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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기 게양과 흔들기를 자유화하라

인공기 게양과 흔들기를 자유화하라

이정구

북한이 내달 29일 부산에서 열리는 아시안게임에 선수단과 응원단을 보내겠다고 통보하자 김대중 정부는 인공기 게양과 응원단의 인공기 사용 허용을 놓고 딜레마에 빠졌다. 국가보안법이 서슬 퍼렇게 있는 현실에서 인공기 게양이 국가보안법에 저촉되기 때문이다. 검찰은 ‘이적 표현물’에 해당하는 인공기를 경기장 밖에서 내걸 경우 처벌하겠다고 공언했다.

그런데 아시아올림픽평의회 헌장에는 경기장에서 참가국의 국기 게양과 국가 연주를 명기해 놓고 있다. 김대중 정부는 아시안 게임을 “민족의 화합과 번영을 기원하고 … 남과 북이 평화와 화해의 새시대를 열어가는” 스포츠 제전으로 삼겠다고 너스레를 떨어 왔다. 지난 4월 임동원이 특사로 방북해 아시안게임에 참가해 달라고 북한에 요청했고 북한 참가단의 경비를 한국이 지불하기로 한 터에, 경기장에서 인공기 게양과 북한 국가 연주를 하지 않는 것은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스포츠 경기는 스포츠일 따름이라고 생각하고 인공기 응원에 대해 관대하다. 〈문화일보〉와 연합뉴스 설문조사에 의하면, 70퍼센트가 넘는 사람들이 북한 응원단과 남한 서포터스가 경기장에서 인공기를 들고 응원해도 괜찮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서해교전 때처럼 남북 긴장이 고조되고 전쟁의 위기감이 높아지는 것보다는 한반도에 평화와 화해의 분위기가 감돌기를 바란다.

인공기

서해교전이 벌어진 뒤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들은 김대중 정부와 햇볕 정책을 연일 공격했다. “쌀 퍼줬더니 총알이 날아왔다”는 것이 대표적인 논조였다.

김대중은 집권 내내 우익의 공세에 직면하면 그들을 추종하는 식의 대응을 보여 왔다. 이번 서해교전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김대중은 ‘우발적인 사건’에서 ‘고의적 도발’로 말을 바꿨다.

7월 25일 북한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발표하고 제7차남북장관급 회담을 제의하자 김대중 정부는 즉각 환영을 표현했다.

그런데 한나라당과 〈조선일보〉가 북한측의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보장을 요구하고, “유감”을 사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태도를 밝히자 정부는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7월 25일 북한이 서해교전에 ‘유감’을 표명하고 콜린 파월이 이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자 북미간 대화 가능성이 커졌다. 7월 31일부터 열린 아시아지역안보포럼에서 외무장관 백남순과 미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비공식 회담을 열어 북미 대화 재개와 국무부차관보 제임스 켈리의 방북에 합의했다.

서해교전이 벌어진 지 두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북한의 유감 표명을 계기로 불안정하기는 하나 북미 대화 국면이 형성된 결과, 남북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북한은 경제 위기와 식량난 때문에 경제 원조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고, 김대중 정부는 ‘홍삼’ 부패 추문과 총리 인사청문회 파문으로 추락한 인기를 회복할 계기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북미간 대화가 이루어지더라도 문제는 대화 그 자체가 아니라 미국이 설정해 놓은 의제에 있다. 콜린 파월은 앞으로 벌어질 북미 대화의 의제를 대량살상무기 비확산 문제와 제네바 합의 이행, 재래식 군비 감축으로 못박았다. 지난 1월 부시가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한 뒤 미국이 즉각 북한을 군사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북한에 대한 압박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미국은 계속해서 북한에 핵사찰 압력을 넣어 왔다.

따라서 북한과 미국이 함께 테이블에 앉는다 해도 미국의 북한 압박이 지속되는 한 지금의 북미 대화 국면은 매우 불안정하고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북미 관계가 이처럼 불안정하고 유동적이기 때문에 이번 남북한 장관급 회담도 큰 진전을 보기보다는 이전 합의 사항 가운데 일부 덜 중요한 사항들을 이행하는 수준에서 끝날 공산이 크다.

불안정한 대화 국면

지금의 남북 대화 국면은 북미 관계에 따라 언제든지 긴장 관계로 바뀔 수 있다. 이런 모순적이고 불안정한 국면에서 〈조선일보〉와 냉전 우익들은 주도권을 쥐기 위해 계속 노력해 왔다. 서해교전에 대한 분명한 사과를 받아야 한다고 김대중 정부를 압박하는가 하면, 경수로 콘크리트 타설식에 맞추어 북한이 경수로 건설로 핵무기를 만들 수 있다는 요지의 미국 핵 과학자의 말을 보도했다.

이번 인공기 논란도 이런 배경에서 벌어지고 있다. 김대중은 인공기가 무분별하게 게양되는 행위를 단속하겠다고 밝혀 냉전 우익들을 안심시키고 있다. 남북한 지배자들이 서로 만나 환담하고 있는 이 때, 한총련 간부들은 수배 상태에 처해 있는 이 현실은 정권의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진정 남북 화해와 한반도 평화를 말하려면 아시안게임 때 어디서든 인공기를 게양하고 흔들며 북한 선수들을 자유롭게 응원할 수 있어야 한다. 북한을 지지하든 비판하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토론하고 논쟁할 문제지 국가가 탄압해야 할 문제가 아니다. 인공기 논란은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가로막는 국가보안법이 폐지돼야 할 필요성을 또다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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