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민주노동당 평당원의 목소리로 말하자’ 토론회:
종파주의와 자기 폭로로 뒤덮인 2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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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월 11일 한국 기독교 회관에서 ‘위기의 민주노동당 평당원의 목소리로 말하자’ 토론회가 열렸다. 부산시당 김석진 위원장이 사회를 맡은 이 토론회에는 2백여 명의 당원들이 참가했다.
그러나 지루하게 흘러간 2백40분 내내 생산적인 토론보다는 ‘자주파 때문에 내가 망가졌다’는 식의 하소연만 넘쳐났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참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김혜경 전 대표)
“지금 민주노동당은 제 관점으로는 진보정당이 아닙니다.”(홍세화)
“나는 그냥 도구로 쓰여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단결이 능사인지 회의가 듭니다.”(이덕우 변호사)
“창당 때부터 뺑이 치고 팽 당했습니다. 사민주의 정당 만들어야 합니다.”(양연수 전 전빈련 의장)
“알게 모르게 우리도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부정 저지르거나 눈감거나 한 적 없습니까? 이런 [자주파와의] 경쟁 구도에서 그냥 있어야 하나요? 당 지역 조직 만들 때도 활동 고민하는 게 아니라 그래도 분회 하나는 우리가 잡아야 하는데 이러지 않았습니까? 이런 식으로 1년에 적어도 3달에서 6달을 보냅니다.”(문성진, 인천 동구위원장)
구체적인 내용도 없이 자주파를 비난하는 발언과 여기에 낄낄대며 호응하는 일부 당원들이 분위기를 주도했다.
“제가 대학원도 다니는데 자주파 공부해 봤습니다. 근데 공부할수록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서 관뒀습니다”(박홍기, 도봉)
“제가 게시판에 누구누구 실명으로 비판했더니 항의 전화가 왔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동지한테 그럴 수 있냐’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동지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요’”(이우찬, 성북)
“당 공식 회의에서 퇴장 선동 해 본 건 평등연대 빼고 나밖에 없습니다. 나는 두 번이나 했습니다”(문성진)
“주사파들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소수가 정의이니까요. 네이버에 ‘진보신당’ 카페 만들었는데 아이디를 세 개나 만들 수 있으니까 이름 알리고 싶지 않는 사람들은 오십시오”(전현수, 학생)
이런 분위기가 어찌나 심했던지 “신당의 구체적 내용을 듣고 싶어 왔다”고 한 강진원 씨는 발언 기회를 얻어 불만을 토로했다.
“이 자리가 무슨 NL 성토대회입니까? 난 이 자리가 정말 맘에 안 듭니다. 비민주적 당 운영에는 좌파[평등파], 우파[자주파] 모두 책임 있는 것 아닙니까? 이제 이명박 하에서 5년을 보내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싸울까는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자주파 평등파] 둘 다 패악질만 하고. 좌파[평등파]도 맨날 쇼부치고 그러지 않았습니까?”
과천에서 온 최현 씨도 “신당이 새로운 컨텐츠가 있습니까? 자주파 부흥회 비판하면서 평등파 부흥회 하는 겁니까” 하고 비판했다.
중앙당 당직자인 송태경 씨는 “혁신의 구체적 내용도 없습니다. 당 제대로 뜯어고치지 못하면 신당도 안 됩니다. 자주파 비판 많이들 하시는데 저 평등파 동지들한테서도 여러번 목이 간당간당 했었습니다. 최고위원회가 문제라는데 그거 평등파 작품입니다” 하고 비판했다.
이 토론회의 절정은 ‘분당 계획 문건’으로 유명해진 한석호 씨의 발언이었다.
“내가 글을 쓴 이유부터 말해야겠습니다. 나 자신과 그리고 운동에 대한 환멸 때문이었습니다. 어느새 내가 장기판 졸이 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한나라당과 민노당 다른 게 뭐냐, 권력을 향한 끝없는 지향과 정치술수만 있는 거 아니냐?’ 하는 비판을 들었을 때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뒤집어놓고 그만두자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순간 내가 범죄자가 돼 있었습니다. 항상 저들 이겨서 뭘 하려다보니 범죄자가 돼 있었습니다. 대리투표 했습니다. ○○○ 위원장 당선될 때, 거기에도 그런 표 있었습니다. 운동은 없어지고 권력과 정치만 남더군요. 내 편이니까 대리투표하는 것 알고도 눈감은 적 있습니다. 당기위원 해 놓고도 그랬습니다.
