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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 오늘날 어떻게 읽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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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의 《노동조합투쟁론》(국역판 2002년)의 통찰을 오늘날 노동운동의 경험과 대조해 보면서,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수정해 읽어야 하는지 살펴본다.
하나의 완결된 책이 아니라, 20년에 걸친 논쟁의 기록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을 평가할 때 먼저 주의할 점이 있다. 《노동조합투쟁론》에 묶인 글들을 마치 한 시기에 집필된 하나의 완결된 저작처럼 읽어서는 안 된다. 특히, 가장 널리 알려진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은 1940년 트로츠키가 암살되기 직전에 남긴 미완성 원고다. 이 글을 포함해 1920년대부터 1940년에 이르기까지 트로츠키가 노동조합 문제를 다룬 여러 글과 논쟁을 함께 봐야 그의 견해를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
그 글들은 서로 다른 정치 상황과 논쟁 상대를 배경으로 쓰였다. 때로는 신디컬리즘과 논쟁하고, 때로는 노동조합 관료의 타협주의와 맞서며, 때로는 관료가 장악한 대중 노조를 버리고 별도의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초좌파주의를 비판한다. 1930년대 중반의 혁명적·준혁명적 상황을 배경으로 공장위원회의 가능성을 논하기도 하고, 1940년에는 제국주의와 국가가 노동조합에 가하는 압력을 매우 압축적으로 일반화한다. 이런 맥락을 외면하면 서로 다른 글의 강조점을 하나의 경직된 교리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럼에도 이 여러 글을 관통하는 일관된 원칙이 있다. 노동자연대가 노동조합 문제를 다루며 발전시켜 온 관점과 트로츠키가 만나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곧 노동조합의 힘을 노동자의 집단적 힘에서 출발해 이해한다는 것, 노동조합을 혁명조직과 동일시하지 않는다는 것, 관료 지도자들이 싫다고 노동조합을 버리는 종파주의에 반대한다는 것, 노동조합이 국가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것,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인위적으로 분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만나는 지점이 많다고 해서 그의 모든 정식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80년의 노동운동 경험은 트로츠키가 1940년에 매우 날카롭게 제기한 몇몇 명제를 수정해 읽을 필요가 있음을 보여 준다. 특히, 노조 관료주의의 사회적 원인, 현장 조합원의 의식, 공식 지도부와 아래로부터의 투쟁의 관계, 국가와의 유착 경향, 그리고 “실질적인 개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그의 주장이 그렇다.
노동조합 힘의 원천
노동자는 개인으로 사용자와 대면하면 약하다. 개별 노동자는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고, 사용자 쪽에는 자본과 조직, 관리 권한이 집중돼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생산과 서비스를 집단적으로 수행한다. 이 집단적 협업을 중단할 수 있다는 사실, 곧 노동 제공을 집단적으로 거부할 수 있다는 잠재력이 노동조합의 근본적인 힘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을 ‘약한 개인들을 강한 집단으로 바꾸는 조직’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다.
이 출발점은 마르크스에게서도 분명하다. 자본은 ‘집중된 사회적 힘’인 반면 개별 노동자가 가진 것은 노동력뿐이라는 것이다. 노동자의 힘은 수에 있지만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이 그 힘을 흩뜨린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을 억제하고 자본에 공동으로 맞서기 위한 조직으로 생겨난다.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도 이 전제를 공유한다. 따라서 노동조합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출발점에서도 트로츠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전통 속에 있다.
이 때문에 노동조합을 단순히 노동자에게 ‘혜택’을 제공하는 조직이나 법률적 제도, 서비스 기관, 일종의 보험으로 정의하는 것은 (지금의 현실이 일부 그럴지라도) 적절하지 않다. 노동조합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체교섭이라는 형식 자체가 아니라 그 교섭 뒤에 생산과 서비스를 멈출 수 있는 집단적 힘이 있다는 점이다. 법률 자문, 보험, 교육 같은 서비스가 아무리 늘어나도 이 집단적 힘을 대체할 수 없다.
