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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수엘라 개헌 국민투표 부결:
올바른 정치적 평가가 필요하다

베네수엘라의 정세 변화는 국제적 파장력을 가진 문제다. 볼리바르식 혁명은 그동안 국제적으로 좌파들에게 커다란 영감을 줬기 때문에, 이번 개헌 국민투표 부결은 안타까운 일이다.

국내 우파 언론들은 개헌 부결 소식에 신이 나 날뛰었다.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베네수엘라 국민들이 민주주의의 싹을 완전히 잘라 버리려는 것까지 용납하지는 않았다며 기뻐했다.

이번 국민투표 부결이 운동의 퇴보임은 명백하다. 그런 점에서 국내 좌파 중 극소수가 민주주의 승리 운운하며 우익과 비슷한 주장을 펴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2002년 쿠데타를 일으킨 자들이 힘을 얻은 것은 민주주의에 도움이 될 리 없다. 이런 평가에 비해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시대의창)의 저자 임승수 동지의 평가는 훨씬 낫다. 그는 우익들이 개헌 내용을 왜곡했다고 올바르게 지적한다. 우익 언론들은 노동시간 단축, 사회보장 확대, 주민자치평의회 권한 강화 등 민주적사회적 권리를 확대시키는 내용들은 무시한 채 대통령 연임 제한 폐지 조항만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임승수 동지의 지적처럼, 프랑스 총리도 연임 제한이 없다. 선진국도 그런 나라가 많다. 프랑스는 총리소환제도 없지만, 베네수엘라는 국민들이 대통령을 소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우익들은] 독재라는 식으로 여론몰이를 했다.

그런데 임승수 동지는 우익들이 공포감을 조성하고 조중동 식으로 선동한 것과 혁명세력 내부의 사민주의, 개량[주의] 세력이 개헌반대 전선에 가서 붙은 것을 패배의 원인으로 꼽는다. 이것이 분명 선거 패배에 영향을 미친 요인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선거 패배를 이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2002년 쿠데타, 2004년 국민소환 투표, 2006년 대선에서도 우익과 제국주의 세력의 악선전이 판을 쳤지만 베네수엘라 민중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베스를 지지했다. 또, 차베스 진영의 일부가 배신한 것이 차베스 지지자들의 대규모 이탈로 연결되지도 않았다.

개헌 투표 부결은 많은 차베스 지지자들이 기권한 결과였는데 임승수 동지의 설명으로는 그들이 왜 그랬는지 명확히 이해되지 않는다. 이 점을 제대로 평가하고, 그로부터 이후 전망과 과제를 도출하는게 매우 중요한데 말이다.

볼리바르식 부르주아들

차베스는 개헌 국민투표를 자신에 대한 신임 투표로 만들어 개헌을 통과시키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먼저 개헌안에는 지지할 수 있는 조항과 그럴 수 없는 조항들이 뒤섞여 있었다. 사회보장 확대 조항 등과는 달리, 대통령 연임 제한 폐지나 비상사태시 언론과 인신의 자유를 제한하는 조항들은 차베스 지지자들 사이에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물론, 우익들의 주장과는 달리 이 조항들 때문에 차베스 정부가 권위주의 정부로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21세기 사회주의의 이상과 거리가 먼 것도 사실이다. 차베스는 혁명의 토대를 굳건히 하고 우익 쿠데타에 맞서기 위해 그 조항들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2002년 쿠데타가 보여 줬듯이 우익 쿠데타를 물리치는 최선의 방법은 정부 관료에게 더 많은 권한을 주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을 호소하고 확대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행동이 급진화를 촉진시켰고, 차베스 자신도 그에 영향받아 급진화했다. 이것이 혁명의 토대를 굳건히 할 수 있는 진정한 방법이다.

또, 최근 차베스 진영 관료들의 행태를 봤을 때, 사회주의의 완성을 위해 개헌안을 통과시키자는 관료들의 제안을 대중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요즘 베네수엘라 민중 사이에서 볼리 부르헤세스(boli-burgueses), 즉 볼리바르식 부르주아들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이것은 입으로는 볼리바르식 혁명을 떠들면서 실제로는 정부 직위를 이용해 큰돈을 벌어들이는 친차베스 관료들을 비꼬는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물가상승과 생필품 부족으로 고통받는 동안 관료들은 수억 원대의 험비 자동차를 몰고 다녔다. 관료들은 물가상승과 생필품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급진적 조처들 보조금 확대, 물가상승에 맞춘 임금인상, 생필품을 숨기는 대형 마트 체인들의 몰수 등 의 도입을 가로막았고,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는 독립노조인 노동조합연맹(UNT)의 활동에 훼방을 놓았다.

그런 자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사회주의 혁명의 진전을 위한 것이라면서 개헌안을 지지해 달라고 하자 사람들은 개헌안의 구체적 내용을 검토하기 전에 정치적 혼란을 느꼈다. 이런 혼란이 기권율을 더 높였다. 그래서 부결 발표 직후에 있었던 차베스 지지 시위에서 찬성표를 던진 쪽과 기권한 쪽 모두 입을 모아 부패 관료 척결을 외쳤던 것이다.
기권한 사람들 대다수는 여전히 차베스를 지지한다. 최근 차베스 지지율은 60퍼센트대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에서 일상적으로 겪는 어려움을 해결할 급진적 조처가 확산되기를 바란다. 이번 선거 패배는 그런 대중의 기대와 차베스 정부의 구체적 정책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보여준 것이다.

독립적

그러나 관료들을 포함해 차베스 진영의 우파들은 이번 패배를 개혁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람들이 불만을 품었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계급연합 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기회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예컨대, 노동부 장관은 정부베네수엘라의 경총인 페데카마라스(FEDECAMARAS)우익 어용 노조인 베네수엘라노동조합연맹(CTV) 사이의 3자 회담을 열겠다고 발표했다. 전 차베스 고문 중에는 정치 안정을 위해 우익으로 전향한 전 국방장관 바두엘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번 패배를 극복하는 가장 올바른 길은 그와 정반대이다. 먼저, 볼리바르식 혁명이 처한 문제를 냉정하게 파악하고 공개적으로 대안을 토론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필요하다. 주민자치평의회와 베네수엘라통합사회주의당(PSUV) 총회 같은 대규모 대중 조직이 그런 공간이 돼야 하지만 관료들의 방해로 매우 불균등하게 진행돼 왔다. 따라서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좌파들이 개입해 주민자치평의회와 PSUV에서 그런 토론이 진행되도록 하고 급진화하는 사람들을 최대한 독립적 세력으로 결집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대중적 혁명 정당이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개헌 국민투표를 둘러싸고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좌파들은 분열했다. UNT 내 통합적계급적혁명적자주적 경향(C-CURA)의 지도자 오를란도 치리노나 4월 13일 운동의 롤란드 데니스 같은 존경받는 혁명가들이 무효표 투표를 주장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개헌 내용을 보면 그들이 그런 주장을 한 데는 이해할 만한 이유가 있다. 또, 우익과 차별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반대표가 아니라 무효표를 선동했다. 그러나 우익이 오랜만에 단결에 성공해서 차베스와 운동을 공격하고, 선거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올바른 전술은 아니었다. 비판적 지지표를 선동한 스탈린 페레스 등 C-CURA 다수파의 입장이 옳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혁명적 좌파들이 올바른 평가 속에 전열을 정비하고 차베스 진영 우파와 논쟁하며 21세기 사회주의의 전진을 위해 개입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