자체가 확실치 않다.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예수를 실존 인물로 보느냐 신화상의 인물로 보느냐 하는 문제에서 의견이 나뉘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카우츠키 등은 예수를 실존 인물이 아닌 신화상의 인물로 보았다. 반면 테리 이글턴은 예수를 실존 인물로 본다. 그것도 혁명가였다고 본다.

필자는 예수를 신화상의 인물과 실존 인물이 합성된 인물로 본다. 즉, 신약성경의 복음서들은 파울로스(이하 바울로: 주로 서기 50년대에 그리스도 종파의 선교를 주도한 전도자)가 신인 동시에 인간으로 숭배한 구세주를 밑바탕으로 삼아, 서기 6년 갈릴리 반란을 이끈 실제 인물 유다의 이미지를 합성해서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서들은 바울로가 신화적으로 해석한 그리스도관(觀)에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의존하면서 신생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노선과 관심사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믿음이 아니라 역사의 차원에서 논의할 때 예수의 정체나 역사성 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를 실존 인물로 믿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리스도교는 예수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예수를 믿음의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를 숭배하게 된 이들이 예수를 그리스도(히브리어 단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어)라고 믿고, 그 믿음을 공개적으로 고백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교는 시작됐다. 그래서 오늘날 주류 그리스도교 학자들도 교회의 탄생 시점을 예수의 공적인 삶이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묘사된 대로 승천한 그리스도가 자신의 영, 성령을 내려보낸 성령강림절로 본다.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주장

이글턴은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해서는 별로 한 말이 없다. 하지만 《신을 옹호하다》의 관련 장章을 읽어 보면, 그는 최초의 그리스도교가 혁명적이었지만 제도화되고 나중에 권력에 적응하게 되면서 혁명성이 없어졌다고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엥겔스나 카우츠키와 본질적으로 유사한 견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그리스도교의 기원에 관한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견해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겠다. 둘의 핵심 논점은 대동소이하다. 엥겔스가 몇 편의 소논문을 통해 제공한 통찰들을 카우츠키가 발전시켜 두툼한 책 한 권(《그리스도교의 기원》, 동연, 2011)으로 통합했던 것이다.

엥겔스와 카우츠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그리스도교는 로마제국의 유대인들 사이에서 발생했다.(당시 ‘유대인’은 유대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이해하면 된다.) 그중 특히 팔레스타인 유대인들 사이에서였지만 정확히 어떻게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다.
  2. 원시 그리스도교는 하층 계급들 속에서 시작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중간 계급들과 심지어 상층 계급들에 속하는 사람들도 참여하면서 초기 그리스도교는 모순된 처지에 놓이게 됐다.
  3.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상은 급진적이었다. 처음엔 “공산주의”를 실천하기도 했다(“공산주의”는 특히 카우츠키의 주장이었음).
  4. 초기 그리스도교는 매우 다양했다. 핵심적인 이유는 앞에서 말했듯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기반이 적대 계급들을 모두 포용하는 방향으로 흘렀다는 것 때문이다. 그런 처지에선 이데올로기의 모호함과 뒤죽박죽을 피할 수 없게 되고, 분열도 잇따르게 된다.
  5. 유대인의 전통과 관련해 다양한 태도를 보이던 원시 그리스도교 가운데 과감하게 특수주의를 버리고 보편주의를 택한 경향만이 성장해서 결국 ‘세계종교’를 지향해 분립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위 주장들을 차례로 살펴볼 텐데,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설명을 고스란히 옮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용한 역사학계와 성서학계의 연구가 지난 100 년 이상 사이에 발전했으므로 필자가 그런 연구를 활용해 엥겔스와 카우츠키의 주장들을 업데이트해서 설명하는 게 독자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1.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그리스도교는 처음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그러므로 먼저 로마제국 사회의 유대인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그리스도교 탄생 몇 세기 전부터 유대인들의 대다수(4분의 3 이상)는 팔레스타인 바깥으로 분산돼(디아스포라) 살고 있었다. 유대인들의 분산은 (시온주의자들과 친이스라엘 그리스도인들의 주장과 달리) 결코 서기 70년 예루살렘의 함락으로 시작된 게 아니다.

