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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도 폐기될 처지에 놓인 노무현

용도 폐기될 처지에 놓인 노무현

김어진

노무현과 이회창의 지지율 격차가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노무현의 추락에는 날개가 없어 보인다. 노무현의 처지는 갈수록 꾀죄죄해지고 있다. 반면 선거 압승에 이어 서해교전으로 이회창은 갈수록 기세등등하다. 노무현은 서해교전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끼다가 7월 초 대 국민선언 때에서야 입을 뗐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을 경계”한다는 그의 말은 우익의 광기를 잠재우지도, 한반도의 진정한 평화를 바라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도 못했다. 선거 참패 뒤 여권은 더 분열했다. 노무현을 용도폐기하자는 주장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여권 내에서 벌써부터 노무현을 대체할 인물 논의가 한창이다. 8·8 보궐선거가 여권의 끔직한 참패로 끝난다면 ‘노무현 무망론’은 더 널리 퍼질 것이다.

초조해진 노무현은 ‘김대중과 거리두기’로 위기에서 벗어나려 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탈김대중’ 계획은 벌써부터 물거품이 되고 있다. 이미 〈한겨레〉는 ‘거리두기’ 전술이 지지율을 높이는 효과를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되레 노무현이 “탈DJ” 하기보다는 김대중이 “탈노무현” 하는 게 아니냐는 지적이 있을 정도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7·11 개각이다. 노무현은 이미 한 달 전에 이회창이 말한 거국중립내각을 김대중한테 제안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7·11 개각에서 청와대의 청탁을 거절한 법무부 장관을 내쫓고 그 자리에 뻔뻔스럽게도 김대중의 충복이자 패스 21 추문으로 물러났던 김정길 전 청와대 정무수석을 앉혔다. 보궐선거 후보자 선정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DJ 가신” 남궁진을 광명 후보로 선정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남궁진이 내정됐다. 노무현의 아태재단 정리 요구도 묵살됐다. 아태재단이 이권 청탁과 뇌물의 창구라는 게 이미 상식으로 통하는 마당에 철면피 김대중은 “아태 재단의 비리는 없다”고 또 거짓말했다. 사실 노무현의 “청산 프로그램”에 획기적인 내용이 있는 것은 아니다. 노무현의 주장대로 김홍일이 탈당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노무현이 ‘정책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것들은 있으나마나 한 것들이다. 부패청산 특별입법 추진, 권력기관장에 대한 인사 청문회, 친인척 비리 조사 기구 설치 등은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마다 비리 국회의원들이 내놓은 판에 박힌 부패 ‘방조’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래서 노무현의 “DJ 차별화 설명” 간담회에 초대받은 시민사회 단체 지도자들은 노무현의 설명이 끝나자 “감이 잘 안 온다”며 혹평했다(〈내일신문〉 6월 27일치).

모순과 오락가락

그러나 노무현의 ‘탈DJ’는 그의 모순적 처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김대중과 거리를 두려 하다보니 당장 여권 내에서 “반노무현” 움직임이 생겨났다. 이미 노무현의 ‘탈DJ’는 여권 내부의 분열을 더 깊게 만들었다. 여권 내에서 그의 지위는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노무현 캠프조차 “약발은 기대하기 어렵다. 당내 입지만 약화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무현은 종종 여권 내부의 반발을 무마하려는 제스쳐를 취하기도 했다. 6월 말 노무현이 내놓은 “청산 계획”에 동교동계가 발끈하자 갑자기 수위를 낮추겠다며 저자세를 보인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이번에는 ‘탈DJ’가 무색해진 것 아니냐는 반발에 부딪히게 된다. 이것은 노무현의 지지율을 더 떨어뜨리는 효과를 낼 것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민주당에서 김대중의 그림자를 지우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한다.