혁명조직도, 타협만을 위한 기구도 아님
동시에 노동조합은 그 자체로 혁명조직이 아니다. 노동자연대가 노동조합을 설명할 때 중요한 개념은 그 모순된 성격이다.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선 노동자의 저항을 조직한다. 그러나 바로 그 자본주의 사회를 전제로 임금, 노동시간, 고용 조건을 사용자와 협상하기도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투쟁의 기관인 동시에 타협의 기관이다. 이것은 우연한 결함이 아니라 자본주의 안에서 노동조합이 존재하는 방식 자체에 내재한 모순이다.
트로츠키는 노동조합을 그 자체로 혁명조직으로 보는 신디컬리즘을 비판했다. 노동조합은 매우 다양한 의식 수준의 노동자를 조직한다. 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은 사회주의적 강령에 동의해서가 아니라 사용자와 집단적으로 맞설 필요가 있어서다. 노동조합 안에는 사회주의자도, 보수주의자도, 정치적으로 무관심한 노동자도 함께 존재한다. 이런 대중조직이 혁명적 강령과 강령적 동질성을 요구한다면 오히려 대중성을 잃게 된다.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에서 트로츠키가 노동조합을 절대시하는 태도와 기존 노동조합을 버리고 소규모 혁명적 노동조합을 만들려는 태도를 동시에 비판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노동조합을 과대평가하는 신디컬리즘과 노동조합을 과소평가하는 초좌파주의는 겉으로는 반대 방향이지만, 둘 다 노동조합의 모순된 대중조직 성격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대중 노동조합을 버리는 초좌파주의 비판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에서 오늘날에도 가장 강력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대중 노동조합을 버리는 초좌파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관료적 지도자들이 싫다고 해서 투쟁적인 소수가 따로 떨어져 ‘순수한’ 노동조합을 만들면, 대다수 노동자는 오히려 기존 개혁주의 지도부 아래에 그대로 남을 수 있다. 혁명적 소수가 자신의 정치적 순수성을 보존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광범한 노동자들과 실제 관계를 맺고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다.
노동자연대는 일반적으로 기존 대중 노조 안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분리노조는 언제나 잘못이라는 추상적 원칙을 세운 것은 아니다. 구체적 조건에서 분리노조가 불가피하거나 정당할 수 있다. 가령 애초 정규직 노조가 비정규직을 포용하지 못하거나 가입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한 경우가 그렇다. 이는 기존 조직에서 배제된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한 방편이다. 그러나 혁명적·전투적 소수가 온건한 다수와 논쟁하고 함께 행동하며 설득해야 할 과제를 조직 형식으로 회피해서는 안 된다. 바로 이 점에서 트로츠키의 1931년 「노동조합 단결의 문제」는 지금 읽어도 놀라울 만큼 생생하다.
그 글에서 트로츠키는 강령적 동질성이 필요한 혁명정당과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노동자들을 포괄해야 하는 노동조합을 명확히 구별한다. 그는 개혁주의 노조 안에서 사회주의 프랙션(동아리)을 만들고 노동자들과 함께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대중조직의 분열을 혁명적 원칙으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노동자들이 여전히 개혁주의 지도자를 신뢰한다면 혁명가가 그 지도자에 대한 자신의 평가를 선언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지적한다. 그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한 뒤 그 투쟁의 방식과 결과를 함께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원리는 ‘지도부와 함께하면서 맞서기’라고 불리는 노동자연대의 전략과 거의 겹친다. 지도부가 파업을 소집하면 그 행동이 최대한 강력해지도록 애쓰되, 지도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고 독립적인 현장 조합원 네트워크를 발전시켜야 한다. ‘지도부가 다 해 줄 것이다’와 ‘지도부가 나쁘니 함께할 것이 없다’는 두 극단을 모두 거부해야 한다.
