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
노동귀족론의 이론적 오류와 실천적 해악: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의 노동귀족론 비판
〈노동자 연대〉 구독
서론: 결함을 되풀이하는 유보적 수용
‘사회주의를 향한 전진’(이하 전진)은 거리를 두는 듯한 뉘앙스가 담긴 부사인 ‘소위’나 ‘이른바’를 앞에 붙여 노동귀족 개념을 유보적·제한적으로 수용한다. 우파의 ‘귀족노조’ 공세는 배격하고, 노동귀족화를 법칙이 아닌 경향으로 취급한다. 노동귀족의 형성을 설명하면서 그 물질적 토대로 레닌이 말한 제국주의 초과이윤 대신에 국내 산업의 호황과 노동조합의 교섭력, 재벌의 초과착취를 내세운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조의 실리주의를 비판하고 비정규직·저임금 투쟁에 역량을 집중하는 노선을 합리화하는 데 노동귀족 이론을 사용한다.
그러나 적용 대상을 바꾼다고 이론의 결함이 해소되지 않는다. 전진의 실제 용례를 살펴보면, 이 이론(노동귀족론)이 오랫동안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 비판받아 온 핵심 결함을 되풀이한다. 특히, 상대적 고임금이 어떻게 특정 노동자 집단의 정치적 보수성으로 이어지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레닌의 노동귀족론에서도 물질적 호조건과 정치적 보수성을 잇는 인과관계는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전진도 이 난점을 해결하지 않은 채 ‘재벌의 떡고물’, ‘길들여진 정서’ 같은 표현을 설명 대신 내놓는다.
그 결과, 우파의 ‘귀족노조’ 담론을 배격하면서도 그 담론의 책임 전가 논리를 되풀이한다. 계급적 단결로 끌어들여야 할 노동자들을 ‘길들여진’ 집단으로 폄하하는 모순은 ‘소위’와 ‘이른바’를 붙인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1. 엥겔스 인용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노동귀족론
백종성의 「사회주의 기초학습#12」 각주는 “노동귀족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고 주장하며 엥겔스의 「임금제도」(1881)를 근거로 든다. 그러나 이 인용은 그 명제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인용문의 맥락과 역사적 시기 규정, 이론적 전제를 차례로 살펴보자.
첫째, 인용문이 다루는 문제부터 다르다. 엥겔스는 노동조합이 임금제도 자체를 폐지하지는 못했지만, 자본에 맞서 노동자의 생활조건을 지키는 데 필수적이라고 설명한다. 이는 노동귀족의 존재나 그 역사를 설명하는 문장이 아니다. 더구나 같은 글에서 엥겔스는 강력한 조직이 노동자들의 상대적으로 높은 생활수준을 유지하게 한다고 지적한다. 전진은 노동조합의 한계와 필요성을 함께 설명한 글을 노동귀족론의 근거로 끌어온 셈이다.
엥겔스가 영국 노동자의 보수성과 상대적 호조건을 연결한 주요 문헌은 따로 있다. 1858년 10월 7일 마르크스에게 보낸 편지, 1882년 9월 12일 카우츠키에게 보낸 편지, 1885년 논설, 1892년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 서문이 그것이다. 이 문헌들은 영국의 세계시장 독점과 식민지 지배라는 역사적 조건을 다룬다. 반면 전진이 제시한 「임금제도」 인용으로는 노동조합 전체와 노동귀족이라는 특정 집단을 구별할 수 없다. 이 구별의 실패는 전진의 다른 용법에서도 되풀이된다.
둘째, “자본주의의 역사만큼이나 길다”는 시기 규정도 입증되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50년 차티즘의 쇠퇴를 다룬 서평에서 사용한 ‘노동귀족’이라는 표현은 엄밀한 분석 개념보다는 묘사적·논쟁적 비유에 가까웠다. 차티즘 좌파도 이 경멸적 은유를 사용했다. 엥겔스가 이후 노동귀족을 설명하면서 주목한 조건은 1848년 이후 영국의 산업적 우위와 세계시장 독점이었다. 레닌도 노동귀족의 형성을 제국주의의 특정 조건과 연결했다. 이처럼 역사적 조건을 전제로 한 개념을 자본주의 전 시기에 적용하려면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노동계급 내부에 임금과 생활조건의 격차가 오래전부터 존재했다는 사실과, 그 안에 개혁주의(이하 전진식으로 ‘개량주의’)를 떠받치는 별개의 노동귀족층이 존재한다는 주장은 다르다. 노동귀족의 존재를 입증하려는 연구가 실제로 보여 준 것이, 자본주의에서 흔히 나타나는 임금 분포의 상층부 이상이었는가? 노동자들 사이의 소득 차이를 굳이 ‘노동귀족’과 ‘나머지 노동자’의 구분으로 바꿔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채 노동귀족의 역사가 자본주의만큼 길다고 주장하는 것은, 임금 격차가 늘 존재해 왔다는 사실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다.
소득 통계의 상위 집단을 곧바로 노동계급의 상층부와 동일시해서도 안 된다. 통계상 ‘임금소득자’에는 기업의 최고경영자와 고위 임원, 중간 관리자도 포함돼 있다. 이들의 소득 증가와 현장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을 한데 묶으면, 자본가·관리자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가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로 둔갑한다. ‘상위 10퍼센트’라는 소득 구간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와 등치하는 것부터 잘못이다. 계급적 위치를 검토하지 않은 소득 분류로 노동귀족의 존재를 입증할 수는 없다(김하영, 2017, 321~323쪽).
셋째, 엥겔스의 설명을 원용하려면 그 핵심 전제도 검토해야 한다. 엥겔스는 영국의 세계시장 독점과 노동귀족의 연관을 강조했지만, 그 경제적 우위가 어떤 경로로 특정 노동자층의 정치적 보수성으로 이어지는지 충분히 해명하지 않았다. 전진이 국제적 조건 대신 국내 산업의 호황과 교섭력을 앞세우려면, 새로운 설명이 이 공백을 어떻게 메우는지 밝혀야 한다. 용어만 이어받고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않는다면 노동귀족은 설명할 대상을 분류하는 명칭에 불과하게 된다.
2. 글마다 달라지는 노동귀족의 기준
전진의 글들에서 노동귀족을 식별하는 기준은 경제적 위치, 정치적 태도, 조직의 성격 등으로 바뀐다. 여러 집단이 지목되지만 이들을 노동귀족으로 묶는 일관된 기준은 제시되지 않는다.
마르크스주의 문헌에서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은 묘사적 비유, 논쟁적 표현, 이론적 개념 사이를 오가며 불분명하게 쓰였다. 그리고 노조 지도자, 숙련 노동자, 선진국 노동자 전체, 후발국의 고임금 노동자 등 서로 다른 집단을 가리켰다. 이 불분명함 탓에 영국사 연구자들이 추정한 19세기 후반 노동귀족의 규모는 노동인구의 12퍼센트에서 40퍼센트까지 벌어진다. 노동귀족의 존재를 입증하려 한 홉스봄조차 노동귀족과 안정적으로 고용된 ‘존중받는’ 노동자 대중 사이의 경계가 흐릿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경계 문제는 비판자의 트집이 아니라 옹호자도 피하지 못한 개념 자체의 약점이다. 별개의 계층을 설정하면서 그 경계를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는 사소한 흠이 아니다.
노동귀족 개념을 사용하는 전진의 다섯 글을 아래와 같이 표로 비교하면 이 문제가 드러난다.
| 글 | 노동귀족을 식별하는 표현 | 규정의 기준 |
| 백종성 | 특정 산업의 호황과 노동조합의 교섭력을 바탕으로 자기 이해를 배타적으로 추구하는 집단 | 경제적 위치와 |
| 돌멩 | “노동귀족으로 길들여진 대기업 정규직” | 정치적 태도 |
| 이용덕 | 실리주의가 고착되면 “노동귀족”이라 불릴 정도로 특권화된 일부 집단이 형성된다는 설명 | 실리주의 |
| 이용덕 | 현대차·기아차지부의 민주성·자주성·투쟁성 상실과 “노동귀족적 태도” | 조직의 성격과 |
| 양준석 | 재벌의 “고강도 초과착취 시스템”에서 “떡고물”을 얻는 일부 노동자 | 자본의 매수 |
노동귀족은 현대차 정규직 전체를 가리키는가, 지부 집행부를 가리키는가? 삼성 노동자들의 특정한 태도를 뜻하는가, 고용이 안정된 대공장 노동자들의 경제적 위치를 뜻하는가? 같은 말이 서로 다른 대상을 오가는데, 그 차이를 설명할 기준은 드러나지 않는다.