그들 고대 디아스포라에게는 ‘민족 의식’ 같은 게 있을 수 없었다. 민족주의는 근대의 현상이다. 그러므로 유대인 디아스포라는 팔레스타인을 ‘고국’, ‘모국’ 따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예루살렘은 마치 무슬림이 메카를 순례 장소로 생각하는 정도의 의미만이 있었다.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대다수는 상인이었다. 나머지는 주로 장인이거나 사무원, 하급 공무원 등이었다. 물론 지배계급에 속한 유대인도 극소수 있기는 했다. 또, 부두 일꾼 등 노동자나 노예도 소수 있었다. 유대인 상인의 거래 상대는 해외 무역상이었다.

팔레스타인 유대인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계급 구조가 달랐다. 그곳에서는 중간계급 외에 지배계급과 그들에게 착취당하는 농민 사이에 극한의 증오와 대립, 충돌이 있었다. 서기 66~70년의 혁명 전쟁은 갈릴리 농민과 예루살렘 빈민과 중간계급이 한편을 이루어 유대인 지배계급과 로마제국 모두를 상대로 벌인 혁명이자 전쟁이었다.

1세기 후반까지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와 별개인 종교가 아니라 유대교의 한 종파였다. 그때까지, 독자적 종교로서 그리스도교는 존재하지 않았고 유대교의 그리스도 종파가 존재했던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의상 그리스도교’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그 내부에도 다양한 분파가 존재했다.

팔레스타인 거주자든 디아스포라든 유대인들은 유대인의 전통(유대교 율법으로 표현됐다) 문제를 놓고 전통주의자들과 전통에 지나치게 얽매이길 원하지 않는 자들로 양극화돼 있었다. 유대교의 작은 종파였던 원시 그리스도교가 이 압력에서 자유롭기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 압력은 원시 그리스도교 내부로 반영돼, 원시 그리스도교도 유대인의 전통을 중시하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그 전통에 지나치게 얽매이길 원하지 않는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로 크게 양분돼 있었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로마와 안티오크(오늘날 튀르키예 남부의 도시 안타키아), 알렉산드리아, 이 세 대도시, 그리고 이 세 대도시들과 연계된 중소 도시들에서 성장했다. 소도시는 농촌과의 연계가 긴밀했으므로 소도시 그리스도교의 경우에는 농민 신자들도 조금 있었다.

2. 하층민의 운동?

엥겔스는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주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마태 11,28), 즉 하층민이었을 것으로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도시 빈민, 해방 노예, 실제 노예, 그리고 채무 노예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소농민 등이었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순전한 지적 호기심만으로 초기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졌던 게 아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 근대 노동계급 운동처럼 당대 하층민들의 운동이었다는 동일시가 그의 가장 큰 동기였다. 그는 초기 그리스도교와 자기 시대 노동계급 운동의 유사성을 보았고, 원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로 국한되지 않고 독자적 종교로 서고 또 성장한 것에서 통찰과 영감을 얻고자 했다.

카우츠키도 이에 동의했다. 그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사회적 기반을 라틴어 어원에 따라 “프롤레타리아”라는 용어로도 불렀다. 라틴어로 ‘프롤레타리아’는 로마 시민 가운데 최하층인 무산자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카우츠키는 또한 원시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를 구현했다고까지 보았다. 비록 이 “공산주의”가 나중에 쇠퇴했다고 했지만 말이다.

엥겔스와 카우츠키 같은 마르크스주의자들 말고도 많은 자유주의적 학자들도 원시 그리스도교가 하층 계급들의 지지로 처음에 성립됐다는 데 동의한다.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 20세기 중엽 미국의 사회학자이자 신학자 리처드 니부어 등 많은 사례가 있다.

안병무나 서남동 같은 한국 민중신학자들도 원시 그리스도교가 민중 교회였다고 보았다.

분명 원시 그리스도교 신자 가운데 특권층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고린도1서 1,26에 따르면, “[세속적 기준으로 볼 때] 지혜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권력 있는 사람이 많지 않고, 가문이 훌륭한 사람이 많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울로는 “많지 않았다”고 했지,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고대 로마 사회를 연구한 사회학자 에드윈 저지가 지적했듯이 일부는 상류층 사람들이었다. 저지보다 70년 앞서 독일의 역사학자 아돌프 폰 하르낙도 원시 그리스도교가 상류층 여성에게도 매력을 줬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신약성경을 읽어 보면 리디아라는 부유한 상인과 그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 바울로는 전도차 새 도시에 가면 그 도시의 부유한 집에 머무르면서 활동을 했다. 원시 그리스도교 교회는 가정 교회였는데, 비교적 넉넉한 사람이 자기의 집을 예배 장소로 제공하지 않는다면 안정적이고 조직적인 전도 활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 언급된 고린토 시의 가이우스나 시청 회계국장 에라스토 같은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었다.

