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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운동이 내딛은 거대한 첫 발

1987년 6월항쟁에 뒤이은 7∼9월 대중파업은 남한 노동자 운동이 거대한 첫발을 내딛은 사건이었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1997년 1월 노동자들은 두 번째로 거대한 대중파업을 벌였다. 1987년과 1997년 두 거대한 파업을 비롯해 10년 넘게 수많은 노동자 투쟁을 거치며 노동자 운동은 조직적·정치적으로 발전했다. 이 결과 민주노총이 건설됐고, 더 나아가 민주노동당도 건설될 수 있었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김대중은 이러한 거대한 노동자 투쟁이 사회를 왼쪽으로 이동시킨 덕으로 대통령이 됐다. 7∼9월 대중파업 때 노동자들에게 자제를 촉구하며 노동자 투쟁을 진정으로 지지할 생각이 없었던 김대중은 이제 노동자들을 정리해고하고 짖밟고 있다.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기 이전에 그를 지지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그와 맞서고 있다. 김대중을 대통령에 당선시킨 힘을 가진 노동자 계급은 그를 심판할 힘도 가지고 있다.

7∼9월 대중파업의 배경

전두환은 80년 광주항쟁을 진압하면서 노동자 운동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80년 7∼12월까지 '노동계 정화'를 실시하면서 신규노조 결성을 금지하고 1백5개 지역 산별노조 지부를 해체했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은 물리적으로 패배했지만 정치적으로는 승리했다. 광주항쟁의 충격으로 정치적 급진화가 일어나고 노동자 계급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많은 투사들이 생겨났다.

전두환 정권은 연이은 부정부패와 억압적 조치들로 대중적 분노가 폭발할 것을 두려워해 83년말 유화조치를 실시하나, 그것이 되레 노동자 투쟁을 고무하는 촉매 구실을 했다. 84년 5∼6월 대구와 서울의 택시 파업을 계기로 2백여 개의 신규노조가 생겼다. 85년 4월 대우자동자 노동자들은 10일간의 파업을 통해 18.7%의 임금인상을 쟁취했다. 6월에는 구로 동맹파업이 6일간 벌어졌다. 이 투쟁으로 40여 명이 구속되고 2천여 명이 해고당했지만 노동자 운동은 정치적으로 더욱 급진화되어 서노련 등의 조직이 건설됐다.

60∼70년대에 이어 80년대 남한 자본주의의 성장은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기초한 것이었다. 노동자 한 명이 생산한 가치 가운데 노동자에게 돌아온 묷은 80년 51%, 84년 49.5%, 85년 48.3%, 86년 46.7%로 해마다 줄었다. 70∼80년대 제조업 부문의 착취율은 대체로 400%를 상회했는데 이는 미국, 인도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까운 수준이었다. 86년 노동시간은 월 222시간, 주당 51시간으로 세계 최장이었다. 83년 한 해 동안 31만 7천 명이 산업재해를 당했다. 1분에 2명 꼴로 다치거나 죽은 것이다. 이러한 조건 때문에 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는 폭발을 예고하고 있었다.

한편 경제 성장으로 거대하게 집중된 노동자 계급이 창출됐다. 전체 경제활동인구 가운데 노동자의 비율은 86년 50.6%였다. 제조업 노동자 가운데 5백인 이상 사업장 노동자는 85년에 36.3%에 이르렀고, 중화학 공업 노동자의 비율은 70년 38.7%에서 80년에는 47.8%로 늘어났다.

86년과 87년 남한은 큰 경제적 호황을 맞는다. 경제 성장률이 12%를 넘어서고 47억 달러의 국제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경제 성장으로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 87년 1월 제일피복 노동자들의 파업을 출발로 노동자 투쟁들이 이어졌다. 그 결과 7∼9월 대중파업 전까지 86년 보다 조금 높은 7.7%의 임금인상을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여기에 만족할 수 없었다. 적어도 최저생계비에 맞추려면 30∼40%의 임금인상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7∼9월 대중파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도 6월항쟁이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말했듯이 "정치투쟁의 모든 활발한 공격과 승리는 경제투쟁에 강력한 자극을 준다." 6월항쟁에 참여해 승리를 경험한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요구를 제기하고 싸워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거대한 파업 물결

7월 5일 현대엔진 노동조합의 건설에서 시작된 대중파업은 거의 세 달 동안 전국을 파업 물결로 뒤덮었다. 7∼9월 동안 3천3백11건의 파업이 발생했다. 하루 평균 30건 이상이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86년 한 해 동안의 노동쟁의 건수(276건)보다 13배나 많은 것이었고, 7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쟁의를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수였다. 그야말로 '십년을 하루에 뛰어넘은' 거대한 대중파업이었다.