노동조합 단결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는 단결을 절대화하지 않지만 하찮게 여기지도 않는다. 대중 노조가 통합되면 혁명가가 당장은 소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보기에 좁고 고립된 노조에서 확실한 다수를 차지하는 쪽을 광범한 실제 대중조직 안에서 하는 ‘야당’ 활동보다 선호하는 것은 종파주의자나 관료나 할 일이지 혁명가가 할 일이 아니다. 조직 안에서 차지하는 비율보다 어떤 노동자들과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단결 자체가 신성한 것은 아니다. 단결을 위해 계급투쟁의 내용과 혁명적·정치적 독립성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분열은 언제나 나쁘다’거나 ‘통합은 언제나 좋다’는 식의 형식주의로는 실제 노동운동을 판단할 수 없다. 이 균형감각은 트로츠키의 대중 노동조합 전술에서 특히 배울 만하다.
노동조합 관료주의: 배신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의 문제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트로츠키의 통찰을 계승하면서도 더 일반적인 설명으로 보완해야만 한다. 노동자연대가 관료주의의 핵심 원인으로 보는 것은 노조 지도자 개인의 부패나 높은 임금이 아니다. 상근간부가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직접적 충돌에서 일정하게 떨어져 전문적인 교섭자·중재자가 된 사회적 기능이 핵심이다.
현장 조합원은 임금 삭감, 해고, 노동강도 강화의 영향을 직접 받는다. 반면 상근간부는 노동조합에서 임금을 받고 일하며 사용자·정부와 정기적으로 협상한다. 이 때문에 갈등을 확대하기보다 협상 가능한 수준으로 관리하려는 구조적 압력을 받는다. 훌륭한 현장 활동가였던 사람이 상근간부가 된 뒤 보수화하는 것은 갑자기 도덕적으로 타락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트로츠키의 1940년 설명은 이와 다르다. 그는 관료가 국가와 협조하려는 경향을 중재자로서의 사회적 위치뿐 아니라, 제국주의 초과이윤의 ‘떡고물’을 나눠 받는 “노동귀족”·관료층의 사회적 이해관계와 연결한다. 높은 보수, 사회적 지위, 국가기구와의 접촉, 정당정치와의 연계가 관료적 보수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통찰은 분명 유의미하다.
그러나 (노동귀족론의 오류는 별문제로 하고) 관료주의의 근본 원인을 그런 특권에서 찾으면 설명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제국주의 초과이윤을 특별히 많이 나눠 받지 못하는 나라나 부문에서도 노동조합 관료주의는 있을 수 있고, 비교적 낮은 보수를 받는 상근간부도 투쟁을 통제하려는 압력을 받을 수 있다. 노동조합 관료의 보수성은 우선 노동과 자본 사이의 전문적 중재자라는 사회적 기능에서 생기고, 그다음으로 앞서 말한 특권과 제국주의적 이해관계가 그것을 강화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
그렇다고 트로츠키를 ‘좋은 노동자 대 나쁜 지도자’라는 도덕주의로 읽어서는 안 된다. 거친 표현과 달리 그의 실제 전술론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는 개혁주의 지도자가 이끄는 노동조합에서도 활동해야 하고, 그들을 신뢰하는 노동자와 함께 투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노동조합의 조직적 자율성도 인정하며, 당이 훈령으로 노동조합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신뢰를 얻어 영향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장 조합원의 진정한 위상
이 문제에서는 트로츠키를 특히 신중하게 읽어야 한다. 1938년 미국 CIO(산별노조회의) 조직자와의 대화를 보면 “대중은 지도자들보다 더 훌륭하고 대담하고 결연하다”, “대중은 투쟁을 원하지만 지도자가 브레이크를 건다”는 식의 주장이 반복된다. 투쟁이 상승하는 특정 순간에는 이런 묘사가 정확할 수 있다. 실제로 현장 조합원이 공식 지도부보다 훨씬 앞서 나가고, 지도부가 그 투쟁성을 통제하려 애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일반적 원리로 만들 수는 없다. 현장 조합원이라는 사회적 위치가 자동으로 급진적 의식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현장 조합원 사이에는 좌우 정치적 차이가 있고, 인종·성별·직업·숙련도에 따른 차이도 있으며, 노동조합 활동에 대한 헌신 정도도 다르다. 전투적인 소수 활동가의 의식과 다수 조합원의 의식은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노동조합 관료가 보수적 압력을 받는다고 해서 현장 조합원이 언제나 지도부보다 왼쪽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실제로는 여러 경우가 가능하다. 