적용 대상과 판별 기준이 바뀔 때마다 이 개념으로 설명하려는 현상도 달라진다. 전진이 “소위”, “이른바”, “불릴 정도로”, “소리를 듣기에” 같은 표현을 붙인다고 해서 개념의 경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노동귀족”이라고 쓰더라도 그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는지, 어떤 기준으로 구성원을 식별하는지 밝혀야 한다. 이 작업을 생략하면 ‘노동귀족’은 상대적 고임금, 부문주의(자기 부문이나 고용 형태에 따른 이해관계를 계급 전체의 이해관계보다 앞세우는 태도), 노조 관료주의를 두루 비난하는 말에 불과하다. 이런 구체적 개념들로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것을 노동귀족 개념이 설명하는가?
3. ‘초과이윤’을 ‘떡고물’로 바꿔도 남는 설명의 공백
전진은 재벌의 하청·비정규직 초과착취를 노동귀족 형성의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하청·비정규직을 초과착취해 얻은 이윤이 어떻게 특정 노동자 집단에 배분되고 정치적 보수성을 낳는지 입증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초과착취’를 이론적 범주로는 거부하지만, 이 문제는 이 글에서 다루지 않겠다.)
토니 클리프가 1957년 논문 「개혁주의의 경제적 뿌리」에서 던진 핵심 질문은 이렇다. 식민지에서 영국 기업이 얻은 초과이윤은 어떤 경로를 거쳐 특정 노동자층에 돌아가는가? 제국주의적 확장이 고용과 생활조건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별개의 소수가 특별히 매수되는 것은 같은 설명이 아니다. 클리프의 비판은 후자의 설명이 성립하려면 무엇을 입증해야 하는지를 겨냥했다.
노동귀족론은 초과이윤의 일부가 특정 노동자층에 돌아가 그들을 체제에 묶어 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높은 임금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이런 ‘매수’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1987년 이후 대공장 노동운동이 겪은 직장폐쇄와 구사대 동원, 1998년 현대차 정리해고, 2019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법인분할 반대 파업과 점거는 노동조건의 개선과 방어가 자본과의 충돌 속에서 이뤄졌음을 보여 준다. 자본이 투쟁에 밀려 양보한 뒤 그 양보를 포섭에 이용할 수는 있다. 그렇다면 입증해야 할 것은 바로 그 전환 과정이다. 어떤 양보가 어떤 제도와 정치적 매개를 거쳐 체제 순응을 낳았는가? 이를 밝히지 않은 채 투쟁의 성과를 ‘매수금’으로 보는 것은, 설명해야 할 결론을 미리 전제하는 것이다.
전진의 주장을 살펴보자. 양준석은 재벌의 “고강도 초과착취 시스템” 속에서 “일부 노동자들도 그 떡고물을 얻어먹으며 ‘노동귀족’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고 쓴다. 식민지 초과이윤은 하청·비정규직의 초과착취로, 제국주의 부르주아지는 재벌로, 제국주의 국가의 일부 노동자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로, ‘빵 부스러기’는 ‘떡고물’로 바뀌었다. 그러나 설명해야 할 문제는 그대로다. 하청·비정규직의 착취로 늘어난 이윤이 왜, 어떤 경로로 정규직의 임금에 반영되며, 그 과정이 어떻게 정규직의 정치적 보수성을 낳는가?
자본이 노동자 집단을 분할하거나 일부를 회유하려 한다는 사실로 이 연결고리가 입증되지는 않는다. 현대차 정규직의 임금과 노동조건에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축적된 조직력과 투쟁의 성과가 반영돼 있다. 기업의 생산성과 수익성, 노동시장 조건을 함께 분석해야 하지만, 노동자의 집단적 저항을 빼고 그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 투쟁의 성과는 자본의 ‘떡고물’이 아니다. ‘떡고물’이라는 말은 바로 그 투쟁을 간과한다. 투쟁으로 빼앗은 몫을 자본이 베푼 시혜로 바꿔 서술하는 것이다.
현대차 정규직의 임금이 어떻게 구성됐는지 살펴보면 ‘떡고물’이라는 설명의 허술함은 더 뚜렷해진다. 이 노동자들은 오랫동안 낮은 시급과 장시간 연장근로를 강요받았다. 사측은 하청 노동자를 이용하면서도 정규직에게 잔업과 특근을 강요해 그들의 노동력도 강도 높게 사용했다. 연간 임금 총액만 보고 정규직이 하청 착취의 결실을 나눠 받았다고 주장하면, 그 임금을 받기 위해 얼마나 오래 일해야 했는지를 도외시하는 것이다(김하영, 2016).
일본의 원청·하청 체제도 임금 격차의 형성 과정을 살펴야 할 필요성을 보여 준다. 핵심 기업의 상대적으로 안정된 숙련 남성 노동자와 저임금 하청 노동자의 분할은 기업의 고용·하청 전략, 성별 분업과 결합돼 형성됐다. 이후 생산망이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확대되면서 이 분할은 국경을 넘어 재편됐다. 이런 과정을 설명하려면 서로 다른 노동자 집단을 배치하고 통제하는 자본의 생산 조직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
자본은 일부 노동자에게 상대적으로 안정된 조건을 제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저임금 노동력을 찾아 나선다. 한국의 비정규직·사내하청 체제도 기업의 비용 절감과 노동 통제, 이를 뒷받침한 국가 정책을 빼고 설명할 수 없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 지도부의 미온적인 연대 태도가 이런 분할을 강화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 행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는 것과 정규직의 임금 자체를 하청 착취의 ‘떡고물’로 규정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노동조건을 둘러싼 자본과 노동의 투쟁을 간과하고 분할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원·하청 기업 사이의 불공정거래와 자본의 노동 착취도 구별해야 한다. 하청 기업이 납품 단가 인하 압력에서 벗어나더라도 그 이익이 하청 노동자의 임금 인상으로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다. 원청과 하청 기업은 이윤 배분을 둘러싸고 다투면서도 노동자를 착취하는 데서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진다. 두 노동자 집단을 각각 자기 사용자의 이해관계에 묶으면 이들의 공동투쟁을 가로막게 된다(김하영, 2026, 97~99쪽).
4. 임금 격차에서 보수성을 도출하는 비약
백종성이 제시한 ‘산업 호황과 교섭력’은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를 설명하는 요인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정치적 보수성을 공유하는 별개의 노동귀족층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산업 간 임금 격차에는 기업의 시장 지위뿐 아니라 자본 집약도, 생산성, 노동자의 숙련도와 조직력 등이 함께 작용한다. 생산성이 높은 기업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지불할 여지가 있지만, 그것이 노동자의 몫으로 돌아가는지는 결국 투쟁에 달려 있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언제나 초과이윤(특별 잉여가치)을 얻는 것도 아니다. 예컨대 철강처럼 진입 장벽을 만드는 대규모 설비는 위기 때 철수를 어렵게 하는 장벽이 돼 이윤율을 끌어내릴 수 있다. 따라서 산업이나 기업의 규모만으로 임금 수준과 정치적 태도를 동시에 설명할 수는 없다.
한국 제조업의 수치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2013년 당시 대기업의 노동생산성은 중소기업의 3.4배였지만 임금은 1.86배였다. 높은 생산성과 상대적 고임금은 자본이 생산의 성과 가운데 큰 몫을 차지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다. 임금 액수만으로 대기업 노동자가 기업주와 착취의 과실을 나눈다고 단정하면,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 부를 생산하고 그중 얼마를 받는가 하는 문제를 놓친다(김하영, 2017, 333~335쪽).
여기서 착취를 생활수준이나 임금의 절대액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의 착취율은 임금으로 지급된 가치에 대한 잉여가치의 비율이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더라도 그에 비해 더 많은 잉여가치를 생산한다면 착취율은 더 높을 수 있다. 따라서 상대적 고임금은 노동자가 자본가와 착취의 이익을 공유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김하영, 2026, 16~17쪽).