“내일 중앙위에서 사람들, 당원들 다 보는 가운데 당이 제대로 한 번 망가지는 꼴 보고 싶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날 토론회에서는 분당파가 대의 명분으로 내세운 ‘종북주의’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 다음 날로 예정된 중앙위원회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해서도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을 위한 ‘토론’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나는 발언 기회를 얻어 이 점에 대해 지적했다.
“신당 만드신다는 분들께는 드릴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 당에서 혁신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호소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내일 중앙위에서 ‘종북주의 청산’을 내걸지 마십시오. 그것은 현명하지 않습니다.
“‘종북주의 청산’은 실천적으로 두 가지 결론밖에 안 납니다. 인적 청산 아니면 사상 검증이 그것인데 이런 태도는 당뿐만 아니라 운동도 같이 하지 못하겠다는 겁니다. 대부분의 운동에서 자주파가 다수를 차지한다는 사실을 잘 아실 겁니다. 그럼 그런 운동들은 다 안 할 겁니까?”
발언 중에 야유와 욕설이 쏟아졌고 심지어 누군가 ‘그만해, 저리가’ 하며 나를 밀쳐내고 마이크를 뺏었다. ‘패권주의 반대’, ‘다양성’ 등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분당파들이 주도하는 토론회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는 “평당원 토론회인데 웬 정파가 와서 설쳐”하고 나를 비난했다. 내가 청중석을 향해 “그럼 여기 정파에 소속되신 분들은 지금 다 가실 겁니까?”하고 묻자 일부 청중들이 그를 말려 겨우 발언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들어보니까 신당과 혁신의 내용도 많이 다릅니다. 어떤 분은 사민주의 정당 만들자고 하시고 어떤 분은 훨씬 급진적인 정당 만들자고 하시던데 그런 분들이 모두 ‘종북주의’에 반대해 모여 있다는 것은 별로 합리적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포에서 온 박동범 당원이 내 발언에 대해 “인적 청산 하자는 거다. 사상 평가하자는 거다” 하고 노골적으로 말하자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진지하게 당의 위기를 헤쳐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없지는 않았다. 동작구위원회 김학규 위원장은 먼저 “진짜 평당원은 별로 없는 것 같다”며 주최측을 꼬집었다.
“탈당 많이 하고 있는데 진짜 혁신 시도해 본 적이나 있습니까? ‘종북주의’ 때문에 코리아연방공화국을 내걸었다는 것은 논리적 비약입니다. 그동안 [평등파가] 문제제기도 제대로 안 해보고 갑자기 이러면 대중이 동의하겠습니까? 호들갑 떨어선 안 됩니다. 대중은 안 그러는데 우리가 나서서 당에 사망선고 내리는 건 아닌지 돌이켜봐야 합니다.”
그러나 사회자의 토론회 진행은 비민주적이었다. 토론회 제목과는 관계없이 ‘혁신이냐, 분당이냐만 토론하자’며 발언 내용을 제한했고 분당에 반대하는 발언에 토를 달기도 했다. 발언 신청을 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는데도 발언 신청도 안 하고 있던 김형탁 전 대변인과 조승수 진보정치연구소장에게만 마지막 발언권을 줬다. 그것도 시간 제한 없이 말이다.
민주노동당 위기에 대해 토론하러 온 진짜 ‘평당원’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무척이나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김형탁 전 대변인은 청중 중에 한 사람이 김형탁 전 대변인에게 “웬 말이 이렇게 기냐, 신당 계획만 압축적으로 1분 안에 애기해랴” 하고 독촉했을 정도로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혁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봤지만 경쟁에만 빠진다”며 “‘종북주의·패권주의’ 청산 받아들이지 않으면 즉시 모종의 행동에 돌입한다”는 것이 전부였다.
조승수 소장은 적록연대와 노동운동의 새로운 주체 형성, 그리고 계급연대·사회연대를 신당의 가치로 내세웠다. 그러면서 “‘스탈린주의’, ‘종북주의’, ‘주체사상’만 아니면 누구와도 함께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일보〉가 대서특필할 만한 얘기였다.
토론회에 모인 사람들의 4분의 1정도는 분당 주장에 적극 동의하는 듯했다. 조승수 소장에게 박수를 보낸 사람이 그 정도였다.
그러나 훨씬 많은 사람들이 자주파 비난에는 열을 올리면서도 분당 주장에는 별 호응이 없었다.
〈레디앙〉의 호의적인 보도와 달리 이 토론회에서는 당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쳐나가려는 진지한 토론을 찾아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