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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의 추악한 역사

유엔의 추악한 역사

한상원

이라크 전쟁에 반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미국이 추진하는 결의안이 부결되거나 유엔 안보리 결의안 통과 전에 유엔 무기사찰단이 무기사찰에 돌입함으로써 전쟁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이런 생각들은 유엔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는 평화적 기구라는 인식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진실이 아니다.

유엔의 창설

유엔 출범은 1941년 미국 국무부에서 계획했다. 이것은 제2차세계대전 뒤 세계 분할에 관한 미국의 이해관계를 반영했다. 당시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부상중이었고 전후 자신의 세계 지배력을 위협할 만한 전쟁은 막는 것이 유리했다. 또, 자신이 주도하는 국제 기구에 다른 나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세계 지배력을 공고히 하고 싶었다.

당시 세계 패권을 좌우하던 나라들이 상임이사국에 포함되고 여기에 빠진 다른 나라들은 총회 회원국으로 인정됐다. 초창기 회원국들은 모두 미국에 우호적이어야 한다는 기준이 있었다. 즉, 추축국가들(이탈리아·독일·일본)에 맞서 싸워야만 유엔 회원국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남미 국가들은 유엔 회원국이 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했다. 이런 노력 끝에 미국은 유엔을 만들고 조종할 수 있었다. “종전 후 새로운 세계 평화의 정착”을 떠들어 대면서 말이다.

그러나 유엔이 출범하자마자 세계는 냉전에 돌입했고 평화의 꿈은 사라져 버렸다. 냉전 기간 동안 양대 진영은 치열한 군비 경쟁을 했다. 주변부 국가들은 대부분 끔찍한 전쟁과 약탈을 겪어야 했다. 1945년부터 1989년까지 1백38건의 전쟁이 일어났고 2천3백만 명이 죽었다. 모두 제3세계에서 일어난 전쟁들이었다.

이 시기 미국은 한국 전쟁을 벌였고 베트남, 캄보디아, 그레나다, 파나마 등을 침공했다. 구 소련도 헝가리, 체코, 아프가니스탄 등을 침공했다. 다른 안보리 상임이사국들도 야만적인 전쟁을 벌였다. 영국은 1953년 케냐의 마우마우 봉기 당시 수많은 원주민들을 살해하고 고문했다. 프랑스는 알제리와 인도차이나를 계속 식민지로 유지하기 위해 잔인한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중국은 티벳을 침공했다.

1948년 유엔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했다. 그 뒤 이스라엘은 아랍 국가들과 총 네 차례나 전쟁을 벌였다. 그리고 아직도 일상으로 팔레스타인인들을 학살하고 있다.

1975년, 포르투갈 군대가 철수한 동티모르에 인도네시아가 개입해 20만 명의 동티모르인들이 학살당했다. 유엔은 이 학살을 지켜만 봤다.

한편, 이 시기에 유엔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항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2차세계대전 뒤 많은 제3세계 국가들이 독립을 쟁취해 유엔 회원국이 됐다.(1961년에만 회원국 수가 51개에서 1백 개로 늘어났다.) 그러자 유엔이 미국의 외교 정책에 반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유엔에서 미국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나오자 미국은 당황했다. 이 때문에 미국은 1961년부터 유엔 안보리만이 모든 유엔 군사 행동을 허가하는 권한을 갖도록 만들었다. 또, 같은 이유로 미국과 구 소련은 1980년대 중반 유엔 재정 지원을 철회했으며 이 때문에 유엔은 재정 위기를 겪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강대국은 유엔에 대한 지배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었다.

‘인도주의적 개입’

냉전이 끝난 뒤 많은 사람들은 이제 유엔이 평화를 불러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냉전이 해체되자마자 유엔이 한 짓은 미국이 벌인 제2차 걸프전(1991년 1∼2월)을 승인한 것이었다.

1980년대 이라크가 이란을 침공하고 이란 병사들에게 독가스를 살포했을 때 아무런 제재도 가하지 않은 유엔 안보리는 1990년 11월 30일 후세인에 맞선 군사력 사용을 승인했다. 중국이 기권했을 뿐 모든 나라들이 찬성표를 던졌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는 소련에 감사의 선물로 10억 달러어치의 식량을 기부했다. 또, 중국에는 반대표를 던지지 않은 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천안문 학살 뒤 세운 대화 거절 방침을 철회했다.

