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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생성과 의식적 지도는 상호보완적이고 상대적인 관계다

일부 시위 참가자들은 방송차가 행진 대열을 지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방송차가 시위대의 자발성을 해친다는 이유에서다. 여기에는 누군가 지도(또는 주도)를 시도하면 필연적으로 대중의 자발성과 활력이 훼손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들은 자발성과 의식적 지도를 기계적으로 대립시킨다.

물론 누구나 인정하듯이, 촛불시위의 주요 특징 중 하나는 대중의 경이로운 자생성이다. 이 자생성은 운동의 자극제이자 강장제이며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이음매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대중의 자생성은 촛불 시위가 “배후 세력”의 “사주”에 의한 자의적 결과물이라는 이명박과 조중동의 어리석은 주장을 통렬하게 공박한다.

역사적 사건에 대중이 직접 개입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사회 변화 운동의 가장 분명한 특징이다. 평소 대중의 위에 군림하던 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보기에 저항 운동의 분출은 그저 “선동가들”의 “사주”일 뿐이다.

그러나 교육·의료·공기업 민영화 같은 신자유주의와 그 정책을 불변의 교리로 삼고 대중의 반대를 간단히 무지른 이명박 정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불만과 분노 때문에 청소년과 청년 들이 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이들의 결단은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 결과 대중을 하나로 단결시켜 거대한 저항 동력을 형성했다.

신비화

그렇다고 자생성을 신비화하는 것은 곤란하다. 순수한 자생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부 운동 참가자들이 자생성을 거의 절대화하다시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자생적 운동에 의식적 지도의 요소들이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가장 자생적인 운동이라는 것도 실상은 의식적 지도의 요소를 파악할 수 없거나 그 중 어느 하나(개인이든 집단이든 간에)가 유력한 것이 돼 있지 않은 경우를 일컫을 뿐이다.

촛불 시위를 망원경을 통해 보면 확실히 대중의 자생성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현미경을 통해 관찰해 보면 곳곳에서 의식적 지도의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이미 수많은 개인들이 연단에서 그리고 거리 행진 과정에서 운동의 진로와 효과적인 거리 행진에 대해 주장하고 있다. 경험, 비판, 주도성, 자기희생의 요소들이 운동 참가자들에 스며들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의식화돼 결정적으로 이 운동의 내적 동력을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또, 광우병국민대책회의가 시위 날짜·시간·장소를 정하고 정부의 거짓 선전을 비판하며 경찰 탄압 대처 요령을 제시하는 것도 의식적 지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광우병대책회의의 주도성에 수많은 사람들이 호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런 의식적 지도가 유효함을 증명한다.

물론, 1백 퍼센트 의식적으로 이뤄진 운동, 세세한 것까지 모두 사전에 계획된 운동, 또는 추상적 이론에 따라 전개된 운동만이 진정으로 가치 있다는 생각은 완전히 잘못됐다. 현실은 미처 생각할 수 없었던 결합물들을 다양하게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피스톤과 증기

그 반대로,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를 대립시켜 전자를 배타적으로 찬양하는 것은 이런 태도의 거울 이미지이다.

각자 알아서 실천하는 다양한 집단들이 각자 알아서 이명박 정부와 대항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높은 파도를 헤쳐 가는 배에 타고 있다고 치자.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불가피하게 지도(또는 그 권위)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사람들의 생명은 위기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유능한 사람들의 의지에 나머지 사람들이 즉각적으로 그리고 절대적으로 따를지 말지에 달려 있다.

이 비유가 거슬리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는 이미 여러 차례 순간적인 판단과 결정을 요구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바 있다. 우리가 거리 행진을 할 때, 갈림길이 나오거나 경찰 병력과 맞닥뜨렸을 때가 그런 경우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기업주 언론들조차 인정하듯이, 광우병 쇠고기만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의 다른 정책들 ― 대운하, 건강보험 민영화, 공공서비스 민영화, 한미FTA, 공교육 포기 등 ― 과 무엇보다 이명박 정부 자체가 대중적 공분의 표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촛불 시위의 새로운 국면이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운동은 이런 현실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운동은 누가(노동계급의 주도력 발휘), 어떻게(노동계급의 집단적 힘과 거리 시위를 결합시키기), 무슨 수단으로(기성 정당들이 아닌 대안적 정치 구조물) 이 중차대한 과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지도(또는 권위)는 절대악이고, 자생성(또는 자율)은 절대선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둘의 관계는 운동의 다양한 발전 국면에 따라 그 영역이 바뀌는 상대적 개념일 뿐이다.

지금 운동에게 필요한 것은 자생성과 의식적 지도를 대립시키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자생적’ 운동에 의식적 지도를 부여해 운동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려야 한다.

지도(와 그 조직)이 없다면 대중의 변화 열정은 피스톤 실린더 안에 들어가지 않은 증기처럼 사방으로 흩어질 뿐이다. 물론 원동력은 피스톤이나 실린더가 아니라 증기이듯이, 사회 변화 운동의 원동력은 대중에게서 나온다.

방송차 ― 운동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려는 노력의 일부 ― 가 “혼란”만을 낳는다거나 심지어 ‘물리력’으로 저지하려는 사람들은 의식적 지도의 요소를 깡그리 부정함으로써 이런 과제 수행에 장애물이 될 뿐이다.

이들이 자신들이 무엇을 주장하는지 모른다면 창조 없는 “혼란” 그 자체일 것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면 운동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지 간에 이들의 시도는 정부의 반동적 공세에 무기력하거나 심지어 이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