호황 산업의 노동자가 조직력을 발휘해 높은 임금을 쟁취했다면, 우선 그 산업의 조건과 투쟁의 역사를 분석해야 한다. 또한 숙련 노동력의 훈련과 재생산에 드는 비용도 임금 격차를 설명하는 요인이다. 이런 설명에 ‘귀족’이라는 이름을 붙여 정치적 태도까지 추론하려면 별도의 타당한 근거가 필요하다. 높은 교섭력은 대단치 않은 타협을 뒷받침할 수도 있고, 노동자의 자신감을 높여 투쟁을 촉진할 수도 있다. 전진은 이 두 가능성을 따져 보지 않은 채 “길들여진”, “배타적”이라는 평가를 덧붙인다. 교섭력이 왜 특정한 정치적 결과로 이어지는지 설명해야 할 자리를 힐난으로 채운 셈이다.
노동귀족론은 임금 격차의 원인을 잘못 짚는 데서 더 나아가, 그 격차에서 정치적 의식과 행동을 도출하는 이중의 오류를 범한다. 먼저 경쟁은 기술과 생산조건을 균등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기업·산업 사이의 차이를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그 조건에서 노동자들이 얼마를 쟁취하는지는 조직과 투쟁에 달려 있다. 그러나 임금 격차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설명했다고 해서 노동자의 정치적 태도까지 설명한 것은 아니다. 같은 경제적 조건에서도 노동자들이 어떤 조직을 만들고 어떤 공동행동을 경험하는지에 따라 의식은 달라질 수 있다. 임금 분포도에서 정치적 태도를 읽어 내려는 노동귀족론은 바로 이 형성 과정을 건너뛴다(포스트, 2010, 25~28, 33~34쪽).
이용덕은 이렇게 쓴다. “물론 이것은 절대불변의 법칙이 아니다. 경제위기가 깊어지면 대기업도 노동자들에게 양보할 여유가 없다.” 이어 기존 지위를 지키려는 노동자의 저항이 거세질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설명의 핵심은 같은 경제적 위치에 있는 노동자들이 왜 어떤 때는 타협주의나 부문주의에 머물고 다른 때는 전투적으로 싸우고 연대에 나서는지에 있다. 자본의 공격, 현장의 조직력, 지도부의 전략과 정치적 경험을 분석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분석 없이 보수적일 때는 고임금 때문이고 전투적일 때는 그 고임금이 위협받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정반대의 결과를 모두 사후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어느 조건에서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제시하지 않는 이론은 반례와 대조해 설명력을 검증하기 어렵다.
5. 고임금 노동자의 보수성이라는 설명에 도전하는 투쟁의 역사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잘 조직된 노동자를 개량주의의 특별한 사회적 기반으로 지목한다면, 그들이 혁명과 대규모 투쟁을 이끈 역사를 설명해야 한다. 1917~1923년 유럽 노동운동의 경험은 물론 한국의 대공장 노동운동도 그 설명을 요구한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부터 그 직후까지 이어진 1917~1923년의 국제적 혁명 물결에서 비교적 고임금의 숙련 노동자들은 페트로그라드·글래스고·베를린·토리노 등지의 투쟁을 이끌고 초기 공산당 건설에도 크게 기여했다. 지노비예프가 ‘반동의 도구’로 지목한 군수 노동자들은 그의 말과 정반대의 역할을 했다. 베를린의 군수공장, 페트로그라드의 푸틸로프 공장, 클라이드사이드의 위어스 공장 노동자들은 전쟁 말기의 전투적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페트로그라드와 베를린에서는 그 운동이 혁명으로 발전했다.
엥겔스가 노동귀족의 사례로 거론한 숙련 직종의 노동자들은 볼셰비키와 베를린·토리노의 전투적 노동자 조직에서도 중추를 이뤘다. 레닌의 노동귀족 규정을 이런 노동자 전체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혁명운동의 실제 사회적 기반과 충돌한다. 물론 이런 사례만으로 고임금 노동자들의 보수화 가능성이 모두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고임금과 높은 조직률을 보수성의 증거로 삼는 설명은 그 조건이 혁명적 투쟁의 기반이 되기도 한 이유를 밝혀야 한다.
일부 노동귀족론은 고임금 노동자의 경제적 전투성이 반전·반제국주의 정치와는 별개라는 반론도 편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숙련 산업 노동자들은 작업 속도 증가와 탈숙련화에 저항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쟁에 반대하는 파업과 시위에도 나섰다. 그들은 프랑스·영국·독일·이탈리아·러시아에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반전파를 떠받치는 사회적 기반이었고, 전후에 건설된 혁명적 공산당들의 중추이기도 했다. 따라서 그들의 투쟁을 자기 몫을 지키려는 경제적 저항으로만 설명할 수 없다. 고임금 때문에 자기 나라 지배계급의 제국주의적 이해관계에 묶여 있었다는 설명은 그들이 반전운동과 국제주의 정치에 나선 사실과 충돌한다(포스트, 2007; 포스트, 2010, 30~32쪽).
팀스터 노동운동을 연구한 미국 사회학자 새뮤얼 R. 프리드먼의 결론은 이렇다. “노동귀족은 하층 노동자보다 덜 혁명적인 것이 아니며, 하층 노동자도 노동귀족보다 덜 개량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브라질 ABC 지대의 금속 노동자, 아르헨티나 코르도바의 자동차 노동자, 그리고 울산의 현대자동차 노동자가 보여 주듯 금속 노동자, 특히 자동차 노동자는 여러 나라에서 대중적 노동운동을 이끌었다. 한국의 경험도 마찬가지다.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1990년대 중반 이후 독점기업에 포섭돼 우경화한 대표 사례로 여겨졌다. 그러나 2010년대 조선업 위기와 노동조건 악화 속에서 다시 투쟁에 나섰다. 한 시기의 온건함을 고임금 집단의 고정된 속성으로 보는 설명으로는 이런 변화를 이해할 수 없다(김하영, 2017, 388~389쪽).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6~1997년 노동법 개악 저지 민주노총 대파업에서 대공장 노동자는 핵심적 구실을 했다. 돌멩은 「사회주의 기초학습#7」에서 “노동귀족으로 길들여진 대기업 정규직”을 말한다. 그러나 그 집단에는 바로 이런 투쟁의 주역들이 포함된다. 강진관이 쓴 「울산지역 타임오프 탄압」과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 총파업」도 대공장 노조에 대한 국가와 자본의 공격을 다룬다. 물론 탄압받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노동자들이 언제나 전투적이거나 부문주의에서 자유롭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길들여진 집단’이라는 설명은 이들의 지속적인 저항과, 자본이 그 조직력을 억제하려고 벌여 온 공격을 해명해야 한다. 노동귀족이라는 규정은 이에 답을 주지 못한다.
삼성전자 사례에서도 같은 문제가 드러난다. 이용덕의 「정당한 출발, 분명한 한계, 잘못된 노선」(2026년 5월 5일)을 보자. 이용덕은 영업이익의 15퍼센트를 성과급으로 지급하라는 요구가 정당하다고 평가하고, 경영진의 이익 독점과 회사의 파업 봉쇄에 맞선 투쟁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러나 정규직 노조들이 하청·비정규직의 요구를 외면한다는 점이 “삼성전자 노동자들의 투쟁을 전면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지지할 수 없는 핵심 이유다”라고 썼다. 그는 그 원인을 지도부에 돌리지도 않았다. 노동자들 자신이 상대적 고임금·복지·고용안정에 안주하면서 실리주의와 노동귀족적 정서를 갖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청·비정규직 조직화와 투쟁에 운동 역량을 집중하자고 주장했다.
대안으로 그는 기본급 대폭 인상과 원·하청 공동 요구를 제시했다. 성과급 중심의 투쟁은 노동자를 기업 이윤에 종속시키고 분열시킬 위험이 있다며, 하청 노동자에게도 같은 성과급을 지급하고 기본급을 동일하게 인상하라는 요구와 장기적인 성과급제 철폐를 제안했다. 같은 필자의 5월 26일 후속 글도 이 기조를 유지했다. 성과급은 임금의 일부라며 파업을 옹호하고, 국민의힘의 노란봉투법 공격과 정부의 긴급조정권 위협을 비판했다. 동시에 노조가 하청·비정규직과 실적이 부진한 사업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배제해 분열과 고립을 자초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전진이 ‘고임금 노동자들의 파업이므로 반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전진은 파업권과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하면서도 연대 부족을 이유로 전면적 지지를 유보했다. 비판할 대목은 바로 이 결합이다.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와 파업을 지지한다고 해서 지도부의 방침에 모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투쟁을 지지하면서 부문주의를 비판하고 공동 요구를 제안할 수도 있는데, 이용덕의 서술은 이 구별을 흐린다.