지도부보다 조합원이 더 투쟁적일 수 있다. 반대로 지도부가 조합원보다 먼저 파업을 제안할 수도 있다. 투쟁적 소수가 존재하지만 다수 노동자는 주저할 수도 있다. 공식 지도부의 파업 호소가 수동적이던 조합원의 자신감을 끌어올릴 수도 있다. 이런 불균등성을 인정해야 실제 노동운동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공식 행동과 비공식 행동(가령 비공인 파업)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트로츠키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관료적 통제의 충돌을 매우 중요하게 본다. 이것은 그의 강점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서구 노동운동, 또한 1987년 이후 지금까지 한국 노동운동의 경험은 공식 지도부와 현장 조합원의 관계가 단순한 대립만은 아니라는 점도 보여 줬다. 1996~97년 민주노총 파업이나 2011년 영국 공공부문 파업 같은 공식 행동은 투쟁 경험이 적은 노동자들을 행동으로 끌어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현장 활동가가 성장하고, 피켓(사업장 입구 등을 지키며 다른 노동자들에게 파업 동참을 호소하고, 파업을 무력화하는 출근이나 대체인력 투입을 막는 파업 규찰대)이 조직되고, 새로운 네트워크가 만들어질 수 있다. 반대로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지도부를 더 큰 행동 쪽으로 압박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앞서 말한 ‘지도부와 함께하면서 맞서기’가 중요하다. 이 요소가 트로츠키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공동전선론과 대중 노동조합 안에서의 활동론에는 상당히 강하게 들어 있다. 다만 그의 사후 노동운동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그것을 노동조합 일상의 일반적인 전략으로 더 명료하게 체계화할 수 있게 됐다.
국가로부터의 독립: 트로츠키가 남긴 가장 날카로운 경고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 가운데 하나는 노동조합을 국가에 통합하려는 압력에 관한 것이다. 트로츠키는 독점자본과 국가가 긴밀해지고 자본의 집중이 진행될수록 노동조합 지도부도 국가와 더 긴밀한 관계를 맺으려 한다고 지적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국가를 자본으로부터 떼어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가 운영의 ‘책임 있는’ 파트너가 되고 노동자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로츠키가 제시한 핵심 요구는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노동조합의 완전하고 무조건적인 독립성, 그리고 노동조합 민주주의다. 이 문제 제기는 지금도 매우 중요하다. 국가는 노동조합을 탄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노조를 제도 안으로 끌어들이고 노조 지도자들에게 사회적 지위와 국가 운영 참여 기회를 제공해 투쟁을 조절하려 한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어니스트 베빈의 노동장관 기용이나 전후 각종 협의기구 같은 사례, 그리고 오늘날 이재명 정부의 노사정 대화 제의는 그런 압력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여 준다.
특히 ‘국익’, ‘국가 경제’, ‘국제 경쟁력’의 이름으로 노동자가 양보해야 한다는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의 경고는 오늘날에도 적절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자신을 노동자의 대변자가 아니라 국가 경제의 공동 관리자처럼 보기 시작하면, 임금 억제나 구조조정, 군비 증강 같은 지배계급의 우선순위를 노동자에게 납득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수 있다.
다만 트로츠키는 이 저작에서 노동조합이 국가권력과 밀착하는 것을 당시 전 세계 노동조합의 공통된 특징으로 규정한다. 노조가 어떤 정치적 이념을 표방하든 공통의 사회적 조건 때문에 이런 경향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가 모든 노동조합이 국가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은 아니다. 그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데 목표를 한정하는 노조는 결국 국가에 종속되지만, 체제 변혁을 지향하는 노조는 국가로부터 독립성을 지킬 수 있다고 봤다. 다시 말해, 국가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가능성을 혁명적 노조에만 열어 둔 것이다.
