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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중심성인가 광범한 계급 연합인가

노동자 중심성인가 광범한 계급 연합인가

김인식

지금 운동은 강력한 단결과 연대를 요구한다. 발전소 매각을 반대하는 운동,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 전쟁을 반대하는 운동, 주한 미군의 여중생 살해 사건 항의 운동 등은 다양한 세력들을 그 운동에 끌어들였다. 이런 정서는 선거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지난 7월 16일에 ‘범진보진영 주요 단체 지도부’는 간담회를 열어 ‘2002년 대선 승리와 범진보진영 단일 후보 선출을 위한 범국민추진기구’(‘범추’)를 구성하기로 결정했다. 간담회에는 민주노총, 전국연합,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 전국빈민연합(전빈련), 한총련 등 대표적인 대중 단체들과 민주노동당이 참여하고 있다. ‘범추’ 구성 합의는 두 가지 의의가 있다. 첫째, 진보 진영의 주요 단체들이 대선에서 보수 ‘개혁’ 후보가 아닌 진보 진영의 독자 후보 지지를 결정했다는 점이다. 일부 단체들의 태도가 다소 미심쩍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범추’ 자체는 진보 진영의 정치적 독립성 추구를 뜻한다. 간담회 참석자들은 “예비 경선을 통해 선출된 단일 후보는 진보 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한다.”는 합의문을 채택했다. 둘째, ‘범추’는 대선에서 지배 계급의 보수 정당들에 대항하기 위한 진보 진영의 단결과 연대를 위한 기구다. 우파 정당들에 반대하는 모든 진보 세력들이 대선에서 광범하게 단결할 필요가 있다. ‘범추’는 단결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 따라서 ‘범추’ 자체를 반대하게 되면 단결과 연대를 거부하는 것처럼 비쳐질 수 있다. 이런 패턴은 다른 나라들에서도 볼 수 있다. 짐바브웨의 민주변화운동(MDC)은 무가베 정권을 반대하는 입장을 같이하는 자유주의자들, 노동조합 활동가들, 시민운동가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영국의 사회주의자동맹(SA)에는 혁명가들과 개량주의자들이 함께 포함돼 있다. 사회주의자동맹은 노동당이 아닌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을 통해 노동당 정치의 타락에 대응해 왔다. 사회주의자동맹은 일련의 선거에서 의미 있는 성공을 거뒀다. 1999년 스코틀랜드 의회 선거, 2000년 런던 시장 선거, 2001년 6월 총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그렇게 봤을 때 사회당 상임집행위가 ‘범추’ 불참을 결정한 것은 잘못이다. 사회당은 ‘범추’가 “이념과 노선을 무시한 채 … ‘무조건 모이고 보자’는 식”이라고 비판했다. 사회당은 ‘범추’가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 단결된 대오로 대통령 선거 투쟁을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사회당의 비판대로 ‘범추’ 참가 단체들의 “이념과 노선”은 다양하다. ‘범추’는 정치적으로 동질적이지 않다. 그러나 보수 정당이 아닌 진보적 대안을 갈구하는 다양한 세력들을 끌어당길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반면, 사회당이 주장하는 “사회주의 세력의 통일 단결”은, 기성 정당들을 거부하지만 아직 ‘사회주의’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냉소적 무관심으로 뒷걸음질치게 할 수 있다. 사회당의 대선 전술은 자신의 세력 확대만을 고려한 정책인 듯하다. 게다가 한국 노동자 계급의 의식이 아직 노동조합 의식에서 사회주의적 의식으로 도약하지 않은 현실을 건너뛰고 있다.

정치적 견해 차이를 넘어 단결과 연대가 모색되고 있는 것은 기존 개혁 정당이 진정한 개혁을 제공하지 못함에 따라 생겨난 정치적 빈 자리를 시급히 메워야 한다는 요청에 대한 응답이다. 김대중 정부는 그 동안 민주·사회 개혁이 아니라 시장·경제 개혁을 선사했다. ‘범추’는 이에 따른 김대중 정부의 위기에 대한 진보 진영의 대응 가운데 좀더 특정한 측면, 즉 선거를 통해 대안을 제시하려는 시도다.

