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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근리 학살 인정 않는 오만한 미국 정부

[편집자] 얼마 전 무전 및 통신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 병사 두 명이 상급 지휘 본부로부터 노근리에서 피난민들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증언이 새로 나왔다. 이것은 그 동안 우발적 사고처럼 둘러댄 미국 주장이 거짓임을 보여 주는 증언이다. 미 육군 진상조사단은 노근리 문제에 관한 최종 보고서를 만드는 중이며 12월에 공표할 예정이다. 미국은 어떻게든 양민 학살을 은폐하려 하고 있다.

"낮 12시께였어요. 전투기가 귀를 찢는 굉음을 내며 철길 위에 있는 피난민을 폭격하기 시작했습니다. 화창한 여름이었는데, 햇빛에 반사된 피와 살점이 얼마나 선명했는지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철로 위의 폭격으로 할머니와 오빠, 남동생이 숨지고 자신도 왼쪽 눈을 잃은 양해숙(59·여)씨는 "당시 할머니가 있던 자리에 폭탄이 떨어져 주변에는 시신조차도 남지 않았다."며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그 때 내 앞으로 불이 확 올라오면서 폭풍이 일었다. 어머니는 동생과 나를 감싸 안고 엎드렸다. 폭격의 충격으로 왼쪽 눈알이 빠져 달랑거렸는데 무언지도 모른 채 무서워서 손으로 잡아떼었다."

당시 12세였던 정구호(59)씨는 "희생자들이 터널 주변과 개울 바닥에 널려 있어 일부 사람들은 날아오는 총탄을 막기 위해 시신들로 바리케이드를 쌓기도 했으며, 살아남은 사람들은 개울을 흐르는 핏물을 떠먹으며 나흘을 버텼다."고 증언했다.

노근리 양민 학살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은 미군들이 피난을 시켜준다며 영동읍 주곡리와 임계리 주민들을 부산방면으로 끌고 가다가 1950년 7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에 걸쳐 노근리 철로변과 굴다리에서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다.

7월 25일 해질 무렵, 한패의 미군들이 들이닥쳐 "대구, 부산 방면으로 피난을 시켜주겠다"면서 마을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집합시켰다. 남아 있으려는 사람들까지 강제로 모이게 했다. 약 5백 명이 미군들의 인솔로 서울-부산간 국도를 걸어서 남쪽으로 향했다. 그들이 2킬로미터 정도를 걸었을 때 영동읍 하가리에 이르렀고 한밤이 됐다. 바로 이 때 5기병연대장의 '즉각포위' 명령을 받은 2대대는 피난민들을 모두 도로 우측 하천바닥으로 끌고 가서 그 곳에서 밤을 보내도록 명령했다. 26일 아침부터 다시 남쪽으로 향한 피난민들은 정오경 미군들의 명령을 받고 영동읍 노근리 도로 변의 경부선 철로 위에 올라간다. 미군은 그들의 몸과 짐을 검사한 다음 무장하지 않았음을 확인하고도 미군 비행기를 무전으로 불러 기총소사를 해댔다. 그것이 바로 1차 학살이다. 살아 남은 자들이 경부선 철로 밑과 터널 밑으로 들어가자 2차, 3차 학살이 계속됐다.

노근리 미군 양민학살사건 대책위원회는 사건 당시 사망자 수는 1백32명이고 미등록 사망자와 호적을 올리지 않고 죽음을 당한 어린아이도 10여 명이며 중상자는 19명에 이른다고 밝혔다.

정은용 대책위원장은 "사건 생존자들이 미군의 살상 행위를 증언하고 있으며 노근리에 있는 사건 현장 터널의 콘크리트 벽에 미군의 총격으로 인한 수많은 탄흔이 남아 있는데도 미군 쪽은 학살 사실을 발뺌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 씨는 지난 1960년 10월과 12월 2차례에 걸쳐 미국 정부가 서울에서 운영했던 소청사무소와 미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으나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했다. 그 후 이 사건의 입증 자료를 수집해 지난 1994년 7월과 10월 주한 미 대사관을 통해 클린턴 앞으로 사과 및 손해배상 청구를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고, 김영삼 앞으로도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주한 미군 배상 사무소 쪽에서는 "미국은 미군이 적과의 전투 과정에서 야기한 피해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회신을 보냈을 뿐이다.