이런 모순을 잘 잘 보여준 예가 바로 7·11 개각에 대한 노무현의 반응이었다. 노무현은 “개각을 하기라도 한 거냐”며 불만을 토했다가 여권 내부의 볼멘소리를 접하고는 “여성 총리라는 점을 높게 평가하지 못해 죄송하다. 잘 모르고 한 소리”라며 말을 바꾸었다. 그러다 돌연 총리에 대한 각종 의혹이 번지자 “대외 활동을 자제”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마디로 노무현은 전면적으로 탈DJ를 할 수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는 양쪽의 압력에서 오락가락을 반복하고 있다. 왜 노무현은 좌충우돌을 반복하는 걸까? 그는 두 달 전만 해도 변화와 개혁의 대표 주자인 것처럼 보였다. 근본 배경은 양극화된 지금의 계급 세력 관계이다. 우익은 더욱 보수화되고 사회 변화를 바라는 대중은 더욱 급진화된 결과, 중도주의가 찌그러드는 게 국제적인 추세다.

노무현은 이런 양극화 분위기에 결박된 포로다. 그는 양극화 분위기에서 좌충우돌하다가 결국 기성 정치권에서 자신의 입지를 넓히려 하다 보니 갈수록 우경화하고 있다. 노무현한테서 기성 정치인과는 다른 면모를 발견하려 했던 사람들은 점점 실망하고 있다. 노무현은 “왜 ‘DJ 양자’를 자처하냐”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되레 “[대통령에게] 너무 야박하게 하지 말자”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 바람에 “이번 6·13 선거에서 민주당의 참패는 노후보에 대한 실망도 포함됐다.”(〈내일신문〉 6월 26일치) 노무현은 대선이 다가올수록 부패한 정치인과 부자한테 추파를 던져 자신의 입지를 세우려 한다. 6월 28일 부패한 언론 재벌 홍석현의 세계신문협회 회장 취임을 축하하는 자리에 버젓이 참석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노무현은 얼마 전 ‘한나라당이 추진하는 총리 임명권’을 주장함으로써 한나라당 일부 세력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는 의혹을 사기도 했다. 물론, 8·8 보선 때 김대중에 대한 대중적 혐오감이 또 한번 확인되고 여권이 핵분열하게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노무현이 김대중과 결별을 선언하게 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이 때조차 노무현의 정치가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을 채워주지 못할 거라는 진실에는 변함이 없다. 노무현은 말끝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했다. 노무현에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은 노무현의 “상식”에서 평등과 정의, 복지, 희망 같은 단어를 찾고 싶어 한다.

그러나 노무현의 “상식”은 주로 이윤을 우선하는 부자들의 “상식”이다. 〈이코노미스트〉가 대선 후보를 대상으로 한 ‘기업관 및 경제철학 설문조사’에서 노무현은 “기업의 목적은 이윤 극대화이지 부의 사회 환원이나 종업원 복지 향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윤을 사회로 환원해 복지와 실업자 구제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노무현은 지난 5월 20일 유럽연합 14개국 대사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공기업 민영화를 지지한다”고 분명하게 밝혔다. 조용히 식사를 하던 유럽연합 14개국 대사들은 이 발언이 나오자 일제히 수첩과 볼펜을 들고 필기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알짜 공기업에 관심이 많은 다국적 기업들한테 이 말은 솔깃하게 들렸을 것이다(〈시민의 신문〉).

그가 획기적이라 평가하는 소득분배 경제 정책은 어떤가. 김대중의 속빈 강정, 생산적 복지과 다를 바 없다. 타이거풀스의 고문 변호사였던 그는 다른 기성 정치인들처럼 부패 추문에 얽힌 기업한테서 정치 후원금을 자연스럽게 받아 챙겼다. 그가 기성 정치인들과는 다를 거라는 기대는 그가 집권할 기회를 갖기도 전에 무너지고 있다.

노무현이 승부수를 걸고 있는 8·8 보궐선거에서 여당은 또 한번 참패할 것이다. 얼마나 끔직하게 참패하냐가 관전 포인트가 될 것이다. 그리 되면 노무현은 여당 후보 자리에서 용도폐기될 운명에 놓이게 될지 모른다. 그리 된다 해서 안타깝게 여길 필요가 있을까? 오히려 노무현의 추락과 그 과정에서 보여 주는 모순적 행보는 진정한 사회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한테 새로운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실히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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