바울로는 신약성경의 필립비서를 이런 문안 인사로 마무리한다. “모든 성도가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 특히 황제의 집안에 속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문안합니다.”(4,22) 위 언급된 하르낙에 따르면, 이 사람들은 신약성경의 로마서에서 언급된 나르깃소와 아리스토불로를 가리키는 것이다. 나르깃소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개인비서였고, 아리스토불로는 황제의 측근이었다.

이런 상류층 사람들과 이들과 연계된 일부 중간층 사람들을 의식해 초기 그리스도교는 노예 제도를 반대하지 않았다. 신자들 가운데 노예는 생산에 종사하는 농업 노비가 아니라 집안일을 하는 솔거 노비였다.

현대의 신뢰할 만한 연구들은 그리스도교가 도시 중간계급들 속에서 시작됐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노예나 소농민보다는 처지가 약간 나았지만 상층 계급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게 빈곤과 소외에 짓눌려 있었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팔레스타인 유대인들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계급 구조는 달랐다. 팔레스타인 농촌과 소도시는 그리스 문화가 침투하지 못했으므로 그런 곳의 원시 그리스도교는 유대계 그리스도교만이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유대계 그리스도교는 지나치게 엄격한 율법이라는 유대교의 높은 문턱을 공략할 수 없었다. 그들도 율법을 존중했기 때문인데, 특히 할례(마취법 없던 시대의 포경수술)를 준수했다. 그래서 그들은 별로 성장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의 대도시들은 예루살렘을 제외하면 친로마 토착 귀족들의 도시(가령 데카폴리스, 세포리스, 티베리아스 등)로 건설됐다는 태생적 특성 때문에 유대교 자체가 약했다. 그래서 그런 도시들에서도 그리스도 종파는 시작되지 못했다.

팔레스타인과 달리, 디아스포라 속의 그리스도교였던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는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대다수인 도시 중간계급 사람들은 물론이고 (특히 바울로파의 경우) 비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전도했고 이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오늘날에도 산업이 비교적 덜 발전한 나라의 도시들이 그렇듯이, 고대 로마의 도시 중간계급은 극소수인 지배계급에 의해 차별과 천대를 받았고, 소외를 첨예하게 겪었고, 그만큼 현실에 대한 중압감을 느끼며 살았다. 그래서 로마제국 도시들의 중간계급은 소속감과 명예심을 간절히 느끼고 싶어 했다.

더구나 고대 로마제국의 중간계급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중간계급보다 훨씬 빈곤했다.

원시 그리스도교는 바로 이런 사람들, 즉 농업 노예나 농민이 아니라 소상인, 장인, 사무원, 하급 공무원 같은 도시 중간계급 사람들 속에서 주된 경청자층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하층민들과 상층 사람들도 조금 포함됐고 여기서 모든 사회집단으로 확산됐다.

이것은 종교가 소외와 천대, 차별로 고통받는 다양한 계급들에게 매력을 주는 경향이 있음을 보여 주는 한 사례인 것이다.

3. 원시 그리스도교는 급진적이었지만 모순됐다

처음에(1883) 엥겔스는 원시 그리스도교가 혁명적이었다고 주장했다. 11년 뒤에는(1894) 그렇게까지 과도하게 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당시의 한 고대 중동 역사 연구자(페르디난트 베나리)의 연구 결과의 도움을 받아 요한계시록을 분석한 결과 원시 그리스도교가 혁명적이었다고 주장했다.

요한계시록은 은유와 상징을 통해 로마제국을 사탄, 즉 그리스도의 최고 적대자로 묘사하고 사탄의 멸망을 예언한 파국종말 예언 문학(묵시 문학이라고도 한다) 작품이다.

역사적으로, 파국종말론 사상은 천대받는 사회 계급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파국종말론 사상이 커다란 소외감과 절망감을 바탕으로 한다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 소외감과 절망감으로부터 역사적·우주적 운명론을 펼친다. 세상이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고, 그 파국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신이 개입해서 모든 것을 원래의 완전한 상태로 돌려놓을 것이다. 신의 백성은 근심 걱정 없고 더없이 행복한 낙원에서 살게 될 것이다. 이런 기대와 상상이 파국종말론에는 충만하다.