이 기간 동안 기존 노조의 38%에 해당하는 1천 60개의 새로운 노동조합이 생겼다. 7월 한 달만 해도 2백 70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고 120여 개의 신규노조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8월 들어 파업은 울산과 남동해안 공업 지대에서 구미·대구·포항을 거쳐 강원도 광산지역과 호남지역, 그리고 중부의 경공업지역을 휩쓸며 수도권으로 이어졌다. 파업은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으로, 중화학공업에서 경공업으로, 광공업에서 운수·부두·사무직·전문직·판매서비스직 등 전산업으로 파급되었다. 8월에는 2천5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져 투쟁의 절정을 이루었다. 8월 중순에는 하루 평균 1백50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고, 4백여 개의 신규노조가 설립됐다.

노동자들은 엄청난 자생성과 전투성을 보여 주었다. 대중파업 기간 동안 벌어졌던 쟁의 가운데 97%가 불법 파업이었다. 이 기간 동안 단체행동을 제약하는 여러가지 법 조항은 젼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쟁의발생신고나 냉각기간을 무시하고 일단 파업이나 직장 점거농성에 들어가 힘을 과시한 다음에야 협상에 임했다. 이 기간에 나온 요구사항은 모두 1만 4천9백57개였다. 이전에 계속 쌓여 왔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온 것이다.

현장 노동자들의 민주주의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자주적 단결에 기초한 새로운 노동조합을 건설하거나 기존의 어용노조를 민주화시켰다. 파업을 한 사업장 가운데 70% 이상이 노동조합 건설과 노조 민주화를 위한 싸움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해고·강제사표·부당한 부서이동·차별대우 등에 대한 불만과 저임금·장시간 노동·작업강도 강화·열악한 작업환경 등"을 개선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단결과 민주노조의 건설이 사활적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노총은 이미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히 드러났다. 투쟁을 통해 건설된 노동조합들은 현장 조합원 대중 조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작업장에 기초하고 선출된 대표들은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노동조합의 비민주적 제도와 집행부는 거의 임시총회를 통해 파업농성중에 일거에 교체되었다." 노동자 대중은 투쟁을 지도부에게만 맡겨두지 않았다. 자신들의 힘을 통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6월항쟁의 성과를 공고히 한 투쟁

"6월항쟁은 4·19, 부마항쟁, 5·18과는 달리 결정적인 반전을 겪지 않았다."6월 항쟁이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뒤이은 7∼9월 대중파업이 있었기 때문이다. 7∼9월 대중파업은 6월항쟁으로 한발 물러선 군부독재가 감히 반전을 생각할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거대한 노동자 투쟁 물결에 놀란 전두환 정권은 초기에 아무런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전두환 정권은 노동자 투쟁을 섣불리 건드렸다가 완전한 위기에 직면할 것을 두렸워했다. 그래서 7월 10일 노동부장관 이헌기는 "합법적이고 건전한 노동운동은 계속 육성, 활성화시켜 나가야 하며 경영자들도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8월 17일 4만 명, 18일에는 7만 명의 현대 노동자들이 위력적인 가두시위를 벌이자 정부는 노동부 차관을 울산에 급히 내려보내 노동자들의 요구를 일부라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투쟁이 절정에 올라 정치적 성격을 띨 조짐을 보이던 8월 20일 '중앙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탄압을 준비했다. 8월 21일 치안본부는 '좌경척결 3대방안'을 발표하고 "위장취업자와 외부세력 개입을 색출"하겠다고 발표했다. 8월 28일 이석규 열사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망월동에 묻으려는 노동자들을 '장례에 관한 관습을 무시하는 인륜 도덕의 파괴자'로 매도했고, 27일 총리 김정렬은 "대우조선 노사분규에 외부세력이 개입,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처사이며 전통적 장례절차를 무시하여 영령을 욕되게 하는 짓"이라며 공격했다. 결국 경찰은 28일 장례행렬을 가로막고 시신을 탈취했다. 그리고 전국에서 벌어진 추모집회를 공격해 933명을 연행했다.