문제는 그가 개혁주의 노선을 유지하는 노동조합에는 결국 국가에 통합되는 길밖에 없다고 단정했다는 데 있다. 물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조합을 국가에 통합시키는 방향으로 강한 구조적 압력이 작용한다. 그러나 그런 압력이 강하게 작용한다고 해서 개혁주의 노조가 모두 그 압력에 굴복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국가 통합을 개혁주의 노조의 피할 수 없는 귀결로 보는 것은 압력과 굴복의 차이를 간과하는 것이다. 실제로 국가는 투쟁이 약한 노동조합을 무시할 수 있고, 강한 노동조합을 포섭하려 할 수 있으며, 경찰과 법률을 동원해 공격할 수도 있다. 억압과 포섭의 구체적 결합은 시대와 세력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같은 나라 안에서도 국가와의 관계가 서로 다른 노조들이 있고, 한 노조의 관계도 역사적으로 급격히 바뀔 수 있다. ‘경향’을 ‘필연’으로 바꾸면 이런 변화를 설명하기 어렵다.
1940년 저작의 가장 큰 과장: “실질적인 개혁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
트로츠키의 1940년 저작에서 가장 크게 주의해 읽어야 할 것은 “만만찮고 지속적인 개혁”의 여지가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그는 제국주의 시대의 객관적 조건 때문에 노동조합이 제국주의 자본의 부차적 도구가 되거나 혁명운동의 도구가 되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식으로 문제를 요약한다.
이 명제를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안에서도 임금 인상, 노동시간 단축, 연금, 안전, 고용 보장, 차별 시정, 해고 철회 등 많은 실질적 개혁을 얻을 수 있다. 노동조합 투쟁의 한계는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데 있지 않다. 노동조합이 기본적으로 임금노동의 조건을 개선하는 조직이고, 그 투쟁이 자본주의의 틀 자체를 통상적으로는 넘어가지 않는다는 데 있다.
1945년 이후 여러 선진국의 경험도 트로츠키의 강한 명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어렵게 한다. 전후 장기 호황기에 노동자들은 공식 교섭과 비공식(비공인) 파업을 통해 상당한 경제적 개선을 얻었다. 이것을 단순히 일시적 환상이나 무의미한 양보라고 할 수는 없다. 노동자들의 삶을 실제로 개선한 성과였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1940년 경고는 오늘날 단서를 달아 읽어야 한다. 제국주의 시대라고 해서 지속적인 개혁이 말 그대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혁은 자본주의의 모순을 제거하지 않으며, 경기, 이윤율, 계급 세력 관계가 바뀌면 공격받고 되돌려질 수 있다. 노동조합이 자신의 목표를 개혁에만 한정하면 자본주의 체제가 가하는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단서를 달면 트로츠키의 전략적 경고는 살리면서 역사적 과장은 제거할 수 있다.
“노동조합이 혁명적이거나 자본의 하수인이거나 둘 중 하나”라는 양자택일도 같은 이유에서 너무 강하다. 노동조합의 모순은 한쪽이 다른 쪽을 한 번에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타난다. 노동조합은 저항을 조직하는 동시에 타협도 조직한다. 어느 순간 매우 전투적일 수 있고 다음 순간 지도부가 타협할 수 있다. 좌파적 노동조합도 실제 개선을 얻어 내면서도 더 큰 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
혁명적 위기 시에는 “혁명의 도구냐, 질서 유지의 도구냐” 하는 선택이 매우 날카롭게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의 장기적이고 일상적인 존재 형태를 설명하는 일반 이론으로는 “투쟁의 기관인 동시에 타협의 기관”이라는 모순된 성격을 출발점으로 삼는 것이 더 낫다. 트로츠키의 일부 압축적인 문장은 이 복합성을 놓칠 위험이 있다.