그러므로 계시록 저자는 천대받는 사회집단 소속 사람들이 많았던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 특히, 계시록의 그리스어 문법이 잘 안 맞고, 문체도 어설프고 무지한 평민의 천박함이 드러나는 걸 보면 지은이 자신도 평민이었던 듯하다. 계시록 저자가 소아시아 서부 지역 도시들의 교회에 대해 잘 아는 걸 보면, 그는 소아시아 지역의 유랑 전도자였을 수 있다. 원시 그리스도교의 핵심 선전가이자 조직가들은 바로 이들 유랑 전도자들이었다.

그러나 필자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시 그리스도교는 중간계급을 최초 기반으로 삼아 다계급적 기반을 구축해 나아갔다. 여러 계급에 호소하려다 보니 경전과 교리상에서 계급 갈등이 얼버무려지고 봉합됐다.

가령 재산은 찬양받는가 하면(마르 10,29-30), 저주받기도 한다(마태 6,19-21; 19,24; 루가 6,20-24; 16,22). 예수는 비폭력 무저항을 가르치는가 하면(마태 5,39; 26,52), 폭력적 저항을 준비하라고 가르치고 심지어 실천하기도 한다(루가 22,36; 요한 2,15). 예수는 자신의 사명이 평화라고도 하고(루가 2,13-14), 평화가 아니라 오히려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라고도 한다(마태 10,34-35).

이런 모순을 깨닫고는 11년 뒤에 엥겔스는 원시 그리스도교의 사상이 혁명적이었다는 생각을 버렸다.

요한계시록의 사상은 급진적이라고 할 수는 있지만 혁명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첫째, 탁월한 신약성경 학자 레이먼드 브라운 신부가 지적했듯이, 계시록의 지은이는 암시적으로라도 독자들에게 반란을 호소하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종말의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라고 호소하지도 않았다. 독자들은 그저 박해를 참아 내고 신실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되는 걸로 돼 있다.

물론 16세기 독일 농민 전쟁의 지도자 토마스 뮌처를 비롯한 역사상 많은 농민 반란 지도자들이 요한계시록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많은 우익 근본주의자들도 계시록을 원용하며 미국 제국주의와 이스라엘 시온주의를 지지한다. 계시록이 채용하고 있는 고도의 상징주의 때문에 온갖 방향으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계시록을 읽어 보면 마치 그리스도인들 전체가 로마제국 정부의 박해에 직면한 것처럼 보이지만, 오늘날의 역사적 연구에 따르면, 계시록의 지은이는 과잉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드러난다. 계시록이 씌어지던 때는 로마의 박해가 없었다. 엥겔스가 도움 받은 역사학자(페르디난트 베나리)는 요한계시록을 초기 그리스도교의 최초 문서로 보았지만 이는 오늘날의 연구 결과와 맞지 않는다. 오늘날의 성서학은 계시록이 서기 95년이나 96년에 씌어졌다고 본다.

계시록이 씌어지던 때인 서기 95년이나 96년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는 박해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궁정과 원로원 내부의 모의자로 지목된 일부 귀족들에 대한 처형 사건이 일어났다. 당시 계시록 저자 요한은 파트모스 섬에 유배돼 재판을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황제에 대한 불충을 둘러싸고 일어난 이런 섬뜩한 사태에 몹시 불안해 했음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어쨌든 과잉 반응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면밀하게 문헌 분석을 해 보면, 저자는 고통과 고문을 받으며 순교하는 것에 매혹돼 있음을 세심하게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까지도 순교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과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고백의 최고 형태로 돼 있다.

어쨌든 파트모스 섬의 요한은 혁명적이지는 않았지만 급진적이긴 했다. 계시록에는 민중의 고통과 항의가 여러 군데 표현돼 있다.

  • 6,6: 소아시아 서부지역 평민들이 당시에 겪고 있던 기아와 물가 상승이 언급돼 있다. “그러자 ‘하루 품삯으로 고작 밀 한 되, 아니면 보리 석 되를 살 뿐이다. 올리브 기름이나 포도주는 아예 생각하지도 마라’ 하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 3,17: 부유한 그리스도 신앙인들에게 경고하는 말도 있다. “너[라오디게아 교회]는 스스로 부자라고 하며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네 자신이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 17~18장: 로마의 탐욕과 부富 과시와 사치, 상업주의를 규탄한다.