아직 경험이 적고 정치적으로 미숙했던 노동자 운동은 정권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8월 28일을 기점으로 노동자 투쟁은 하강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8월 28일까지 하루 1백 건 이상을 기록했던 쟁의는 29일 이후 50건 내외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6월항쟁과 7∼9월 대중파업을 통해 급속히 성장한 노동계급을 진출을 거스를 수 없었다. 87년 11월 노동법이 개정되어 7∼9월 대중파업의 성과인 민주노조가 공식 인정되었다. 남한 노동자 운동은 거대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7∼9월 대중파업의 성격

7∼9월 대중파업과 6월항쟁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7∼9월 대중파업과 6월항쟁의 연속성은 6월항쟁 자체가 후반으로 갈수록 노동자들의 참여가 늘어나 부분적으로 노동자 투쟁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7∼9월 대중파업의 씨앗이 거기에 담겨져 있었다는 점에 있다. 노동자들은 거리에서 얻은 자신감을 직장으로 가지고 갔다.

다른 한편, 7∼9월 대중파업은 6월항쟁과는 달리 노동자들의 독자적인 요구를 내걸고 싸운 투쟁이었다. 이 때문에 6월항쟁에서 군부독재에 반대했지만 궁극으로 사장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었던 김영삼과 김대중의 야당은 "한꺼번에 모든 것을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며 노동자들에게 투쟁을 자제할 것을 호소했다. 그들은 선거에만 매달려 투쟁이 더욱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다.

7∼9월 동안 투쟁은 대부분 기업 단위로 이루어진 경제투쟁이었지만 한 공장의 투쟁은 금세 공장의 담벼락을 넘어 지역적 연대로 발전했다. 또 투쟁은 한 지역을 넘어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현대그룹노조협의회같은 노조 연합 조직이 등장했고 이후 지역 노동조합들과 전국조직이 탄생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투쟁은 사업장 안에서만 진행되지 않았다. 거리에서 경찰과 충돌하기도 하고 시청과 관공서를 공격하는 형태로도 나타났다. 대한조선공사 노동자들은 처음부터 가두로 진출해 싸웠다. 옥포의 대우조선 노동자들도 거제도의 일부를 장악하고 경찰과 싸웠다. 부천의 경원세기 노동자들은 회사 앞의 고속도로를 점거하고 격렬하게 싸워 요구 조건을 완전히 쟁취했다.

이처럼 권위주의 국가에서는 노동자들의 경제적 투쟁이 국가의 개입과 탄압 때문에 쉽게 정치적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 흔히 국가와 대결해야 함을 깨닫게 된다.

오늘의 교훈

6월항쟁에 뒤이은 7∼9월 대중파업은 정치투쟁과 경제투쟁 사이에 만리장성이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정치투쟁은 경제투쟁에 강한 자극을 주고 경제투쟁을 위한 기름진 퇴적물을 남겼다. 물론 이 역도 성립한다.

오늘 우리는 롯데와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경제투쟁과 미 제국주의와 WTO에 반대하는 정치투쟁 모두를 경험하고 있다. 이 둘은 서로 분리된 투쟁이 아니다. 롯데와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투쟁은 매향리 사격장 부분 폐쇄와 민주화운동 보상 특별법 등의 정치적 성과를 낳기도 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은 서로 영향을 미쳐 상호 상승작용을 할 수 있다. 그리고 7∼9월 대중파업은 투쟁의 선두에 선 부분은 뒤져 있는 부분에게 자극을 주고 뒤져 있던 부위가 다시 전면에 나서 거대한 투쟁으로 어우러지는 '선진과 후진의 변증법'이 펼쳐지는 그림이었다. 최근 우리는 롯데와 사회보험 노동자들의 완강한 투쟁이 금융 노동자들의 파업에 힘을 주었고 금융 노동자들의 승리가 구조조정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싸우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다른 노동자들에게 확인시켜 주는 것을 보았다.

무엇보다 7∼9월 대중파업은 노동자들이 이 사회를 변화시켜 진보하게 만드는 중심 세력이라는 점을 보여 주었다. 전국에서 벌어진 파업 물결은 노동자들이 이 사회를 움직이고 멈출 수 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 주었다. 1987년 7∼9월 대중파업 이후 노동자 계급의 힘과 노동자 계급이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중심 세력임을 확신하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생겨났다. 1987년 7∼9월 대중파업이 있었기에 우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1987년 7∼9월 대중파업이 있은지 13년이 지난 오늘 이 투쟁을 되돌아 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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