경제투쟁과 정치의 불가분성
트로츠키의 주장은 노동조합과 정치의 관계 문제에서 우리와 가장 가깝다. “노동조합은 임금 문제만 다뤄야 한다”는 경제주의는 현실과 맞지 않는다. 정부가 임금을 동결하고 노동 유연화를 추진하며 군사비를 늘리고 복지를 삭감한다면, 임금과 고용을 둘러싼 투쟁은 곧 정치 문제와 연결된다. 인종차별과 성차별도 노동자의 단결을 해치므로 노동조합이 외면할 수 있는 ‘외부’ 문제가 아니다.
트로츠키의 1940년 저작도 국가가 경제와 노사관계에 깊숙이 개입하는 조건에서 노동조합이 정치적 중립을 유지한 채 일상의 경제 요구에만 머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노동조합이 정치에 개입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어떤 계급의 관점에서 어떤 정치에 개입하느냐가 문제다.
그러나 정치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특정 정당에 조직적으로 종속돼야 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 점에서 노동조합의 정치적 독립성은 ‘신화’라는 트로츠키의 말은 문맥을 구별해 읽어야 한다. 한편으로 그는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노동조합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한다. 다른 한편으로 ‘정치적 독립성’을 비판할 때는 노동조합이 모든 정당과 정치 경향에 대해 중립일 수 있다는 신디컬리스트들의 생각을 겨냥한다. 실제 노동조합 안에서는 다양한 정치 세력이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쟁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트로츠키는 동시에 노동조합이 정당에 조직적으로 ‘복종’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말한다. 부분적 경제파업에서는 노동조합이 파업을 지휘해야 하고, 정당은 자신의 정책을 노동자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이 구별은 중요하다. 노동조합이 특정 정당의 선거 기구가 돼서는 안 되지만, 노동자들이 자기 계급의 관점에서 정치 문제에 개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얼마든지 함께 성립할 수 있다.
트로츠키는 여기서 더 나아가 혁명정당의 역할을 강조한다. 노동조합은 광범하고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노동자를 조직하는 대중조직이고, 혁명정당은 명확한 강령과 규율로 결집된 선진 노동자들의 조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혁명정당을 대신할 수 없으며 혁명적 상황에서 국가권력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별도의 혁명적 정치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여러 글은 사실 이 문제를 둘러싼 신디컬리즘과의 긴 논쟁이기도 하다.
노동자연대가 노동조합을 다뤄 온 글들은 노동조합 자체가 사회주의 조직이 아니며, 사회주의 정치조직과 정치적 논쟁이 따로 필요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 왔다. 다만 노동조합과 혁명정당의 조직적 관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해명하는 것이 언제나 그 글들의 주된 목적은 아니었다. 이 서평에서도 트로츠키의 당론 전체를 살펴보려 하기보다, 노동조합과 혁명적 정치조직은 같지 않고 사회주의 정치를 노동조합으로 대체할 수 없다는 핵심 구별을 확인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투쟁이 권력 문제로 나아갈 때
트로츠키가 일상적 노동조합 전략보다 훨씬 멀리 나가는 대목은 공장위원회론이다. 우리는 노조 현장(일터) 대표, 현장 조합원 네트워크, 파업위원회가 조합원의 자력 활동과 노동조합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트로츠키는 1930년대 혁명적·준혁명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단계 더 나아간다.
그의 논리는 이렇다. 점거파업은 “공장의 주인이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일시적으로) 제기한다. 사용자의 통제권에 맞서 노동자들이 일터를 장악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전체 노동자가 선출하는 공장위원회가 등장하면 이 문제가 일시적 행동을 넘어 조직된 권력의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 공장위원회가 기업주에 맞서는 대항 권력이 돼 일종의 ‘일터 내 이중권력’을 형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의는 정상적인 자본주의적 노사관계의 범위 안에서 노동조합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넘어, 계급투쟁이 그 범위를 돌파할 때 어떤 새로운 조직 형태가 나타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미조직 노동자까지 포괄하는 파업위원회, 공장위원회, 더 나아가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가 기존 노동조합보다 폭넓은 투쟁기관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연결해 생각하게 한다. 이 점은 트로츠키 저작이 오늘날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줄 수 있는 중요한 이론적 보충이다.