그가 지적한 부문주의를 굳이 별개의 노동귀족층이 형성되는 과정으로 설명해야 할 이유도 불분명하다. 해당 노동자들의 정치적 한계를 지적하는 것과 그 한계를 특정한 경제적 집단의 속성으로 규정하는 것 사이에는 입증해야 할 간극이 크다.
노조 지도부의 연대 회피, 노동자들의 부족한 투쟁 경험, 성과급을 둘러싼 부문 간 경쟁은 각각 분석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다. 이를 ‘상대적 고임금과 복지에 길들여진 노동귀족적 정서’로 규정하면, 조직과 투쟁을 통해 바뀔 수 있는 의식이 고임금 집단의 고유한 속성처럼 취급된다. 노동자들이 싸워서 임금과 조건을 개선했다는 이유로 그들을 노동귀족으로 분류하고 기회주의의 원천으로 비난한다면, 투쟁의 성과가 곧 정치적 결격 사유가 되는 셈이다. 결국 전진의 개념은 부문주의를 극복하는 과제를 투쟁으로 얻은 상대적 호조건 자체를 의심하는 문제로 바꿔 놓는다.
임금 투쟁의 의미는 당장의 임금 인상액에 그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임금 투쟁을 중시한 것은 노동자들이 자본과의 일상적 충돌 속에서 더 광범한 사회변혁에 필요한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반대로 한 부문의 투쟁을 ‘그들만의 투쟁’으로 방치하면, 고립 때문에 성과를 거두기 어려워질 뿐 아니라 지도부가 적당히 타협하고 투쟁을 끝내기도 쉬워진다. 투쟁을 지지하면서 그 안에서 연대를 설득하고 조직하는 것이 부문주의를 극복할 길이다(김하영, 2026, 20~22, 114~115쪽).
6. 현대차지부 비판에 나타난 노동귀족과 노동관료의 혼동
이용덕은 현대차·기아차지부의 민주성·자주성·투쟁성 약화를 비판하면서 “노동귀족적 태도”라는 말을 덧붙인다. 그러나 노조 지도부의 관료주의와 조합원의 경제적 위치를 구별하지 않으면, 조직 내부에서 누구에게 맞서 누구를 조직해야 하는지가 흐려진다.
이 문제에서 두드러지는 노동귀족 개념의 난점은 노동조합 관료와 고임금 노동자를 한데 묶는 경향이다. 지노비예프의 “노동귀족과 노동관료는 형제다”라는 말이 그 전형이다. 그러나 상대적 고임금을 받는 노동자도 생산현장에서 착취와 통제를 겪는다. 반면 노조 관료는 현장의 일상적 노동에서 벗어나 노동자를 대표하고 자본·정부와 협상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래서 노조 관료층은 교섭 기구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고, 투쟁이 협상과 타협의 틀을 넘어서는 것을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계급투쟁이 고조될 때 노동자 상층이 급진화하더라도 관료층이 그 발전을 제어하려 드는 이유다. 두 집단을 가르는 핵심은 임금 수준보다 이런 사회적 위치와 기능의 차이에 있다.
이 분석은 노조 관료가 언제나 투쟁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관료층은 노동자를 대표하는 조직에 기반을 두므로, 사용자의 공격으로 조직이 약해지거나 조합원의 불만이 커지면 투쟁을 이끌기도 한다. 그러나 그때도 투쟁을 자신의 협상 전략 아래 통제하려 한다. 노동자에게 기반을 두면서 자본과 중재하는 이중적 위치를 봐야, 같은 지도부가 파업을 조직하다가 돌연 제동을 거는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관료주의를 고임금 조합원의 보수성으로 치환하면 이런 모순된 역할을 놓친다(김하영, 2017, 403~406쪽).
비교역사사회학자 찰리 포스트는 이 차이를 일반 노동자들의 ‘조건부 개량주의’와 노조·정당 관료층의 ‘무조건적 개량주의’로 구별한다. 노동자들은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팔아야 하므로 끊임없이 파업과 대중행동에 나설 수 없다. 투쟁이 소강상태에 있는 평상시에는 많은 노동자가 일상적인 교섭과 선거를 통해 자기 조건을 지키거나 개선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며 대표자들에게 문제 해결을 맡긴다. 이런 의존은 개량주의적 방법이 자신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는 기대에 기초한다는 점에서 ‘조건부’다. 그러나 집단적 투쟁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경험하면 그 기대와 태도도 바뀔 수 있다(포스트, 2014, 253~255쪽).
반면 상근 관료층은 자신의 지위와 생활조건이 조직 기구의 존속, 통상적인 교섭과 선거 활동에 결부돼 있다. 그래서 그런 방법이 더는 개혁을 가져오지 못하고 자본에 대한 양보만 거듭하게 할 때도 그 방법을 고수하는 경향이 있다. 아래로부터 독립적인 동원이 압력을 가하지 않는 한, 자신의 지위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전투적 행동을 피하려는 것이다. 같은 개량주의라도 현장 노동자의 것과 관료층의 것은 사회적 기반과 지속성이 다르다. 이를 공통된 ‘노동귀족적 이해관계’로 설명하면, 조합원들이 지도부의 타협에 반발하고 이를 넘어설 가능성까지 가리게 된다(포스트, 2014, 254~255쪽).
포스트는 이 둘과 구별되는 ‘전투적 소수’의 구실도 강조한다. 이들은 투쟁이 소강상태일 때도 활동을 이어 가는 비상근 현장대표와 활동가들로, 동료들을 행동으로 끌어들이면서 노조 관료층과 충돌한다. 다수 노동자의 수동성과 관료층의 통제에 맞서 투쟁을 확대하는 데 이들의 조직과 활동이 중요하다. 이는 노동자를 소득 수준에 따라 나누는 구분이 아니라, 조직·활동·의식과 사회적 역할의 차이를 살피는 분석이다(포스트, 2014, 255~256쪽). 전진이 대공장 조합원을 ‘노동귀족’으로 싸잡으면, 관료의 통제에 맞서 동료들을 조직하는 이 현장 활동가들의 구실까지 놓치게 된다.
이 구별에 비추어 이용덕의 「노동자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입증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선거」(2025년 9월 23일)를 보자. 그는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기아차지부처럼 민주성·자주성·투쟁성을 많이 상실하고 노동귀족적 태도를 보이며, 자신들만의 틀에 갇힌 다른 대공장노조”를 비판한다. 그러나 민주성 약화는 지도부가 조합원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과정과 관련된다. 자주성·투쟁성의 약화도 지도부의 노사협조, 현장 조직의 쇠퇴, 조합원들의 의식과 행동을 함께 살펴야 설명할 수 있다.
이용덕은 같은 글에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지도부의 비공개 이면 합의를 비판하고 조합원들의 민주적 통제를 강조한다. 지도부와 조합원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을 스스로 보여 준 것이다. 그런데 현대차·기아차지부에는 “노동귀족적 태도”라는 말을 붙여 노조 전체를 하나의 속성으로 묶는다. 이 표현은 앞서 구별했던 지도부와 조합원의 차이를 다시 흐린다. 노조 관료주의를 분석하는 데 필요한 도구는 룩셈부르크의 『대중파업』 같은 저작에 이미 있다. 노동귀족이라는 이름을 덧붙여 얻는 것은 분석의 정밀함이 아니라 대상의 혼동이다.
현대차의 실제 경험에서도 이 구별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1998년 36일간 공장을 점거했던 조합원들은 277명의 정리해고를 포함한 지도부의 잠정합의안을 부결시켰다. 지도부의 타협과 조합원들의 저항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했다. 2015년에도 금속노조 조합원들이 총투표로 결의한 4월 24일 하루 파업을 이경훈 현대차지부장은 ‘억지 파업’이라고 비난하며 거부했다. 이런 사례를 현대차 노동자 전체의 ‘노동귀족적 태도’로 설명하면, 투쟁 의지를 제어한 지도부의 책임을 그 지도부와 충돌한 노동자들에게까지 떠넘기게 된다(김하영, 2017, 412~413, 415~416쪽).
