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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 2007):
여성해방과 사회주의

오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열리는 여성 노동자 대회는 ‘세계 여성의 날’ 탄생 배경인 100년 전 미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 전통을 이어받는 뜻깊은 대회다. 최근 몇 년 동안 진행된 주요 여성 파업-KTX, 뉴코아-이랜드, 기륭 등-을 지켜보면서 여성해방과 노동계급 해방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사람들에게, 나는 ‘여성과 마르크스주의’(책갈피, 2007)를 읽어볼 것을 적극 권한다.

이 책은 영국 전쟁저지연합 사무총장이자 급진좌파 정당 Respect의 2008년 런던시장 후보인 린지 저먼(Linsey German)이 1980년대에 쓴 책이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중앙위원이기도 한 저먼은 1960년대 말 미국과 영국에서 폭발적으로 성장한 여성해방운동이 1980년대 후반에 위기를 겪으면서 쇠퇴하자, 위기의 근원을 해명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3백 페이지가 넘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 주제는 ‘Sex, Class and Socialism’이라는 원제가 나타내듯, 여성 억압과 계급, 그리고 사회주의와의 관계이다. 오늘날 여성운동에서 지배적인 사상은 여성 억압과 계급 사이의 관계(따라서 사회주의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서구 여성해방운동에서 급속도로 부상한 ‘가부장제’ 이론은 여성 억압을 계급 사회와 무관한 ‘남성 권력’의 문제로 설명했다.

이 이론의 영향력은 매우 강력해서 심지어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조차 이 이론을 수용하기도 했다. 대다수 페미니스트들은 여성 억압이 계급 사회와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가부장제’의 산물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여성해방은 계급 사회 타파와 무관한 것으로 취급됐다.

그러나 가부장제 이론은 여성 억압을 인간 사회의 발전과 분리시키기 때문에, 억압이 생겨난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비록 저먼의 이 책에서는 여성 억압이 발생한 기원-계급 사회의 등장-에 대해 간단하게만 설명했지만, 계급 사회가 등장하면서 그 전 사회에 존재했던 남녀간 평등이 무너졌다는 주장은 많은 인류학자들의 연구에 의해 입증됐다.

가부장제 이론은 또한 여성의 지위가 서로 다른 사회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그리고 같은 사회 내에서도 여성들이 겪는 억압의 정도가 천양지차인 이유에 대해서도 전혀 해명하지 못한다.

반면, 린지 저먼은 사회의 계급구조가 어떻게 여성 억압을 야기하는지, 자본주의에서 여성 억압의 양상과 가족제도와의 관계를 해명한다. 그리하여 여성학계에 널리 퍼진 정태적이고 부정확한 설명(‘유사 이래 여성의 삶은 언제나 똑같았다’는 식의)을 넘어, 자본주의에서 변화하는 여성들의 삶과 가족제도의 모순을 날카롭게 묘사했다.

저먼은 지난 2백 년 간의 자본주의 발전에서 여성들의 삶이 변화한 양상을 다채롭게 묘사하는 한편, 여전히 여성 억압이 지속하는 이유를 자본주의 사회의 계급 구조와 가족제도의 구실을 연결시켜 설명한다.

많은 독자들은 이러한 설명에 의구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강간을 하거나 차별 임금을 옹호하고, 가정에서 거만한 가장의 권위를 강요하는 ‘마초들’이 어디 특정 계급에만 속해 있는가? 또, 여성 차별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이 단지 노동계급 여성뿐인가? 중간계급 여성, 심지어 부르주아 여성들도 차별받지 않는가?

여성 억압과 계급

저먼은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차별받지만, 그 정도는 계급에 따라 매우 커다란 격차가 있음을 지적한다. 모든 계급의 여성들이 똑같은 고통을 받기는커녕, 부유한 여성들과 노동계급 여성들의 삶은 매우 달랐다는 점을 산업혁명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특히 지난 20~30년 간 여성 내에서 계급적 격차는 더욱 벌어져 왔다. 얼마 전 전국 40여 곳에서 땅투기를 한 의혹이 제기돼 여성부 장관 입성에 실패한 이춘호 사례에서 우리는 이 점을 생생하게 봤다. 암에 걸리지 않았다고 남편한테서 오피스텔을 축하 선물로 받는 여성의 삶과, 화장실 갈 새 없이 일하느라 방광염에 걸려가며 한 달에 고작 80만 원 받는 뉴코아-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삶은 도대체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보모와 가정부에게 양육과 청소, 요리, 빨래를 맡기고 자녀를 고급 유치원과 고급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는 부유한 여성들과, 하루종일 고된 노동을 하고 다시 집에 와 밤늦게까지 집안일을 해야 하는 노동계급 여성들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단결할 수 있을까?