범추와 재창당

‘범추’ 참가 단체들의 “이념과 노선”이 다양하기 때문에 논쟁은 불가피하다.(부르주아 ‘개혁’ 후보를 지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하며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단체에는 분명한 태도 표명을 요구할 필요가 있다.) 더구나 상이한 사회 세력을 대표하는 단체들이 ‘범추’에 포함돼 있다. 예컨대, 노동자 계급 단체인 민주노총과 농민 계층들의 단체인 전농이 ‘범추’에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회 세력이 ‘범추’를 주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논쟁의 진정한 핵심이다. 때때로 민중 운동 내 이데올로기 차이의 이면에는 각 단체들이 대표하는 사회 세력의 이해 관계 차이가 자리잡고 있을 수 있다. 설령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전국연합 지도부와 동일한 사상(포퓰리즘=민중주의)을 공유한다 할지라도, 전자는 노동자 계급의 이해 관계를 무시할 수 없는 처지인 반면 후자는 그것과 무관하게 주장하고 행동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범추’ 결성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니다. 다양한 피억압 사회집단(농민을 포함해)을 포괄하더라도 그 속에서 노동 계급의 주도력이 관철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최초의 논쟁은 이런 사회 세력간 이해 관계 차이를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파악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논쟁이 진행됐다. 왜냐하면 대선 후보 선출 방식을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전국연합과 전농 등은 민주노동당이 대선 후보를 선출하지 말고 곧장 범진보 진영이 참여하는 개방형 예비 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소위 ‘1단계 경선론’). 전국연합은 “민주노동당이 사전에 당 후보를 결정하고 범진보 진영 예비 경선에 참여한다고 한다면 전국연합은 예비 경선에 후보를 출마시키기 어렵게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전국연합의 성원이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고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크게 나[뉘]어”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진보정치〉 98호.) 그러나 이것은 부차적인 이유인 듯하다. 애초 전국연합은 ‘범추’를 고리로 민주노동당을 재창당하고 싶어했다. 계획의 성공 여부를 떠나, 이번 기회에 민주노동당을 브라질 PT당보다는 남아프리카공화국 공산당과 더 닮은 당으로 만들려는 계획이었던 듯싶다.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애당초 우리가 대통령 후보 선출에 관심을 갖고 행동을 같이하게 된 것은 이번이야말로 민주노동당을 재창당해서 제대로 된 진보 정당을 만드는 절호의 찬스라고 생각했기 때문”(〈진보정치〉 당원판 2002년 7월 29일~8월 4일)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이 당 후보를 확정짓고 ‘범추’ 경선에 참여한다면(소위 ‘2단계 경선론’) 민주노동당 재창당 계획은 당분간 물 건너가게 된다. 전국연합이 ‘1단계 경선론’을 고집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전국연합(그리고 당내 지지자들)은 당의 노동자 성격을 희석시키고 싶어한다. 그러러면 당에 대한 민주노총의 영향력을 약화시켜야 한다. 이것이 민주노동당 재창당론의 요체다. 그들은 노동당으로는 농민을 끌어들일 수 없다고 본다. 실제로 정현찬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은 “농민들은 민주노동당 강령에 동의할 수 없다. 전농은 재창당이 아니라면 참여할 수 없다.” 하고 말했다. 그래서 당 안팎의 민중주의자들은 “노동당”이라는 당명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 그 때문에 민중주의자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노동당” 명칭에 함축돼 있는 계급 정치 개념을 비판한다. 그들은 계급이 아니라 민족 또는 국민의 이름으로 말한다. 계급은 민족 또는 국민에 비해 “협소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세계적 성격 때문에 민족 또는 국민에 비해 훨씬 보편적이다. 국경과 인종과 성·성 지향의 차이를 넘어 단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관계

