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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꼬불꼬불한 길

난관이 도사리고 있는 꼬불꼬불한 길

이정구

지난 7월 1일 북한이 몇 가지 시장 개혁 조치들을 실시하자 북한 체제의 변화 가능성과 그 성공 여부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번에 북한이 도입한 시장 개혁 조치는 가격과 임금의 대폭 인상, 식량 배급제를 시장 구입제로 전환, 기업의 독립채산제 강화와 인센티브 제도 도입, 환율 현실화 등이다. 이번 조치는 일부 경제 특구가 아니라 북한 전역에 시장 요소를 도입한다는 점이 전과 다르다.

그러나 북한은 이번 조치를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틀 안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경제 관리 방식”(일본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7월 19일치)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이번 시장 개혁은 심각한 경제난과 공식 경제 부문의 생산성 저하로 인한 파산 그리고 사경제 부문의 증가에 뒤따른 대증 요법이라 할 수 있다.

북한 경제는 1999년을 제외하고는 1990년대 내내 마이너스 성장을 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를 겪었다. 공장 가동률은 30퍼센트에도 이르지 못했다. 이런 상황 때문에 기초 생필품 부족 현상이 날로 심각해졌다. 1990년대 중반부터 식량난이 더해지면서 공식 경제 부문은 거의 파산했다. 세계식량계획(WFP)은 “북한은 매년 150만 톤 이상의 식량이 필요하다.” 하고 발표했다.

공식 경제 부문의 파산은 사경제 부문(농민 시장 등)의 확장을 가져왔다. 탈북자들은 북한 민중이 생활에 필요한 물자의 60∼70퍼센트를 사경제 부문에서 조달하고 있다고 증언한다. 물론 이 수치는 주로 산촌과 지방 소도시, 일부 농촌에 해당하므로 상당히 과장된 수치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전보다 사경제 부문이 늘어난 것은 사실인 듯하다.

북한 체제의 이번 변화는 사경제가 존재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공식 경제 부문을 활성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로 보인다.

시장 개혁과 개방의 길로

지난 2001년 1월 김정일은 상하이를 방문해 중국식 시장 개혁과 개방에 관심을 보였다. 북한의 이번 시장 개혁 조치를 두고 일부 사람들은 중국식 시장 개방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이 중국처럼 전면적인 개혁과 개방의 길로 나아갈 것이라고 예측하는 것은 속단이다. 설사 김정일이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의지가 있다 할지라도 실제로 그 길로 들어설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문제다. 왜냐하면 대외적으로는 북미 관계와 주변 열강과의 관계, 대내적으로는 북한 관료 내부의 갈등과 여기에 자극받을 수 있는 계급 갈등이 개혁·개방의 속도와 폭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이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바람은 북한을 단기간에 제2의 중국처럼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개혁과 개방을 시작한 1978년 이후 파란만장한 운명을 겪었다.

중국 개혁의 선두 주자로 칭송받은 덩샤오핑은 보수파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기층 민중의 도전도 심각하게 받아 왔다. 1989년에는 천안문광장에서 노동자와 학생 수천 명을 죽였다. 천안문 항쟁 후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 지배자들은 6월이면 천안문 광장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다. 혹시나 또 다른 반란의 불씨가 될까 봐 종교 단체인 파룬궁조차 탄압하고 있다. 시장 개혁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중국의 지배자들조차 상해방과 북경방이라는 분파 갈등을 겪고 있다. 국영 기업을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관료 분파들 사이의 갈등과 함께 노동자·농민의 저항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과거의 경험

북한이 폐쇄적인 체제에서 처음으로 개혁·개방 정책으로 돌아서려 했던 것은 1984년 무렵이었다. 북한 경제는 1970년대 말부터 성장의 속도가 느려지다가 1980년대 중엽부터 정체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이러한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1984년에 합영법과 독립채산제를 도입했다.

그러나 합영법은 북한 당국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북한에 들어온 외국 자본은 조총련계 기업 중심의 경공업 투자가 대부분이었고(1993년 말 기준으로 92.4퍼센트), 소련과 중국의 자본은 4.8퍼센트, 서방 국가들은 2.8퍼센트에 그쳤다.

1989년 동유럽 정권들이 몰락하고 1991년에는 구 소련까지 무너지자 북한 경제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제3차 7개년 계획 기간(1987∼1993년)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 2.6퍼센트였다.