이라크 전쟁은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됐다. 이것은 냉전 뒤 미국이 군사 개입을 벌일 때 꼭 써먹는 수법이다. 그러나 이라크에서 ‘인도주의적 개입’은 수십만 명을 폭격과 경제 제재로 학살하는 것을 뜻했다.

제2차 걸프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자신감에 넘쳐 ‘인도주의적 개입’이 무엇인지 더욱 확실하게 보여 주고 싶었다. 1992년 유엔 안보리는 만장일치로 ‘희망 회복’ 작전이라는 이름으로 소말리아에 ‘평화유지군’을 파견했다.

국제 ‘평화유지군’의 목적은 내전을 종식하고 민간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은 평화가 아닌 증오를 소말리아인들에게 심어 줬다. 가장 악랄한 것은 역시 미군이었다. 한 미군 병사는 소말리아 소년이 자신의 선글라스를 훔쳤다는 이유로 소년을 쏴 죽였다. 그 벌은 고작 한달 월급 반납과 지위 강등뿐이었다.

처음 미군은 소말리아국민동맹의 지도자 무하마드 파라 아이디드와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한 군벌 집단이 키스마요를 침공해 아이디드를 몰아낼 때 미군은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이런 미군의 이중적 태도에 분개한 소말리아인들이 모가디슈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미군은 시위대에 발포했다. 반(反) 아이디드로 태도를 바꾼 미군은 아이디드의 지지자들이 모인 자리에 폭격을 가했다. 또, 아이디드가 숨어 있을 거라며 모가디슈 병원에 미사일을 비 퍼붓듯 쏘아 댔다.

미군말고 다른 평화유지군도 마찬가지로 폭력적이었다. 벨기에 군인들이 한 소년을 두들겨패는 장면이 언론에 보도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탈리아 군대는 난민촌을 약탈했고 한 말레이시아 출신 대원은 병원 노동자를 구타했다. 그리고 파키스탄과 나이지리아 군대는 무장하지 않은 시위대에 발포했다. 이런 만행 때문에 소말리아인들은 유엔군을 내쫓기 위한 내전을 치렀다.

1995년 11월 데이턴 평화협정이 체결돼 30만 명의 보스니아인들을 죽음으로 내몬 보스니아 내전이 끝났다. 이 협정을 중재한 것은 미국이었다. 이것은 강압에 의한 협정이었다.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에 따르면 미국은 “대표단이 협상에 서명할 때까지 수 주일 동안 그들을 미국 중부 깊숙한 곳에 사실상 감금”했다.

평화협정 뒤 유엔이 임명한 고등판무관이 보스니아를 위임 통치했다. ‘인도주의적 개입’을 외피로 삼은 효과적인 식민 지배인 셈이다. 유엔고등판무관은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선거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후보를 사퇴시키고, 정부 각료로 당선한 보스니아인들 중 비협조적인 인사들을 해임했다. 그래서 정부의 주요 자리는 모두 임명된 외국인들이 차지했다. 예컨대 중앙 은행장은 뉴질랜드인이었으며, 경찰 부대표는 로스앤젤레스 경찰서에서 일하던 악명이 자자한 미국인이었다. 유엔은 보스니아에 평화가 아니라 독재 정부를 수립했다.

2002년 이라크

현재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프랑스가 제시한 ‘2단계 해법’을 수용함으로써 이견을 좁히는 듯하다. ‘2단계 해법’은 전쟁을 방지하자는 제안이 아니다. 여론이 좋지 않으니 속도를 늦추자는 것이다.

안보리 상임이사국들은 모두 이라크에 이해관계가 있다. 전 CIA 국장 제임스 울시의 말대로 “프랑스와 러시아의 석유 기업들은 이라크에 이해관계가 있다.”

이 때문에, 전쟁에 반대하는 것처럼 말하던 나라들이 이라크의 막대한 석유를 차지하기 위해 뒷거래를 벌이고 있다. 이런 나라들이 전쟁을 막을 것이라 믿는 것은 환상이다.

한편, 미국 상·하원에서 통과된 이라크 공격 결의안은 미국이 유엔의 동의 없이도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이미 미국은 1999년 발칸 전쟁과 2001년 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도 유엔 없이 전쟁을 완수했다. 이 때 유엔은 전쟁을 막는 데 완전히 무기력했다.

유엔이 전쟁을 막은 역사는 없다. 전쟁 결의안을 통과시킴으로써 전쟁을 축복해 주거나 아니면 있으나마나 한 게 유엔의 역사다. 유엔이 아닌 대중적 반전 투쟁만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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