이 혼동은 실천에도 영향을 미친다. 관료주의를 문제 삼는다면 현장 조합원을 조직하고 지도부에 아래로부터 압력을 가하며 공동행동을 추진해야 한다. 반면 대공장 정규직 전체를 보수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집단으로 취급하면, 그 내부에서 계급적 연대를 건설할 가능성을 과소평가하기 쉽다.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의 조직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것을 정규직 노동자의 투쟁과 대립시키는 근거로 노동귀족 개념을 동원하면, 연대해야 할 노동자들을 갈라놓게 된다.
7. 노동귀족적 정서라는 순환논리
전진은 경제적 위치와 정치적 태도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정서’와 ‘길들여짐’이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노동귀족적 정서”, “상대적 고임금과 복지에 길들여진 노동귀족적 정서를 표현하는 실리주의”, “노동귀족으로 길들여진” 등이 그렇다. 그런데 설명해야 할 정치적 태도 자체가 노동귀족을 판별하는 기준이 되면 논증은 순환한다. 정치적 태도를 물질적으로 설명하려면, 그 태도와 구별되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을 밝히고 둘을 잇는 과정을 분석해야 한다.
전진의 설명에서는 이 순서가 뒤집힌다. 실리주의를 보이므로 노동귀족이고, 노동귀족이므로 실리주의를 보인다는 논리가 된다. 더구나 임금과 복지의 개선을 추구하는 것 자체는 노동조합의 기본 활동이다. 다른 노동자를 배제하거나 그 투쟁을 가로막는 행위와 이 기본 활동을 명확히 구별하지 않으면, 노동조합의 일상적 임금 투쟁까지 ‘귀족층’의 속성으로 오인하게 된다. 엥겔스의 노동조합론을 노동귀족론의 근거로 제시한 오류가 여기서 되풀이된다.
‘길들여진’이라는 표현은 노동자의 의식이 형성되고 바뀌는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그람시의 ‘모순된 의식’ 개념이 대안적 설명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노동자는 자본주의 질서와 지배 이데올로기의 압력을 받는 동시에, 착취에 맞서 함께 싸우며 집단적 힘을 경험한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불만과 그 질서의 틀 안에서 개선을 바라는 기대가 공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적 개량주의의 기반은 특정 고임금층의 ‘매수’가 아니라 노동계급 전반이 겪는 이런 모순에서 찾아야 한다.
루카치의 사물화 개념도 이 문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사물화는 인간이 만들어 낸 사회관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독립된 사물의 관계처럼 나타나는 현상이다.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처지에서 노동자는 시장과 자본의 힘을 바꿀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기 쉽다. 그러나 착취에 맞선 공동투쟁은 그 무력감을 깨뜨릴 가능성을 연다. 체제에 대한 순응과 저항의 이런 모순은 고임금 노동자에게만 나타나지 않는다. 저임금·미조직 노동자도 지배 이데올로기와 개량주의에서 저절로 벗어나지 않는다.
따라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의 보수성만 걷어 내면 그 아래에서 혁명성이 저절로 분출하리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를 그와 대조되는 투쟁 주체로 배치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고용의 불안정성과 저임금은 분노와 저항을 낳을 수 있지만, 그것이 곧바로 계급적 연대나 혁명적 의식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백종성은 고임금과 기업복지를 누리는 일부 노동자들이 자기 이해만 추구하는 상황이 “노동자계급운동에 대한 미조직 대중의 반동적 정서를 강화한다”고 쓴다. 부문주의가 연대를 해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를 조직 노동자에 대한 반동적 적대감과 연결하려면 지배계급의 개입을 구체적으로 분석해야 한다. 백종성도 바로 다음 문장에서 지배계급이 미조직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조직 노동자를 공격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그에 앞서 고임금·기업복지와 배타적 행동을 한데 묶어 단결 훼손의 원인으로 제시함으로써, 공격의 빌미와 공격을 만들어 내는 원인을 분명하게 구별하지 못한다.
한국에서 ‘귀족노조’ 비난이 확산된 맥락도 지배계급의 능동적 개입을 보여 준다. 노무현 정부가 대기업 정규직 노조를 공격한 것은 그 노동자들이 체제에 순응해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투쟁에 나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3년 노무현은 대기업 노조가 비정규직을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했느냐며 그 투쟁의 도덕성을 공격했다. 비정규직의 열악한 처지를 조직 노동자의 투쟁에 제동을 거는 명분으로 이용한 것이다(김하영, 2017, 375~378쪽). 물론 노동운동 안의 배타성은 면책되는 것이 아니다. 자본과 국가가 노동자 사이의 격차와 불안을 이용해 분열을 조장하는 과정, 노동운동 내부에서 이에 동조하거나 맞서 싸운 세력을 구체적으로 밝혀야 한다. 고임금 조직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미조직 대중의 반감의 원인처럼 서술하면, 분열을 조장한 세력의 책임을 노동자에게 넘기는 ‘귀족노조’ 담론에 힘을 보태게 된다.
8. 귀족노조 담론을 배격하면서 그 전제를 되풀이하는 모순
전진은 우파의 ‘귀족노조’ 공세를 배격한다고 밝힌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가 얻은 상대적 호조건을 다른 노동자의 불이익의 원인처럼 서술하면, 우파의 ‘귀족노조’ 공세의 핵심 전제가 자신의 분석 안으로 들어온다. 정치적 목적이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이 모순을 피할 수는 없다.
우파의 주장은 대기업 정규직 노조가 고임금과 고용 안정을 지키기 때문에 비정규직·청년·중소기업 노동자가 피해를 본다는 것이다. 전진은 정규직의 연대 회피를 비판하고 계급적 연대를 촉구한다. 문제는 그 연대 요구를 뒷받침하는 설명이다. 정규직의 임금을 하청 착취의 ‘떡고물’로 규정하거나, 고임금 노동자의 존재와 부문주의를 구별하지 않은 채 고임금 노동자의 존재 자체를 계급적 단결 훼손의 원인으로 규정하면, 자본과 노동 사이의 분배 투쟁이 노동자 집단끼리 몫을 다투는 문제로 치환된다. 우파와 다른 결론을 내세운다고 해서 이 공통된 오류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노동귀족론자는 노동귀족이 상시적인 이익을 얻은 만큼 주변적 노동자들이 상시적인 불이익을 떠안는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문한다. 이른바 노동귀족이 상대적 고임금을 포기했다면, 그 돈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에게 균등하게 돌아갔으리라는 근거는 무엇인가? 정규직의 임금을 낮춘다고 그 차액이 하청·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지급되지는 않는다. 자본은 그 몫을 노동자에게 돌리기보다 설비·사업 투자나 사업 운영, 부채 상환 등에 쓰려 할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임금 총액이 미리 정해져 있고 한쪽이 더 받으면 다른 쪽이 덜 받아야 한다는 전제는, 임금과 이윤의 분배를 둘러싼 계급투쟁을 가려 버린다. 노동자의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에 사용자에게서 쟁취한 몫이 포함돼 있다는 점을 분석에 포함해야 한다. 일부 노동자의 연대 외면을 비판하는 것과 그들의 임금 인상 자체를 다른 노동자의 손해로 규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노동조합이 임금 격차에 미치는 효과에 관한 연구도 ‘조직 노동자가 더 받으면 나머지가 손해 본다’는 주장을 반박한다. 김하영이 인용한 강승복·박철성의 연구에 따르면, 2000년 이후 격차 확대의 주요 원인은 비노조 부문에서 사업체 간 임금 격차가 급격히 커진 데 있었다. 반면 노동조합은 전체 임금 격차를 줄이는 방향으로 작용했다. 하후상박의 임금 요구와 강한 노조가 다른 사업장의 임금 교섭에서 기준을 제시하는 효과 등을 함께 봐야 한다. 조직 노동자의 상대적 고임금만 떼어 놓고 노조를 불평등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이런 작용을 거꾸로 설명하는 것이다(김하영, 2016).
