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일어난 모스크바 인질극 독가스 진압 참사는 러시아 지배자들의 잔혹함을 남김없이 보여 줬다. 이 사건으로 적어도 1백70명이 죽었는데(인질 1백20명, 체첸 독립군 50여 명), 사망자의 대부분이 러시아 군대의 진압 과정에서 독가스로 죽은 인질 1백16명이었다.

이번 인질극 사건에 대한 푸틴의 대응은 2000년 8월 핵 잠수함 쿠르스크 호 침몰 사건에 대한 대응과 비슷하다. 당시 푸틴은 쿠르스크 호가 폭발한 부근에 있던 외국 선박의 구조 제의를 거부해 선원 1백18명 전원이 죽도록 내버려 뒀다. 두 사건에서 그는 러시아 군대의 ‘자존심’과 보안을 지키기 위해 자국민조차 서슴없이 희생시켰다.

푸틴의 독가스 살인은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의 찬사를 받았다. 부시·블레어·장쩌민은 이번 사건에 대처한 푸틴의 시도를 본받을 모델로 칭찬했다. 심지어 블레어와 장쩌민은 러시아가 사용한 독가스를 수입하려고까지 했다. 이런 자들이 지금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해체를 요구하며 무기 사찰을 강요하고 있다.

억압과 반란의 역사

체첸은 카스피해와 흑해 사이에 있는 카프카스 산맥 북쪽에 위치해 있다. 카프카스 지역은 러시아가 지중해로 진출하는 해상 루트인 보스포루스 해협과 흑해로 가는 통로였다. 그래서 19세기에 체첸은 팽창 정책을 펴던 제정 러시아에 정복당했다.

제정 러시아의 체첸 정복 과정은 매우 야만적이었다. 러시아는 숲·마을·곡식 들을 불태우고 파괴했다. 체첸인들을 여성과 어린이 할 것 없이 대량 학살했다. 한 러시아 관리는 그 목격담을 이렇게 냉담하게 말했다. “카프카스 지역에서 우리가 한 행동은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며 저지른 온갖 참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럼에도 19세기에 체첸인들은 근대사에 손꼽을 만한 위대한 반란을 일으킨다. 이 반란은 유럽 전역에서 반동에 맞서는 사람들을 고무했다. 마르크스는 탁월한 체첸 저항 운동 지도자 샤밀을 격찬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 군인 수만 명의 목숨을 앗아가며 50년 간이나 지속했다.

그러나 오랜 전쟁은 체첸에 엄청난 타격을 줬다. 25년 간 인구의 3분의 1인 7만 명이 죽고 지역사회는 초토화됐다. 1859년 샤밀이 체포되고 결국 체첸은 러시아에 합병됐다. 그 뒤 체첸인들은 가혹한 식민 통치를 받게 됐다.

그러던 중 식민 통치의 굴레를 깨뜨릴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제정 러시아의 지배를 받던 소수 민족들에게 한줄기 빛과 같았다. 볼셰비키는 소수 민족의 자결권을 지지했고, 이것은 피억압 민족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볼셰비키와 반혁명군 사이에 내전이 벌어진 1919년, 북카프카스인들은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로 반혁명군 장군 데니킨이 이끄는 백군 가운데 3분의 1이 진입을 저지당했다. 1920년 3월 체첸 수도 그로즈니에서 백군이 패배하면서 데니킨의 군대는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백군이 패배하자 현지 지배자들은 권력을 빼앗길까 봐 두려워 1920년 9월 볼셰비키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다. 많은 체첸인들과 잉구슈인들은 볼셰비키 편에 서서 반혁명 봉기에 굳건하게 맞섰다.

결국 반혁명 봉기가 패퇴해, 1921년 [카프카스]산맥 자치 공화국이 세워졌고 샤리아(율법)에 바탕을 둔 헌법이 제정됐다. 당시 체첸어에는 문자가 없었는데 새로운 라틴 서체가 만들어졌다. 그리하여 처음으로 체첸어로 책과 잡지가 출판됐고 문자 해독률이 급증했다. 체첸 역사에서 처음으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시작했다. 카프카스 전역에서 해방과 우애의 시대가 도래하는 듯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적대적 세계 속에서 고립되고, 스탈린주의가 혁명의 성과를 무로 돌리고 부상하면서 이런 희망의 불꽃은 금세 꺼지고 말았다. 1929년, 체첸 동부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과 토지 ‘집산화’에 따른 소요를 분쇄하기 위해 스탈린은 카프카스 지역에 수만 명의 러시아 군대를 배치했다.