저먼은 부정적이다. 특권층 여성들은 “자기 계급 내에서 차별받을지 몰라도, 그들은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억압자로서 (때로는 착취자로서) 행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성 해방은 모든 여성의 단결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 맞서 남녀 노동계급이 단결해 싸울 때 가능하다. 그런데, 과연 남녀 노동계급이 단결하는 것이 가능할까?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은 그럴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계급 남성도 여성 차별로부터 이득을 얻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19세기 영국 노동운동이 보호입법과 가족임금을 지지한 것은 남성 노동자들이 가족제도 유지를 위해 자본가들과 가부장적으로 공모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먼은 산업혁명 초기에 약화된 노동계급 가족이 19세기 후반에 강화된 이유에 대해 가부장적 공모론보다 훨씬 설득력 있는 대답을 제공한다. 여성과 아이들이 공장과 작업장에서 혹사노동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당시 노동계급은 가족을 자신들의 삶을 보호하기 위한 최선책으로 여겼다는 것이다.

가족을 변치 않는 제도로 여기는 페미니스트들과 달리, 저먼은 가족제도가 이후에도 계속 변해 왔음을 보여 준다. 특히 2차세계대전 이후 집 밖의 임금노동에 참가하는 여성들이 대폭 늘어나면서 결혼과 성, 출산에 대한 여성의 태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오늘날 가족제도는 결혼 감소와 이혼 증가, 저출산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저먼은 자본주의에서 가족제도가 사라질 것이라고 전망하지는 않는다. 지배계급과 노동계급이 서로 다른 필요에서 가족제도를 유지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노동계급 가족은 자본주의에서 현재와 다음 세대의 노동력 재생산을 담당한다. 지배자들은 재생산 부담을 개별 가정에 떠넘기고 사회에 보수적 이데올로기를 퍼뜨리기 위해 가족제도를 존속시키려 한다. 다른 한편, 노동계급은 가혹한 착취와 살벌한 경쟁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안식처로서 가족을 유지하기 원한다. 비록 노동계급 가족의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큰 격차가 있지만 말이다.

가정 밖에서 여성이 수행하는 임금노동은 갈수록 자본주의 체제에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노동력 재생산은 개별 가족에서 수행된다. 바로 이러한 모순이 오늘날 여성 억압이 지속하는 이유다.

따라서 저먼은 여성 해방을 위해서는 계급 사회를 타파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1960년대 말에 폭발한 서구의 여성해방운동이 위기에 빠졌던 이유도 바로 계급 사회라는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해방운동은 억압의 원인에 대해 이론적으로 불명확했고, 또 여성 대중에게 뿌리를 내리지 못해 사실상 상황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에 “전투성의 위기”가 생겨났다. 1980년대 동안 지배자들의 공세가 강화되면서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우경화됐고, 그 결과 사회의 총체적 변화를 포기하고 국가기구와 학계, 출판계 등에서 개인의 출세를 추구하는 경향이 여성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음을 저먼의 책은 생생하게 보여 준다. 우경화한 페미니스트들은 더는 해방에 대해 말하지 않고, 현존 사회 내에서 가능한 평등만을 추구하게 됐다.

그러나 저먼이 한국어판 서문에서 결론지었듯이, 여성해방을 위해서는 평등권을 위한 투쟁뿐 아니라-물론 평등권도 중요하지만-이윤이 아닌 필요에 기초한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이 필수적이다. 노동하는 남녀가 자신이 생산한 부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여성해방을 위해 필요한 물질적 자원(예컨대 육아와 가사의 사회화에 드는 비용)을 동원할 수 없다. 사회주의와 여성해방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기사는 ‘민중언론 참세상’에 기고한 것을 재게재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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