1989년 동유럽 정권들이 잇따라 무너지자 북한은 체제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더욱이 구 소련과 관계가 나빠졌고 1990년 한·소 수교가 체결되자, 지지부진하던 개혁·개방 정책은 후퇴하게 됐다. 동유럽 붕괴와 그 뒤 구 소련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에 대해 김일성은 “제국주의 세력과 내부 수정주의자들의 복고 가능성”을 비판하면서 더욱 강도 높게 “주체형 사회주의 건설”을 외쳤다. 그러나 북한에게 1990년대는 한편으로는 체제 유지와, 다른 한편으로는 경제 침체 탈출을 위한 개혁과 개방이 동시에 필요한 시기였다. 1991년 1월 조·일 수교협상, 9월 유엔 동시 가입, 12월 남북 기본합의서 채택은 북한이 다시금 개혁과 개방의 길로 들어섰음을 알렸다. 북한은 유엔 동시 가입을 계기로 대미 관계 개선과 안전 보장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1989년의 천안문 항쟁이나 동유럽 몰락처럼 개혁 정책이 가져올 위험 때문에 북한은 개방을 제한된 지역으로 한정했다. 1991년 말 나진·선봉의 경제 특구는 중국의 선천을 모방한 것이지만 이러한 조심성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특구를 건설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려는 신중한 의도조차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진·선봉 지대의 외국인 투자 계약 규모는 총 1백11건, 7억 5천77만 달러였지만 1997년 말 현재 투자가 실제로 집행된 것은 77건, 5천7백92만 달러뿐이었다.

경제 특구 건설이 실패한 주된 이유는 경제적 측면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측면에 있었다. 1993년 미국의 핵사찰 압력이 두드러지게 강화됐고, 1994년에는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외국 자본들이 경제 특구에 투자할 리 만무했다. 둘째 이유는 1994년 김일성의 죽음과 체제 붕괴 우려였다. 김일성이 죽은 뒤 2∼3년은 북한 체제의 위기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 시기였다.

김일성 사후 북한 체제를 떠맡은 김정일은 미국의 대북 압박을 어느 정도 완화하고 경제 위기를 일시적으로 어느 정도 진정시킨 뒤에야 개혁·개방 정책을 다시 추진할 수 있었다. 김정일이 체제 추스르기를 끝내고 국방위원장으로 취임한 시기가 전환점이었다. 1998년 9월에 헌법을 개정하면서, 경제 분야에서는 대외 무역과 경제 개방의 확대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이를 두고 세계은행은 “변화 직전의 북한”이라는 연구 보고서를 통해 북한이 시장 중심의 경제 정책, 외부 지향의 경제 정책으로 전환하려는 조짐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변화는 여전히 부분적이고 제한적이었다. 북한 대외경제위원회 부위원장 김문성은 홍콩에서 개최된 세계경제포럼에서 “향후 북한은 중국과 같은 대대적인 시장 개혁 개방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개방 정책만을 지속할 것”이라고 밝혔다(〈중앙일보〉, 1997년 10월 15일치).

전망

북한이 지금까지 추진해 온 부분적인 개혁과 개방은 효과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전면적인 개방으로 나아가려 할 때에는 지금까지 접해 보지 못한 또 다른 난관에 직면할 공산이 크다. 개혁과 개방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그에 따른 위험을 줄이기 위해 체제를 옹호하는 사상 무장을 강화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논평가들은 북한의 개방을 두고 “개혁 지향적 개방보다는 체제 수호적인 개방”이라고 하거나 “모기장식 개방”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헌법 개정 7개월 만인 1999년 4월 최고인민회의 10기 2차 회의는 “경제의 계획적 관리에서 그 어떤 분권화나 자유화도 허용하지 않으며, 국가의 중앙집권적 지도 원칙을 변함 없이 고수한다.” 하고 밝혔다.

게다가 〈워싱턴 포스트〉(1999년 1월 23일치)가 지적하듯이 “경제를 되살리기 위해서 북한은 정체돼 있는 거대한 국가 산업 부문에 손을 대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미국의 압력 때문에 북한 관료들이 의도한 바대로 시장 개혁과 개방을 추진하지 못할 수도 있다. 조지 W 부시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북한에 군사적 압박을 강화하고 있다. 이는 북한 관료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자원을 군사적 부문에 더 투입하는 소위 ‘강성 대국’으로 나아가게끔 압박할 것이다. 더한층의 문제는 북한 지배자들이 설사 부시가 강요하는 세계 제국주의 질서를 받아들인다 할지라도, 그래서 시장 개혁과 개방 정책이 서방의 지지를 받아 가속도가 붙는다 할지라도, 이로 인해 북한이 과연 경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제2차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서유럽을 지원한 마셜 플랜 같은 대규모 투자가 북한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공상이다. 오히려 동유럽에서 진행된 시장 개혁 과정이 북한의 시장 개혁과 개방의 앞날을 보여 준다.

동유럽에서 시장 개혁과 개방은 대다수 국민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해 주지 못했을 뿐 아니라, 높은 실업률, 만성적인 경제 위기, 파탄난 사회 복지가 주된 결과였다. 서방의 다국적 기업들은 동유럽 경제 전체를 발전시키기보다는 수지 맞는 극소수 기업이나 사업에만 군침을 흘렸다.

김정일 앞에 놓여 있는 개혁·개방은 부분적·제한적인 것이든 만의 하나 전면적인 것이든 모두 위험스럽고 난관이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그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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