스탈린은 체첸인들의 반란에 끔찍하게 보복했다. 1937년 체첸인 1만 4천 명과 잉구슈인들을 대량 처형했다. 스탈린은 수많은 사람들을 강제 수용소로 보냈다. 제2차세계대전 발발 후 스탈린은 소수 민족의 저항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1944년 체첸인 50만 명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이주 도중 3분의 1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

1957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체첸인들의 귀향을 허락했다. 이것은 추방당한 체첸인들이 가혹한 조건 속에서도 점점 단결했기 때문이었다. 체첸인들은 시베리아의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파업과 대규모 탈출을 감행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은밀하게 카자흐스탄을 떠나 체첸으로 돌아갔다. 1957년이 되자 이런 흐름은 당국의 탄압으로도 막을 수 없게 됐다.

1991년 세계 2위의 군사 열강 소련이 붕괴했다. 체첸인들은 70년 만에 자유를 찾을 수 있는 기회를 맞이했다. 체첸은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러시아 지배자들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이 지역을 완전히 포기할 리는 없었다. 러시아는 1994년과 1999년 두 차례에 걸쳐 체첸을 침공했다. 이 과정에서 체첸인들이 대량 학살당했다. 첫번째 침공에서 약 10만 명이 학살됐는데, 대다수가 민간인이었다. 당시 체첸 인구는 1백만 명이 채 안 됐다. 그러나 이 침공은 체첸인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1996년에 실패로 돌아갔다. 러시아는 이 때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999년 2차 침공을 감행해 지금까지 전쟁을 벌이고 있다.

당시 서방 정치인들은 러시아가 체첸의 도시들을 무차별 폭격하고 인권을 유린한 것을 공식적으로는 비난했다. 그러나 지난해 9월 11일 이후, 서방의 정책은 이러한 공식적 비난조차 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 푸틴은 부시의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해 준 보답으로 체첸 지배를 인정받았다. 체첸이 이슬람 국가이고 이슬람 사상이 확산돼 왔다는 점 때문에 서방은 더 쉽게 정책을 바꿀 수 있었다.

체첸 저항군들이 러시아의 도시들을 공격하는 전술은 러시아가 벌인 전쟁에서 비롯했다. 미국의 유고슬라비아 공격이나 아프가니스탄 공격에서와 마찬가지로, 러시아의 공격은 융단 폭격으로 시작했다. 체첸 전사들은 자신의 도시들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을 보면서, 러시아의 재래식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래서 체첸 전사들은 러시아 국경 내에서 민간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1차 침공 당시인 1995년 6월, 체첸 게릴라들은 러시아의 도시, 부돈노프스크에 있는 한 병원에서 1천2백 명을 인질로 붙잡고 인질극을 벌였다. 나흘 뒤, 러시아 특수 부대가 병원을 급습하려다 70명 가량을 죽였다. 그러나 체첸 전사들의 저항에 부딪혀 러시아 군대는 병원을 탈환하지 못했다. 이 작전이 실패하면서 결국 옐친은 치욕스런 양보를 해야 했다. 체첸에 휴전이 선언됐고 병원을 점령한 체첸 전사들은 인질을 풀어 주고 안전하게 러시아를 빠져나갔다.

이번 모스크바 극장 인질극 동안에 모스크바에서 체첸의 독립을 요구하는 작지만 중요한 시위들이 있었다. 러시아 징집병의 어머니들이 앞장서서 러시아의 체첸 철수를 요구했다. 푸틴은 이 시위들을 금지했다.

푸틴은 이번 인질극 사건에서는 어떤 협상도 거부했다. 서방의 체첸 전쟁 지지가 든든한 버팀목이 돼 줬기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체첸을 계속 점령하는 한, 이번 같은 참사는 다시 되풀이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