한국의 경험에서도 임금 양보와 계급적 연대를 동일시할 수 없음이 드러난다. 기아차지부 김성락 집행부는 2016년 ‘나눔과 연대기금’ 정책을 내세웠지만, 2017년에는 비정규직 분회를 노조에서 강제 분리했다. 정규직 임금 인상분의 일부를 비정규직 조건 개선에 쓰겠다는 방침이 함께 조직하고 싸울 기반을 훼손하는 행동과 양립했던 것이다. 기금을 나누겠다는 약속은 비정규직을 같은 노조로 조직하고 공동투쟁을 건설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다(김하영, 2017, 343쪽).
스웨덴 연대임금 정책의 경험도 임금 격차 축소와 계급적 연대의 강화를 구별해야 함을 보여 준다. 이 정책은 일정한 격차 축소 효과를 냈지만 경제 안정과 기업 경쟁력을 위한 임금 인상 억제 정책이기도 했다. 스웨덴 노총은 고임금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을 격차를 심화시키는 행위로 규정해 통제했고, 중앙교섭의 강화는 노조 상층 관료기구의 통제력 확대와 맞물렸다. 격차 축소라는 명분이 현장 노동자의 투쟁을 제약하고 수동화하는 데 쓰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문제는 고임금 자체가 아니라, 노동자의 힘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정치와 조직 운영에 있다(김하영, 2026, 83~89쪽).
반대로, 1987년 이후 울산의 경험은 조직 노동자의 투쟁이 더 열악한 노동자들의 조건을 끌어올릴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중화학공업 사업장들에서 사내하청·임시공·일용공이 직영 노동자들과 연대해 정규직화를 이뤘다. 현대중공업에서는 1987년 이후 1989년 5월까지 하도급 업체 노동자들이 직영 정규직으로 편입됐다(김하영, 2017, 349~350쪽). 이런 확산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조직 노동자의 투쟁이 다른 노동자의 조건을 개선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사실은, 그들의 성과를 계급 나머지 부분의 손실로 보는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하후상박은 고임금 노동자의 임금 억제와 같은 뜻이 아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부터 5월까지 이어진 파업의 결과 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59퍼센트, 미숙련 노동자의 임금은 125퍼센트 올랐다. 모두의 임금을 올리면서 격차도 줄인 것이다. 격차를 없앤 뒤에야 연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함께 투쟁하며 격차를 줄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김하영, 2026, 80, 112~113쪽).
한국에서 대기업 정규직의 임금 억제와 고용 유연화를 정당화하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담론에 맞서려면 이 구별이 중요하다. 전진은 삼성 노동자들의 투쟁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상대적 호조건을 설명할 때는 ‘길들여짐’과 ‘노동귀족화’를 내세운다. 투쟁으로 얻은 성과를 방어해야 한다면서 그 성과를 정치적 보수성의 근거로 의심하는 모순이다. 부문주의를 비판하고 원·하청 공동투쟁을 추진하려면 정규직의 정당한 임금 요구를 방어하면서 그 투쟁을 확대할 길을 제시해야 한다. 이 과제를 노동귀족화 경고로 대신하면 임금 억제 논리에 맞설 자신의 근거부터 훼손한다.
9.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 사례의 시사점
노동귀족론은 노동계급 내부의 분열을 고정된 집단 사이의 대립으로 취급함으로써 자본에 맞선 단결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한다. 오스트레일리아 공산당은 노동귀족론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그 이론이 계급협조주의의 기반으로 특별히 지목한 (광산·건설·기계)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을 건설했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이 노동자들의 투쟁은 다른 노동자들의 처지도 개선했다. 1947년 빅토리아주 기계공들의 6개월 파업은 기초임금 인상의 길을 열어 미숙련 노동자들에게 특히 큰 혜택을 줬다. 또, 1968~1974년의 파업 물결에서도 조직력이 강한 노동자들이 쟁취한 임금 인상이 다른 부문으로 확산됐다. 이는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의 희생으로 득을 본다는 주장에 대한 반증이다.
그러나 노동귀족론은 1980년대 노동자 투쟁 침체기에 그 진면목을 드러냈다. 1983년부터 시행된 ‘물가·소득 협약’은 노동당과 오스트레일리아노동조합평의회(ACTU)의 합의였는데, 공산당 계열 노조 지도자들도 이 협약을 추진했다. 협약의 골자는 노조의 임금 인상 요구를 억제하는 대신 의료·교육·복지 등 ‘사회적 임금’을 개선한다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노동당 정부와의 협조 및 임금 억제라는 기회주의적 목표에 노동귀족론을 이용했던 것이다.
공산당의 합리화 논리는 이렇다. 조직력이 강해 형편이 괜찮은 숙련 노동자들이 임금 투쟁을 벌이면 그들 자신은 이익을 얻지만, 미숙련·미조직 노동자들, 특히 여성 노동자들은 뒤처진다. 따라서 격차가 더 벌어지지 않도록 강한 부문의 노동자들이 요구를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저임금 노동자들과의 연대라는 명분은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제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뒤바뀌었다.
공산당이 이런 명분을 내세운 이유는 분명하다. 오스트레일리아 자본주의를 위해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노골적으로 말하면 신뢰를 잃을 것이므로, 격차 해소라는 진보적으로 들리는 논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이미 1981년에 금속산업 협약을 비판하면서 공산당은 소수의 강한 노조만 이익을 얻고 나머지는 얻지 못한다는 ‘노동귀족’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공산당 계열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평등의 논리를 동원해 임금 억제를 옹호했다는 사실은 여러 연구에서 확인된다.
요컨대 앞 시기에는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실천이 노동귀족론의 도식에서 벗어나 있었다면, 뒤 시기에는 바로 그 도식이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제하는 논거로 쓰인 것이다.
결과는 저임금층의 상향 평준화가 아니었다. 강한 노조들이 임금 억제에 동의하자 임금 전반에 대한 공격이 쉬워졌고, 1983~1990년 중재기구가 정한 임금률의 실질가치는 13퍼센트 하락했다.
이 사례가 한국의 노동귀족론 논의에 주는 시사점은 분명하다. 노동귀족론은 온건화와 노사협조의 원천을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의 노동자들’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사례에서 실제로 계급 협조를 조직한 주체는 그 노동자들이 아니라 노조 지도자들이었다. 지도부는 다른 노동자들과의 평등을 명분으로, 투쟁할 힘을 가진 부문에 자제를 요구했다. 즉,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를 문제 삼는 논리는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노동자들의 발을 묶는 데 쓰인 것이다.
이 점은 노동귀족론의 핵심 가정을 뒤집는다. 노동귀족론은 ‘나은 처지’가 곧 ‘투쟁 회피’를 낳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 사례에서 나은 처지의 노동자들은 싸울 의지와 능력을 갖고 있었다. 그들을 주저앉힌 것은 그들의 물질적 특권이 아니라 사용자와 노동자 사이를 매개하는 위치에 있는 노조 지도부였다. 지도부는 조합원의 투쟁력을 협상 자원으로 삼되 그 투쟁이 실제로 폭발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런 모순된 위치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평등을 위한 자제’라는 수사다. 그것은 노동자 간 연대의 언어를 빌려 왔지만 효과는 정반대였다. 강한 부문이 싸워 성과를 내면 그것이 약한 부문의 교섭 기준이 돼 전체 노동자의 조건을 끌어올리는데, 자제 요구는 그 상향 평준화의 고리를 끊고 하향 평준화를 ‘평등’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한국에서도 노동귀족론 논의의 초점은 ‘상대적으로 나은 처지의 조합원’과 ‘그들을 기반으로 삼는 노조 지도부’를 구별하는 데 두어야 한다. 전자는 흔히 조직 노동자의 가장 강력한 부분이며, 후자는 그 힘을 관리함으로써 자기 지위를 유지한다. 둘을 한데 묶어 ‘노동귀족’이라 부르면 비판의 칼날은 지도부의 계급 협조와 개량주의를 비껴가 조합원에게 향하고, 지도부는 오히려 그 비판을 빌려 조합원에게 양보를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이 사례는 노동귀족론이 분석 도구로서 부정확할 뿐 아니라, 실천에서는 계급 협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전용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를 줄이는 길은 강한 부문의 자제가 아니라 강한 부문의 투쟁을 약한 부문과 연결하는 것이며, 그 연결을 가로막는 것은 ‘나은 처지’가 아니라 노조 지도자들의 중개자적 위치다.
물론 노동자 사이의 연대를 가로막는 원인이 오직 노조 관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들 자신도 노동력 판매자로서 서로 경쟁하고, 그 과정에서 배타적인 이해관계와 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다(이 글 제7절을 보라). 그렇기 때문에 혁명적 좌파는 형편이 조금 더 낫다는 이유로 같은 노동자를 배제하지 말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해야 한다.