그러나 전국연합과 전농의 민주노동당 재창당 시나리오는 민주노총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민주노총은 ‘1단계 경선’을 사실상 거부했다. 7월 26일 민주노총 중앙위는 ‘8월 말까지 사회당이 범추에 참여하지 않을 경우 범추의 명칭과 내용을 재조정한다’고 결정했다. 이것은 ‘범추’를 매개로 민주노동당의 재창당을 꾀하는 전국연합과 전농의 시도를 견제한 결정이었다. 그 때문에 정대연 전국연합 정책위원장은 “민주노총의 결정은 너무 성급했다.” 하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민주노동당은 1987년 이래 꾸준히 확산돼 온 노동자 정치 세력화 염원을 표현한 것이다. 이것은 의회를 통해 민주·사회 개혁을 법제화하고자하는 자연스런 염원이다. 동시에, 노조 상근간부층의 공식 정치 참여 염원을 나타낸다. 민주노총 간부들이 민주노동당에 대한 전국연합과 전농의 주도권 장악 시도를 거부했던 것은 이 때문이다. 민주노총 중앙위원회 직후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도 ‘1단계 경선’을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다. 논쟁 끝에 당 중앙위는 민주노동당 후보를 선출해 ‘범추’ 예비 경선에 출마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당 중앙위의 결정은 당의 주된 사회적 기반이 노동조합(특히 민주노총) 간부들임을 보여 준다. 사실, 민주노동당이 포퓰리즘 경향의 다른 조직과 다른 점은 당의 주된 계급 기반이다. 지난 6·13 지방 선거 결과는 이 점을 잘 보여 준다. 민주노총과 한길리서치의 여론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민주노총 조합원 가운데 72.2퍼센트가 민주노동당에 투표했다.(〈노동과 세계〉 제204호.) 그러나 12월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조합원은 36.1퍼센트였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노동조합 뿌리 내리기가 아직 불충분하다는 점을 보여 준다. 따라서 당은 오히려 노동조합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더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성장 전략은 당 안팎에서 끊임없이 도전받고 있다. 당내 민중주의자들은 의식적으로 중간 계급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를 위해 당명에서 한사코 “노동”을 없애고 싶어한다. “노동” 대신에 “통일”과 “진보”가 포함되기를 바란다. 그럼에도 민주노동당은 한동안 그렇게 쉽게 노동자 계급에게서 이탈할 수 없을 것 같다. 민주노동당 형성 시기인 1997년부터 가까운 미래까지 노동자 운동이 고양되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민족 분단, 근래에야 비로소 군사독재에서 벗어났고 아직도 억압이 극심하다는 사실,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 대자본과 국가의 유착 등의 요인들 때문에 당의 이데올로기는 민중주의의 한 형태인 경향이 있다. 그래서 노동자 정당이냐 아니면 국민 정당이냐를 둘러싼 논쟁이 당분간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당내 좌파는 이 논쟁에서 노동자 당을 옹호해야 한다. 따라서 당내 좌파들은 노동자 계급 중심성을 옹호하는 맥락에서 ‘2단계 경선’, 즉 당 후보를 선출해 ‘범추’ 경선에 참여한다는 안을 지지하는 것이 옳았다.

누가 진보 진영의 후보가 돼야 하는가

‘범추’ 논쟁은 누가 진보 진영의 대선 후보가 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했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어떤 사회 세력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 후보가 돼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당내 일부 좌파는 권영길 당 대표가 개량주의자라고 비판했다. 이런 이유로 후보 선출 방식 논쟁에서 전국연합과 ‘동맹’을 맺었다. 소위 개량주의를 견제하기 위해 당내 좌파가 “비노동” 포퓰리스트와 한 편에 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지적했듯이, ‘범추’ 논쟁은 이데올로기 이전에 사회적 토대(기반)와 먼저 관계가 있다. 이렇게 봤을 때, 권영길 대표는 대다수 민주노총 조합원의 지지를 반영했다. 그가 승리한 1996년 연말~1997년 연초 ‘노동법 파업’의 지도자였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오종렬 전국연합 상임의장은 전교조 출신임에도 민주노총 조합원 소수파와 ‘비노동’을 상징했다. 그런데도 좌파가 개량주의를 견제한다는 명분으로 ‘비노동’ 포퓰리스트와 손을 잡는 것은 올바르지 못하다. 좌파와 우파는 노동 계급 운동에 대한 태도에 따라 구분된다. 개량주의를 반대하기 위해 “비노동”을 지지하는 것은 좌파적 태도가 아니다. ‘비노동’ 포퓰리스트들은 논쟁의 1라운드에서 뜻을 관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2라운드가 남아 있다. 2라운드의 무대는 ‘범추’ 예비 경선이 될 공산이 크다. 우리는 2라운드에서도 노동자 중심성 원칙을 견지해야 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뜻하는 바는, ‘범추’ 예비 경선이 실시된다면 민주노총 조합원 다수의 지지를 받는 사람(아마도 권영길 대표)을 지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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