다만 트로츠키 자신도 공장위원회를 언제나 세울 수 있는 별도의 ‘혁명적 조직’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대중적 점거투쟁과 운동의 폭발이 벌어지는 ‘이행적’ 상황이 전제돼 있다. 평상시에 소수 활동가가 ‘공장위원회’라는 이름의 조직을 선언한다고 해서 그런 권력기관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현장 조합원 운동이 명령한다고 생기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직 형태는 실제 투쟁과 노동자 대중의 자력 활동에서 생겨나야 한다.
트로츠키 이후의 경험이 보태는 것: 법률, 산업구조, 패배의 기억
트로츠키 사후의 노동운동은 그가 충분히 경험할 수 없었던 조건들을 겪었다. 오늘날과 같은 노조 통제 법률, 고용심판과 법률 절차 중심의 노사관계, 서비스 부문의 확대, 긴축 재정, 대량 해고와 장기 실업, 운동의 패배와 침체 같은 변화다.
어떤 사람은 노동조합이 노조 통제 법률과 각종 법률 절차에 적응하면서 ‘합법주의적 노동운동’이 성장한 것을 강조한다. 반면 다른 사람은 산업구조 재편, 대량 해고, 실업, 전략적 패배,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파업의 중심이 이동한 점을 더 중요하게 본다. 어느 하나를 만능열쇠로 삼을 필요는 없다.
이런 겹눈 또는 시차(視差) 관점은 트로츠키의 1940년 ‘국가 통합’ 테제를 오늘날 적용할 때 중요한 보정이 된다. 국가의 법률적 통제는 분명 관료주의를 강화하고 투쟁을 제약할 수 있다. 그러나 파업 감소의 원인을 모두 관료의 국가 포섭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산업구조, 고용시장, 과거 패배의 기억, 노동자의 자신감, 법률, 심지어 노동조합의 조직 구조가 함께 작용한다. 트로츠키의 강력한 구조적 통찰을 이런 구체적 역사 분석과 결합할 때 더 설득력 있는 노동조합론이 된다.
격렬한 문체 속 전략적 핵심
트로츠키의 글은 오늘날의 이론서보다 훨씬 논쟁적이다. ‘배신자’, ‘하수인’, ‘정치경찰’, ‘범죄행위’, ‘기생충’ 같은 표현이 자주 나온다. 이는 그의 글 상당수가 실제 정치투쟁의 한복판에서 특정 노선과 지도부를 상대로 쓴 문건이라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러한 문체의 장점은 정치적 이해관계와 선택을 아주 선명하게 드러낸다는 데 있다. 그러나 단점도 있다. 노동조합 관료의 모순된 행동을 설명해야 할 자리에 도덕적·정치적 규정이 앞설 위험이 있다.
우리는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분석할 때는 도덕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분석적 용어를 쓰려 애쓴다. 관료가 후퇴했을 때 “배신자라서 그렇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압력을 받는지 묻는다. 좌파 지도자가 왜 우경화할 수 있는지, 보수적 지도자가 왜 때로는 파업을 조직하는지 설명해야 한다. 이런 식으로 트로츠키를 읽으면 그의 가장 좋은 전략적 통찰과 가장 격한 수사를 구별할 수 있다.
따라서 ‘자본의 정치경찰’ 같은 문구를 그대로 반복하는 것보다, 어떤 조건에서 노동조합 관료가 자본주의 질서의 안정에 기여하게 되는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트로츠키의 장점은 관료의 정치적 역할을 흐리지 않았다는 데 있고, 우리가 보태야 할 것은 그 역할을 낳는 사회적 메커니즘을 더 일관되게 설명하는 일이다.