10. 공동전선 방침을 훼손하는 노동귀족 규정
노동귀족 개념은 전진이 실제로 개입하는 대공장 노동자의 투쟁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에게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노선을 정당화하는 데 동원된다. 여기에는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를 별개의 정치적 주체로 이상화할 위험과, 전진 자신이 제시한 공동전선 방침을 훼손할 위험이 있다.
전진도 삼성전자노조 선거와 현대차지부의 문제를 다루고 대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을 보도하며 그 운동의 방향을 제안했다. 그렇다면 ‘노동귀족’이라는 규정이 이런 개입에서 어떻게 작용했는지 돌아보자. 전진은 삼성전자 정규직 노조들에 ‘하청 노동자들에 대한 성과급 동일 지급 요구, 기본급 동일 인상을 내걸 것’을 요구하라고 했다. 요구안 자체에 하청 동일 적용을 넣으라는 것이었다. 최승호 위원장은 이틀 뒤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그건 회사에 요구하라”고 간단명료하게 답변했다. 전진의 입장은 요컨대 ‘조건부’ 지지였는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 투쟁을 먼저 무조건 지지해야 한다. ‘무조건’이라 함은 ‘서슴없이’, ‘거리낌 없이’, ‘어정쩡하지 않고 온전히’라는 뜻이다. ‘조건부’ 지지라는 것은 사실상 지지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하는 입장에 불과하다. 전진은 정규직보다 명일지회·이엔에스지회 같은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설득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노동귀족론이 비정규직 중심 노선을 정당화하는 표지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분석 개념이 아니라 이미 정한 노선을 뒷받침하는 수사일 뿐이다.
이 사례에서 두드러지듯이 노동귀족론은 위험을 제기한다. 첫째 위험은 고용 안정을 누리는 노동자를 특권적 집단으로 보고,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를 그와 대립하는 새로운 주체로 설정하는 것이다. 이 구도에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공유하는 자본과의 계급관계보다 두 집단 사이의 차이가 앞선다. 노동계급 내부의 분할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기보다는, 정치적 전망을 달리하는 집단 사이의 경계로 굳힐 위험이 있다.
전진이 저임금·불안정 노동자를 노동계급과 별개의 계급으로 보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대공장 정규직을 ‘길들여진’ 집단으로 묶고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를 그와 대조되는 투쟁 주체로 제시함에 따라, 정치적 잠재력을 고용 형태에서 곧바로 도출하는 오류에 빠지게 된다. 고용 형태는 조직화의 조건과 투쟁 양상에 영향을 미치지만 혁명성의 보증서는 아니다. 비정규직 조직화의 필요성은 정규직 노동자의 혁명적 잠재력을 평가절하하지 않고도 충분히 논증할 수 있다.
비정규직·하청 노동자의 잠재력도 열악한 처지 자체보다 생산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조직 가능성 속에서 찾아야 한다. 자동차 부품 노동자는 완성차 기업 밖에 고용돼 있어도 그 생산에 필수적인 일을 한다. 부품 공급이 끊기면 완성차 조립도 차질을 빚는다. 노동시장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이유로 이들을 생산에서도 ‘주변적’이고 무력한 집단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정규직의 잠재력을 깎아내려야 비정규직의 잠재력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김하영, 2017, 328~329쪽).
둘째 위험은 공동전선 방침과의 충돌이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대응은 개량주의에 대한 분석, 혁명가들의 독립적 조직, 공동전선 전술로 정리된다. 혁명가들은 개량주의 지도부와 정치적·조직적으로 독립하면서도, 그 영향 아래 있는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그들을 설득해야 한다. 노동귀족론(적어도 그 일부 논증)은 그 노동자들까지 개량주의 지도부와 한통속으로 취급하게 만든다. 그러나 노동귀족론을 제창한 레닌 자신이 기존 노동조합에서의 활동을 포기하려는 일부 유럽 공산당의 좌파를 비판했다. 노동귀족이라는 규정이 그 노동자들과 함께 싸울 필요를 면제해 주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전진도 공동전선을 명시적으로 제시한다. 백종성의 같은 기초학습 글에는 공동전선을 다루는 별도 절이 있으며, 개량주의 정당을 지지하는 노동자뿐 아니라 그 정당 자체도 공동행동에 참여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비판할 대목은 공동전선 방침의 부재가 아니라, 그 방침을 뒷받침하지 못하는 노동귀족 개념이다. 함께 싸우며 설득해야 할 노동자를 고임금과 복지에 ‘길들여진’ 집단으로 규정하면, 공동행동을 통해 의식과 조직이 바뀔 가능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어려워진다.
실제 경험은 공동행동의 가능성을 보여 준다. 2014년 희망연대노조의 씨앤앰 원청 정규직과 하청 노동자들은 생활임금 확보와 고용보장 등의 공동 요구를 내놓고 연대 파업을 벌여, 원·하청이 함께 투쟁한 대표적인 연대 사례를 남겼다. 또, 2026년 4월 LG헬로비전의 원·하청 노조는 사측의 일방적인 구조조정에 맞서 고용 안정을 촉구하는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다. 아울러 원·하청 노동자 간의 복지 차별을 해소하고 실질적 책임자인 LG유플러스가 직접 교섭에 나설 것을 공동요구안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공동요구안 제출이 연대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자기 조건을 지키려 싸우는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연대의 필요성을 배우고 다른 부문과 함께 투쟁할 자신이 생길 수 있다. 그 투쟁을 외면한 채 더 보편적인 요구를 먼저 내세우라고 주문하면, 공동행동을 발전시킬 출발점부터 약화시킨다. 정규직도, 비정규직도 자신의 투쟁을 잘하면서 서로 연대하는 것이 중요하다(김하영, 2017, 345~348쪽; 김하영, 2016).
전진은 모순된 입장을 거두고 노동조합 관료와 고임금층 노동자를 구별해, 이 구별을 실제 활동에 적용해야 한다. 현대차지부 지도부의 연대 기피에 맞서 현장 조합원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공동 요구를 어떻게 만들고 그 실현을 위해 함께 싸울 것인가? ‘노동귀족’ 개념은 이 질문들에 답하지 못한다. 오히려 같은 노조 안에서 맞서야 할 관료와, 함께 싸워야 할 조합원을 뒤섞는다.
11. 스타하노프 운동과 대공장 노동자를 뒤섞는 유비
돌멩은 국가가 특정 노동자를 선별해 우대했던 스타하노프 운동을 한국 대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격차에 견준다. 「사회주의 기초학습#7」은 월터 돔을 인용해 소련의 스타하노프 운동이 “새로운 노동귀족을 창출”했다고 설명한 뒤, 그것이 오늘날 한국의 “노동귀족으로 길들여진 대기업 정규직”과 불안정 비정규직 사이의 격차를 떠올리게 한다고 쓴다. 스타하노프 운동에서는 국가가 생산량 증대에 앞장설 노동자를 선별하고 특별 보수와 각종 우대를 제공했다. 이들의 높은 작업 실적은 다른 노동자에게 더 높은 작업 기준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격차가 있다는 공통점만으로, 그 격차의 형성 과정과 정치적 기능까지 같다고 볼 수는 없다.
스타하노프 사례에서는 누가 누구를 선별했으며, 어떤 보상을 통해 무슨 목적을 달성하려 했는지 비교적 분명하다. 한국 대기업 정규직에 같은 설명을 적용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경로를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현대차를 비롯한 대공장 민주노조는 국가와 자본의 탄압에 맞서 건설됐고, 임금과 노동조건의 개선도 그 투쟁이 거둔 성과를 포함한다. 이후의 노사협조와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은 따로 분석해야 하지만, 그 역사를 도외시한 채 정규직 노동자 전체를 위로부터 육성된 충성 집단에 견주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비약이다.