그러나 이처럼 급진적 경향과 나란히, 현실의 고통에서 구원되는 길이 현실에 있지 않고 내세에 있다는 희망으로 치환된다. 고난은 현세가 아니라 다가올 세상에서 보상받는다. 악은 다가올 세상에서 처벌받을 것이다.

사실, 이런 양면적 태도가 계시록뿐 아니라 신약성경의 문서들 전반에 골고루 퍼져 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이하 ‘구약성경’)에도, 아니 사실상 유대-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도 이러한 양면성이 특징이다.

카우츠키도 원시 그리스도교의 믿음을 “공산주의” 운동이라 부르기는 했지만, 많은 모순들이 있음을 잘 보여 주었다.

4.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양성

엥겔스와 카우츠키는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양성에 매우 놀랐다. 엥겔스는 초기 그리스도교가 엥겔스 당시 제1인터내셔널, 즉 국제노동자협회와 매우 닮았다는 고대 중동 역사 연구자 에르네스트 르낭의 말에 공감을 나타냈다. 즉, 하층민 대중의 운동이고 그것도 국제적 운동인 데다 그 내부가 매우 다양하고, 서로 이질적이고, 종파 투쟁이 난무하고, 공식 교리 체계 같은 것도 없다는 점에 주목했다. 카우츠키도 이 점을 강조했다.

필자는 앞에서 원시 그리스도교가 애초부터 다계급적 기반을 형성하려 애썼다고(비록 주로 중간계급 속에서 시작했지만) 지적했다. 그에 따라 계급 모순이 종교 사상에 반영됐다. 가령 같은 출전에서 비롯한 경전 문구가 계급적 뉘앙스가 다르다. 많은 사례를 들 수 있지만 한 가지만 들면, 루가복음서에는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당신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6,20)라고 돼 있는 예수 말이 마태오복음서에는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은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돼 있다.

그러나 초기 그리스도교의 다양성이 계급 모순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된 원시 그리스도교가 유대인의 전통(유대교 율법으로 표현됐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원시 그리스도교는 유대교 율법(이하 단순히 율법)을 둘러싸고 처음부터 매우 모순된 태도를 보였고, 분열을 피할 수도 없었다. ‘율법’은 구약성경 곳곳에 산재해 있는 613개 법규들을 통칭하는 용어인데, 단지 의식과 제의, 예배에 관한 규정뿐 아니라 도덕률도 포함하고, 심지어 오늘날 같으면 헌법, 형사법, 민사법 등으로 분류될 법규들도 포함한다.

율법을 둘러싼 원시 그리스도교 내부 갈등은 로마제국과 유대인 간의 문화적 긴장에 대한 원시 그리스도교의 반응을 반영한다. 신약성경은 두 경향 간의 모순을 조화시키려 애쓴다. 가령,

  • 예수는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으로 대체됐다고 하는가 하면(루가 16,16), 율법을 엄수해야 한다고도 한다(마태 5,17-19).
  • 예수의 사형이 율법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요한 19,7) 그런 근거가 없다고도 한다(요한 18,31).
  • 예수는 선행을 드러내라고 가르치는가 하면(마태 5,16), 선행을 드러내지 말라고도 가르친다(마태 6,1).
  • 신에게 기도로 끈덕지게 간청하라고 가르치는가 하면(루가 18,5.7), 그러지 말라고도 한다(마태 6,7.8).
  • 예수를 믿는 데에 별로 부담이 따르지 않는다고 하는가 하면(마태 11,28-30), 상당한 부담이 따른다고도 한다(요한 16,33).
  • 초자연적 기적이 신으로부터 사명을 위임받았다는 증거라고 하는가 하면(마태 11,2-5; 요한 3,2), 그런 증거가 못 된다고도 한다(루가 11,19).
  • 예수는 자신이 신과 같다고 하는가 하면(요한 10,30) 신과 같지 않다고도 한다(요한 14,28; 마태 24,36).
  • 또, 자신이 전능하다고 하는가 하면(마태 28,18; 요한 3,35), 그렇지 않다고도 한다(마르 6,5).

먼저,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라는 서로 경쟁하는 원시 그리스도교 내 양대 경향의 율법관을 살펴보자. 거칠게 말하면, 유대계 그리스도교는 유다의 전통을 존중하려 한 경향이었고,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는 그리스 문화 친화적인 경향이었다. 물론 이 둘 사이에 중간적 경향도 있었고, 이 둘 각각 내부에 많은 분파들이 있었다.