노근리가 또 있었다

충북 영춘 곡계골·경남 마산 곡안리·경남 사천 조장리·황해남도 신천리 등에서도 미군에 의한 양민학살이 있었다. 곡안리 양민학살 유족대책위(위원장 이만순·66)가 그 동안 확인한 피해자 명단만 봐도 10세 이하 어린이 17명(23%), 부녀자 36명(48%), 50세 이상 노인 20명(27%) 등이었다. 20∼40대 청·장년층 남자는 6명으로 8%에 불과했다. 이만순 씨의 말마따나 "흰 옷을 입은 아녀자가 아기를 안고 도망가는 걸 보면서 뒤에서 사격을 가했다는 걸 보면 분명히 양민에 대한 의도적인 미군의 학살이었다."

이북 지역의 피해는 더욱 심각하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군이 유엔군에 밀려 퇴각하던 1950년 10월 17일, 신천 지역을 점령한 미군은 50여 일 동안 신천군 인구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만 5천3백83명의 무고한 주민을 학살했다. 황해남도 은률군에서 1만 3천여 명, 평안북도 정주군 창도에서 5백80명의 섬주민 모두를 학살했으며, 평양에서도 1만 5천 명, 황해남도 안악군에서 1만 9천72명 등 미군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양민학살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의 오만함

지난해 9월 30일 오전 2시 미국 〈AP통신〉은 자체 웹사이트(http://wire.ap.org)에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군 자료들과, 당시 사건과 관련이 있는 미군 출신자 십여 명의 증언을 보도했다. 〈AP통신〉의 보도가 나간 직후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에 미군이 양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는 보도에 대해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크롤리 국방부 대변인은 "1950년 7월에 일어난 사건을 명확히 할 수 있는 정보가 없다"고 말했다. 에드윈 베이거 육군 대변인도 "육군 역사센터가 관련 서류를 찾아봤으나 노근리 양민학살 주장을 뒷받침할 정보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제임스 폴리 국무부 대변인은 노근리 양민학살 보도에 대해 "그 보도를 보지 못했으며 (그러한 얘기를) 처음 듣는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지난 6월 발간된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전민족 특별위원회'의 1차 공동백서에 따르면 지난 1970년대에 미군들이 노근리 쌍굴(굴다리) 지역 주변을 뒤지며 탄피를 수거해 갔다는 주민 증언이 있다.

미국 정부가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되자 진상조사 요구를 억누르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칼데라 미 육군성 장관은 "가해 미군병사를 형사처벌 할 수 있다"며 진실을 얘기하려는 미군들의 입을 막으려 했다. 그는 AP통신에 미군의 양민학살을 증언한 에드워드 데일리가 노근리 근처로 배속된 것은 노근리 사건이 있은 지 8개월 후였다고 거짓 발표를 했다. 또 에드워드 데일리를 노근리 사건 현장에서 보지 못했다는 사람의 말만 인용하고 그를 본 여러 다른 사람의 증언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심지어 에드워드 데일리가 정신병 경력이 있다며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모든 남한인은 전투 지역에서 소개됐기 때문에 민간인은 적으로 간주하라"(1950년 7월 27일 25보병사단장 윌리엄 킨 소장의 작전명령), "모든 난민이 남쪽 경계를 넘어오지 못하게 하도록 명령하고, 조직적 소개(제거)계획을 입안하라"(8군 본부에서 모든 미군전투부대에 보낸 명령)에서 볼 수 있듯이 미군의 작전명령서에는 양민학살에 대한 구체적인 명령이 담겨 있다.

이런 미국의 오만한 태도에 대한 국제적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한국 정부는 한·미 공동조사를 요구했고, 미국은 마지못해 노근리 문제와 관련된 양국간 비상설협의체를 설치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정부의 미국 눈치보기

김대중은 노근리 학살 사건과 관련해 "한국 국민과 정부는 이 문제의 진실을 밝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상응하는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며 "미국 정부의 적극적인 조사 자세를 환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는 말과 달리 행동에서는 진실을 은폐하고, 미국의 눈치를 보는데만 급급하다.

조성태 국방장관은 진상 조사 사업이 한창 진행되던 지난해 "참전자를 중심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되, 현지 조사와 주민 접촉은 뇌관을 건드리고 불난 곳에 기름을 붓는 격이니 안 하는게 좋겠다. 그리고 군의 최대 양보선은 양비론이다." 라고 진상조사를 진행하던 국방연구소에 은폐·축소 지시를 내렸다.