성과급을 둘러싼 문제도 구별해야 한다. 자본은 차등 보상을 이용해 노동자를 경쟁시키고 생산성과 이윤의 논리에 묶어 둘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성과급의 배분과 결정 방식에 집단적으로 개입하는 투쟁까지 곧바로 자본의 분할 전략과 같은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반대로 모든 성과급 투쟁이 부문 간 분열을 자동으로 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판단의 기준은 구체적인 투쟁이다. 기본급 인상, 차등 축소, 하청·비정규직과의 공동 활동과 연대를 넓히는가, 아니면 그런 활동과 연대를 회피하는가? 이 정치적 분기점을 ‘노동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면, 성과급제의 통제 기능과 그에 맞선 노동자의 집단적 투쟁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삼성전자의 성과급제는 노동강도 강화와 노동시간 연장에 이용된다. 그러나 동시에 성과급 투쟁은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 중 자본에 빼앗기는 몫을 줄이려는 정당한 투쟁이었다. 성과급제 비판과 성과급 투쟁 지지는 양립한다. 기본급 비중을 높이는 요구도 임금 총액을 지키고 늘리는 요구와 결합해야 한다. 기본급 인상을 명분으로 사측이 수당을 없애는 경우처럼, 임금 안정성을 높인다며 총액의 후퇴를 받아들이면 노동자의 조건을 지킬 수 없다(김하영, 2026, 17, 108~109쪽).
결론
전진은 노동귀족 개념을 변형해 대기업 정규직 조합원을 책망하고 있지만, 상대적 호조건과 정치적 보수성 사이의 인과관계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한 채 결국 우파의 ‘귀족노조’ 담론의 책임 전가 논리를 되풀이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노동귀족의 형성을 설명하면서 국내 산업의 호황과 교섭력, 재벌의 초과착취를 내세우지만, 이 조건들이 특정 노동자 집단의 정치적 보수성으로 이어지는 경로는 밝히지 못한다. 이 공백을 메우는 것이 “떡고물”, “길들여진”, “노동귀족적 정서” 같은 표현이다.
이 표현들은 자본의 분할 전략과 노동자의 투쟁, 노조 관료의 타협과 현장 조합원의 선택을 하나의 도덕적 평가 속에 뒤섞는다. 현대차지부 비판에서는 관료와 조합원의 경제적 위치가 혼동되고, 삼성전자 투쟁 분석에서는 부문주의를 설명할 자리에 ‘길들여진 정서’가 들어선다. 스타하노프 운동과의 유비는 위로부터의 선별적 우대와 아래로부터 쟁취한 조건의 차이를 도외시한다.
이는 단순한 용어 선택의 실수가 아니다. 정규직의 임금을 하청 착취의 ‘떡고물’로 설명하고 노동자 사이의 격차를 특정 조직 노동자 부문의 책임으로 돌리면, 전진이 배격하는 우파의 ‘귀족노조’ 공세의 논리가 자신의 분석 안으로 들어온다. 기아차의 연대기금 정책과 비정규직 노조 분리 사례는 임금 양보를 내세우는 것과 계급적 단결을 건설하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 준다. 계급적 연대를 말할수록 그 연대를 훼손하는 전제부터 버려야 한다.
전진이 재검토해야 할 것은 자신이 사용하는 노동귀족론의 논리 구조다. 함께 싸우고 설득해야 할 노동자를 ‘길들여진’ 집단으로 규정하고 투쟁으로 얻은 조건을 ‘떡고물’로 평가절하해서는 계급적 단결의 길을 제시할 수 없다. 경제적 위치와 정치적 태도, 현장 노동자와 노조 관료를 구별하는 데서 분석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 분할을 누가 만들고 유지하는가? 그 분할을 강화하는 노조 지도부의 타협과 특정 조합원 집단의 부문주의를 어떻게 깨뜨릴 것인가? 두 집단을 함께 조직해 자본에 맞선 공동투쟁으로 나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노동귀족이라는 개념은 이 질문들에 답하기보다 서로 구별해야 할 대상을 뒤섞어 답을 가로막는다. 전진이 이 개념을 버려야 노조 관료의 기능과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조직·투쟁을 구체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출처와 참고문헌
전진 측 자료
- 백종성, 「[사회주의 기초학습#12] 사회주의 정당의 기본노선」, 2026년 5월 11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481
- 이용덕, 「노동자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입증한 전국삼성전자노동조합 선거」, 2025년 9월 23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281
- 이용덕, 「정당한 출발, 분명한 한계, 잘못된 노선」, 2026년 5월 5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478
- 이용덕, 「삼성전자 파업을 노란봉투법 탓으로 돌리는 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비정규직노동자들의 각성」, 2026년 5월 26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494
- 양준석, 「아르헨티나, 옴니버스 법안을 폐기시키다」, 2024년 3월 2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737
- 강진관, 「대규모 사업장 노동자, 전체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한 총파업을 조직하자!」, 2023년 4월 27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409
- 강진관, 「과거 투쟁의 경험을 반면교사로 2024년 울산지역 민주노조에 집중되는 타임오프 탄압을 돌파하자!」, 2024년 6월 4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865
- 돌멩, 「[사회주의 기초학습#7] 사회주의 바로알기: 중국, 북한은 가짜 사회주의」, 2025년 12월 17일. https://socialism.jinbo.net/bbs/board.php?bo_table=news&wr_id=1342
노동귀족 개념과 개량주의에 관한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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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하영, 「신자유주의 하에서 노동계급은 분절되고 파편화됐는가?: 임금 격차, 노동조합, 그리고 연대」, 『노동자 연대』 173호, 2016년 4월 30일. https://ws.or.kr/article/17148
- 김하영, 『임금, 임금격차, 연대 — 마르크스주의의 관점』, 3판 개정·증보판, 노동자연대, 2026년 7월 15일. (본문의 쪽수는 책에 표시된 쪽수.)
- Elaine Graham-Leigh, “Do Workers Benefit from Imperialism? Lenin and the Labour Aristocracy”, Counterfire, 2024년 5월 8일. https://www.counterfire.org/article/do-workers-benefit-from-imperialism-lenin-and-the-labour-aristocracy/
- Alfie Hancox, “Imperialism and British workers: moving past the labour aristocracy debates”, 2024년 8월 12일. https://revsoc21.uk/2024/08/12/imperialism-and-british-workers-moving-past-the-labour-aristocracy-debates/
- Tom Bramble, “Is there a labour aristocracy in Australia?”, Marxist Left Review 4, 2012년 겨울호. https://marxistleftreview.org/articles/is-there-a-labour-aristocracy-in-australia/ (현재 웹페이지의 게시일 표시는 2018년 10월 12일.)
- Donny Gluckstein, “Classical Marxism and the question of reformism”, International Socialism 143, 2014년 6월 26일. https://isj.org.uk/classical-marxism-and-the-question-of-reformism/
- Kevin Corr and Andy Brown, “The labour aristocracy and the roots of reformism”, International Socialism 59, 1993, 37~74쪽.
- Charlie Post(찰리 포스트), “The Labor Aristocracy: A Reply”, Against the Current 127, 2007년 3~4월호. http://www.solidarity-us.org/current/node/490
- Charles Post(찰리 포스트), “Exploring Working-Class Consciousness: A Critique of the Theory of the ‘Labour-Aristocracy’”, Historical Materialism 18, 2010, 3~38쪽. https://doi.org/10.1163/156920610X550596 (본문의 쪽수는 학술지 인쇄면 기준.)
- Charles Post(찰리 포스트), “The Roots of Working Class Reformism and Conservatism: A Response to Zak Cope’s Defense of the ‘Labor Aristocracy’ Thesis”, Research in Political Economy 29, 2014, 241~260쪽. https://doi.org/10.1108/S0161-723020140000029008 (본문의 쪽수는 인쇄면 기준.)
- 프리드리히 엥겔스, 「임금제도」, 1881년 5월 21일 발표. https://www.marxists.org/archive/marx/works/1881/05/21.htm
- Tony Cliff, “Economic roots of reformism”, Socialist Review, 1957년 6월. https://www.marxists.org/archive/cliff/works/1957/06/rootsref.htm
- Özgür Öztürk, “Rethinking the aristocracy of labor”, Revolutionary Marxism 2023, 105~144쪽. 본문의 프리드먼 인용은 123쪽, 일본의 원청·하청 사례는 127쪽 참조. https://www.devrimcimarksizm.net/sites/default/files/ozgur_ozturk_rethinking_the_aristocracy_of_labor
- Samuel R. Friedman, “Labor Aristocracy Theories and Worker Politics”, Humanity and Society 10, 1986. 본문의 인용문은 129쪽이며, Öztürk(2023), 123쪽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