유대계 그리스도교는 야고보(바울로가 갈라티아서 1,19에서 언급한 “주님[예수]의 형제”)가 지도자(바울로가 갈라티아서 2,9에서 언급한 “기둥으로 여겨지는 사람”)였던 듯하다. 한편,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는 바울로가 지도자였다.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는 율법을 구닥다리로 여겼고, 영적으로 해석한 예수를 믿었다.

신약성경의 문서들은 대부분 이 두 경향 중 하나로 분류된다. 그렇지 않은 것들은 후대의 정통파가 차이를 숨기고 가리기 위해 미봉책으로 얼버무린 것들이다. 유대계 그리스도교와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는 2세기 중반쯤 화해하고, 통합된 가톨릭 교회를 세워 정통성을 표방하기 시작한다.

유대계 그리스도교

  •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길 원하지 않았고, ‘나자레네’(거룩한 사람들)라고 불리길 원했다.
  • 율법 준수를 요구했다.
  •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이교의 신화를 차용한 것이라 해서 배격했다.
  • 그 대신에 예수가 세례받을 때 또는 부활했을 때 신의 아들로 입양됐다는 양자론을 주창했다. 양자론은 4세기에 삼위일체론자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려 단죄 받았다.
  • 바울로를 가짜 사도이자 이단이라며 미워했다. 그가 율법을 엄격히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동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특히 야고보 공동체는 신약성경의 야고보서를 통해 바울로식 신앙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 마태오 7,21-23: (바울로를 겨냥)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말하기를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할 것이다.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율법을 위반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
  • 일부 학자들이 “Q 복음서”라고 부르는 문서들을 중심으로 신앙을 다져 나아갔다.

마태오 공동체는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일부로,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 때까지 성전에서 제사를 드렸다.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 함락 후 팔레스타인 북부로 이주해 가 그곳에서 율법 준수 의무를 약간 완화하고 사마리아인 등 비유대인과 부자들을 가입시키면서, 부자에 대한 규탄 메시지를 완화하는 식으로 약간 온건해졌다.

마태오 공동체는 유대교가 랍비(율법 학자·교사) 중심으로 돼 가는 것에 반대했고, 주로 랍비들에 기반을 둔 유대교 종파이자 가장 유력한 경쟁 종파인 바리사이파를 비난했다.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

바울로가 대표했다. 바울로는 그리스의 밀교(신비종교), 스토아 철학 등을 받아들여 유대교를 재해석했다. 그리스도가 신에 의해 동정녀에게 잉태돼서 탄생했다든가, 그리스도가 인간을 구원하고자 스스로 속죄양이 되려고 십자가 처형을 당했다든가, 그리고 부활했다든가 하는 생각은 그리스 밀교에서 차용해 약간 변형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바울로의 그리스식(헬레니즘적)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혼합주의적이었다.

그리고 바울로는 율법, 특히 할례법을 완전히 무시하자고 제안했고, 안식일법과 식사 정결례는 대폭 완화하자고 했다.

바울로는 자신의 서간인 갈라티아서와 고린토2서에서, 유대교 식으로 신앙 생활을 하자는 다른 사도들을 맹비난한다. 그들의 메시지는 사탄(그리스도의 최고 적대자)이 배후에서 작용한 거짓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탄까지 운운한다는 것은 지옥에나 떨어지라는 저주나 다름없다.

마르코는 금기 음식을 규정하는 율법을 둘러싸고 바울로 편을 든다. 예수가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다”(7,19) 했다며 말이다.

마태오복음서는 마르코복음서의 이 대화를 차용하면서 이 문장만은 쏙 빼버렸다(15,17). 율법에 대한 반쯤 타협적인 노선을 나타낸다.

마태오는 예수의 12제자에게 커다란 존경을 나타낸다. 하지만 마르코는 바울로를 존경하는 그리스식(헬레니즘적) 그리스도인이었으므로 마르코복음서에서 유대계인 12제자를 멍청이들로 묘사한다.

요한계시록의 지은이도 유대계 그리스도교 계열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요한복음서와 요한서신, 히브리서는 바울로 계열이다.

한편 루가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지은이인 루가와 베드로1서·2서의 지은이는 헬레니즘계 그리스도교와 유대계 그리스도교의 화해를 나타내는 문서들이다.