또 한·미 연례안보협의회(SCM) 참석차 귀국한 양성철 주미대사는 9월 21일 영문일간지 코리아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노근리 사건과 관련, 미군사령관이 난민 사살을 명령했다는 확실한 증거를 확보하기 어렵다며 피해자 보상을 포함한 법적 접근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일섭 국방차관은 10월 26일 서울 플라자 호텔에서 한미 안보연구회 주최로 열린 제15회 국제안보 학술대회 만찬 연설을 통해 "노근리 사건, 매향리 사격장 문제, 소파 개정, 미군기지 환경오염 등 여러 현안과 관련해 한미 관계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사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다."며 "한국 내 몇 만 명에 불과한 소수가 우리 국민 전체의 의사를 대변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부와 관료들의 이러한 태도는 진상 조사 과정에서도 미국의 입장을 대변해 주기 급급해 있다.

정부는 당초 지난 6월 25일 이전으로 예정됐던 노근리 사건 조사 결과 발표를 연기 이유가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올 4월 정부에서 작성한 '노근리 사건 조사결과 ― 중간보고' 문건 7쪽 '종합평가'란을 보면 '한·미 양측 및 피해자가 만족할 경우와 불만족할 경우'로 구분해 놓고 '지상군 작전 상황' 항목에는 '교전 상황의 긴박성으로 입증 자료 불충분/피난민 위장 게릴라 침투 방지를 위한 전술적 대응 불가피'라고 쓰고 있다. 이는 노근리 사건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인 총격의 동기에 대해 정부가 총격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미국의 입장을 전적으로 따르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항공사격' 항목에서는 '공지작전 운용 체계상 미 지상군 유도 하의 항공사격 불가능/지상군 사격은 수로 대피 피난민을 적으로 오인 사격한 것으로 추정'이라고 평가를 함으로써 항공사격이 없었다는 미국측의 주장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정부는 철저한 조사를 명분으로 조사 결과 발표 시기를 늦추고 있으나, 실제로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짜맞추기식 조사 결과를 언제 발표할지만을 계산하고 있을 뿐이다.

정부와 별도로 진상조사 작업을 벌이고 있는 '미군의 양민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전민족 특별위원회'는 지난 6월에 그 동안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1차 공동백서를 발간했고, 내년 봄까지 3차백서를 발간하여 미군의 학살 만행과 범죄 행위를 밝힐 예정이다. 또, 2001년 6월 23일 워싱턴에서 열리게 될 국제전범재판소에 미군을 전범으로 기소할 준비도 하고 있다.

노근리는 끝나지 않았

전쟁이 중단된 지 50년이 지났음에도 미군은 지금까지 매향리에 대한 폭격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불평등한 한미협정을 개정하라는 정당한 요구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하고도 책임자 처벌은 물론 사죄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 오만함을 보이고 있다. 정부의 공식 통계에 따르면 1967년부터 1998년까지 발생한 미군인 범죄(미군속 범죄 포함)는 5만 82건이며 범죄에 가담한 미군(미군속 포함)은 5만 6천9백4명이다. 경찰에 접수되지 않은 사건까지 감안한다면 실제로는 더욱 많은 범죄가 일어났을 것이다. 위의 통계를 근거로 1945년 9월 8일 미군주둔 이후 지금까지 발생한 미군 범죄는 약 10만 건으로 추정되고 있다. 1992년 윤금이 씨 살해사건, 1997년 홍익대생 조중필 씨 살해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미군에 의한 한국민의 피해는 계속 진행되고 있다.

영화 JSA에 이런 말이 나온다. "이곳에 진실은 없다. 이곳은 진실을 감춤으로써 평화를 유지하는 곳이다." 결국 이번 노근리 양민학살의 진상도 미국과 김대중 정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그냥 감추어질 가능성이 크다. 미국과 김대중 정부의 관심은 양민학살의 진상이 아니다. 그들은 진상이 공개될 경우 반미투쟁이 격화되어 미국의 안정적인 지배를 위협할 수 있다는 점을 걱정한다. 오직 역사의 진실을 바로잡고자 하는 우리 노동자·민중들의 투쟁만이 노근리 양민 학살의 진상을 규명하고 미 제국주의의 만행을 중단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요구한다. "미국은 진상을 밝히고 이 나라를 떠나라"

■ 오연호, 《노근리 그 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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