계승과 수정의 과제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은 폐기해야 할 낡은 이론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가 노동조합 문제를 다루며 출발점으로 삼는 여러 전략적 문제를 매우 급진적이고 선명한 형태로 제기한 선행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 노동조합을 관료에게 내주고 ‘순수한’ 소수 조직으로 도피하는 초좌파주의에 대한 비판, 노동조합 관료주의와 국가의 유착에 대한 경고, 노동조합 투쟁을 정치와 권력의 문제로 연결하는 관점은 지금도 강력하다. 그 가운데 노동조합 지도자가 (노사정 대화나 노정 대화를 통해) 국가 경제 운영의 ‘책임 있는’ 파트너가 되려 할 때 받는 정치적 압력, 노동조합과 혁명적 정치조직의 구별, 혁명적 상황에서 파업위원회·공장위원회·노동자 평의회가 기존 노동조합을 넘어서는 투쟁기관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우리가 더 발전시켜야 할 영역이다.
반대로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주장도 분명하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만만찮은 개혁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주장, 노동조합이 혁명의 도구 아니면 자본의 도구가 된다는 양자택일, 관료의 보수성을 주로 ‘노동귀족’의 특권으로 설명하는 방식, “대중은 지도자보다 본질적으로 더 전투적이다”라고 읽힐 수 있는 표현이 그렇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투쟁의 기관인 동시에 타협의 기관’으로 보는 것은 바로 이런 단순화를 피하기 위해서다. 노동조합 관료는 배신자들의 집단이 아니라 그 모순 속에서 생겨나는 사회계층이고, 현장 조합원도 자동으로 전투적이지 않다. 투쟁의 향방에는 지도력과 현장 조직, 그리고 법률·산업구조·패배의 기억 같은 조건이 함께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런 의미에서 트로츠키의 노동조합론과 오늘날 우리 노동조합론의 관계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기본적인 전략적 방향은 상당히 일치한다. 그러나 트로츠키가 혁명기와 제국주의 시대의 압력을 배경으로 매우 날카롭게 압축한 몇몇 명제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80년의 노동운동 경험에 비춰 더 구조적이고 조건적이며 비기계론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다.
트로츠키의 저작을 가장 생산적으로 읽는 방법은 모든 문장을 교리처럼 되풀이하는 것도, 오늘날의 경험을 이유로 낡은 것으로 치부하는 것도 아니다. 대중 노동조합에서 실제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는 전략, 관료주의와 국가 유착의 압력을 경계하는 관점, 노동자의 자력 활동이 더 큰 정치적 가능성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전망을 살리면서, 역사적 경험이 드러낸 과장과 한계는 분명하게 수정하는 것이다.
주목해야 할 주요 글
《노동조합투쟁론》에 묶인 트로츠키의 글들을 오늘날의 노동조합 활동가가 읽는다면, 모든 글을 같은 무게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보기에 전체적으로 가장 유익한 글 가운데 하나는 「노동조합 단결의 문제」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 글은 대중조직과 혁명정당을 구별하면서, 개혁주의 지도부를 신뢰하는 노동자들과 대중 노동조합 안에서 함께 싸울 것을 고수한다.
「영국의 노동조합」과 「네덜란드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편지」도 같은 이유에서 중요하다. 두 글은 “관료가 나쁘니 대중 노조를 버리자”는 생각에 맞서 대중이 있는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는 원칙을 분명히 한다. 오늘날 현장 조합원 전략과 긴밀하게 연결되는 대목이다.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는 노동조합 전략을 혁명적 상황으로 확장해 생각하게 하는 글로 읽는 것이 좋다. 정상적인 노사관계 안의 조직 형태와 혁명적 위기에서 나타날 수 있는 대중적 권력기관을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의 연결을 보여 준다.
반면 1940년 집필 도중 트로츠키가 피살돼 미완성으로 남은 「제국주의 시대의 노동조합」은 가장 날카로운 통찰과 과도한 일반화가 동시에 담긴 글이다. 국가 통합의 압력, 국가로부터의 노동조합 독립, 노동조합 민주주의라는 문제 제기는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실질적 개혁의 지속 불가능성’, 개혁주의 노조에는 국가 통합 말고는 출구가 없다는 단정, 혁명의 도구냐 자본의 도구냐 하는 양극적 구도는 오늘날의 경험에 비춰 상당히 수정해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