영지주의

1세기 말경 유대계 그리스도교에서 영지주의라는 경향이 새로 갈라져 나왔다. 케린토스가 주창자였던 이 경향은 예수가 엄선된 소수의 신봉자들에게 신비에 싸인 깨달음을 주었다고 믿었다. 영지주의자들이 얻었다는 깨달음인 즉, 물질 세계를 창조한 신은 지고의 신과는 다른 열등한 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신을 입은 예수는 신성을 지닐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가 예수에게로 왔고, 이후 예수의 공적 삶 동안 예수를 이끌었다. 그런 후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임을 당했을 때 그리스도는 예수를 떠났다. 그리스도는 몸이 없는 영으로, 예수라는 인간 속에 일시적으로 머물렀던 것이다.

물질 세계의 창조자를 지고의 신이 아닌 그보다 열등한 신, 데미우르고스로 보는 점에서 영지주의는 플라톤의 영육 이원론 철학을 바탕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승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요한복음서의 저자는 바로 이 영지주의에 반대해 요한복음서를 저술했다.

5. 유대교로부터의 분리와 독자적 종교로 발돋움 – 결론을 대신해

원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의 한 종파였다 해서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인 일색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유대교 종파로 있는 동안에도 그리스도교는 비유대인들을 많이 가입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세기 말쯤에는 비유대인이 유대인보다 많은 사회적 구성이 됐다.

유대교로부터 그리스도교의 분리는 어느 한 순간에 일어난 게 아니라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러나 그 과정을 가속시킨 계기, 결정적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66년에 시작된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혁명 전쟁의 결과 서기 70년 로마가 예루살렘을 함락하면서 웅대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한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그때까지의 유대교는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 위주였지만, 이제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 신앙 생활의 중심은 랍비가 회당에서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것 위주로 바뀌게 됐다. 그 결과,

1. 유대교가 율법 중심주의로 전환함에 따라, 전통에 덜 얽매이는 그리스도교인들은 전통에 대한 태도 문제를 놓고 전통주의적 유대인들과 날카롭게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2. 서기 70년의 성전 파괴 후 갈릴리로 이주한 예루살렘 출신 랍비들은 갈릴리 토착 유대교의 주역인 농민들과 구원舊怨 때문에 날카롭게 갈등을 빚었다. 랍비들에겐 얄밉게도 당시 교회는 은근히 농민 편을 들었다. 복음서들은 랍비들을 비난하며 예수도 농민을 전도 대상으로 삼은 것으로 묘사해, 랍비들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3. 유대교의 새 중심지가 된 갈릴리에서 유대교측은 유대인이 아닌 이웃 주민들과 관계를 개선해 나아갔다. 그런데 (아직 유대교의 한 종파인) 그리스도 파도 이 과정으로부터 많은 득을 봤다. 비유대인들이 더욱 많이 가입하게 된 것이다.

4. 그리스도 종파는 성전 파괴라는 비극적 사건을 일찍이 예수가 예언했었고, 그 때문에 유대교측이 로마 식민 당국을 이용해 예수를 죽게 만들었다며 유대인들을 싸잡아 비난하기 시작해, 유대인들에게 모욕감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마태오복음서 27, 25을 들 수 있다. “군중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은 우리와 우리 자손들이 지겠습니다.’ 하고 소리쳤다.” 여기서 유대인들은 예수 죽음의 책임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 죄책을 후손들에게 전달한다.

신약성경의 여러 구절들은 유대교의 지도적 종파인 바리사이파를 기괴하게 희화화해, 유대교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국외자들이 보기에는 유대인이 잔인하고 비정하고 율법주의적이고 사소한 율법 규정 위반에도 엄한 처벌을 내리려 하는 집단인 것처럼 보이게 묘사한다. 반면 예수와 그리스도인들은 친절하고 공감적이고 자비심 많은 것으로 묘사한다. 요컨대 그리스도교 식 유대인 혐오의 시작이었다.

5. 1세기의 다양성은 2세기에 와서는 더욱 다양해진다. 유대교와의 결별이 그리스도교 내부의 분화를 촉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 고위층을 국가 체제 내로 포섭해 가톨릭 정통만을 공인하고 나머지 모두에게 가톨릭 정통을 강요하고 그리스도교 고위층이 이에 협력하면서 끝났다. 이로써 초기 교회의 역사도 일단락 맺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그 가운데 원시 그리스도교에 초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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