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정부 하의 “반자본주의”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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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부 하의 “반자본주의” 투쟁
반자본주의 투쟁은 세계 자본주의 반대 투쟁이다. 《공산주의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노동자 투쟁이 내용은 국제적인 한편, 형식은 “처음에 일국적”임을 지적했다(김태호 옮김, 박종철출판사 펴냄, 20쪽). 우리 나라의 반자본주의 투쟁은 언제나 그랬던 건 아니지만 흔히 두 가지 형태를 취해 왔다. 하나는 반미 운동으로, 특히 주한미군에 반대하고 흔히 포퓰리스트들이 지도한다. 다른 하나는 기업주와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공세에 저항하는 노동자 투쟁이다.
포퓰리스트들의 반미 운동은 전적으로는 아니지만 주로 학생 급진파들과 중간 계급의 급진화한 하층(전형적으로 농민)을 포함한다. 이 운동을 지지해야 한다. 이 점을 새삼스레 강조하는 이유는, 다른 학생 급진파들과 좌파를 자칭하는 사람들이 이 운동을 주체사상 지지자들이 지도한다 해서 그 의의를 깎아내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종파주의이다. 노동 계급만이 억압당하는 것은 아니다. 대다수 학생과 농민도 억압당한다. 레닌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노동 계급 외의 피억압자들이 벌이는 “민주주의 투쟁”의 의의를 역설했다. 반미 운동의 이데올로기를 이유로 그것을 기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의 일관성 결여와 협소함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주체사상 지지자들은 민족주의자들답게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존재에만 반대하므로, 미국이 세계의 다른 곳(가령 이라크)에서 저지르는 침략 행위에 반대하는 것에는 그다지 열의가 없다. 전술이 뭔지 아는 좌파라면 이러한 진공을 메우기 위한 발의(공동전선)를 하고 그것을 이끌어야 한다.
노동자 투쟁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효과(대량 해고, 노동 강도 강화, 임금 억제 등)에 반대해 왔지,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민영화” 반대는 약간 다르다. 자본주의가 사유 자본주의 또는 시장 자본주의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협소하게 이해되고 있는 게 통념인 상황에서 “민영화” 반대는 자본주의 반대를 함축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국제통화기금 관리 하의 1998년 공황기에 민주노총 총력 파업들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는데, 그 때 “신자유주의”는 그저 정부 정책이나 기업 방침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현행의 자본주의 자체를 뜻하는 듯했다.
비록 거의 모두 자본주의 자체가 아닌 그 효과에 반대하는 것이었을지라도, 노동자 투쟁은 파업의 형태를 취한다면 자본주의의 심장인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효과를 낸다. 게다가 경제 공황기의 노동자 파업은 일반화한 계급 투쟁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있다. 노동자 계급 일반으로 확산된 그러한 투쟁은 혁명에 못 미치는 것임에도 조만간 국가 권력 문제를 제기하는 경향이 있다.(가령 1968년 5월 프랑스 총파업이나 1980∼81년 폴란드 연대노조 총파업이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우리 나라의 반자본주의 운동이 시애틀·프라하·제노바·세비야·피렌체의 형태를 취했던 경우가 한 번 있었다. 2000년 10월 20일 아셈(아시아 유럽 정상 회의) 반대 시위였다. 이 운동이 노동자 파업이 아니었음은 말할 나위 없지만, 노동조합(주로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주된 참가자였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노조 소속 노동자들로서도 다른 피억압 사회 집단과 만나고, 그들의 요구와 염원을 접하게 되고, “이윤보다 사람이 먼저다”,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 등의 구호로 집약된 반자본주의 사상과 마주치는 건 교육적이고 유익한 경험이다. 전투성을 제외하고 노동조합 지상주의적 유산을 던져 버릴 필요가 있는 이 나라 노동자들에겐 특히 그렇다.
전투성
방금 나는 전투성은 버리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전투성은 중요하다. 두 가지 대조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사례는 1998년 현대차 노조 파업이다. 김대중은 1997년 말 경제 공황의 여파 속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군부 정권에 맞섰던 야당 지도자로 알려져 있는 그에게 노동 계급 대부분이 큰 기대를 걸고 환상을 가지는 건 자연스런 일이었다. 하지만 지배 계급 쪽에서 봤을 때 그는 아래로부터의 저항을 통제해야 할 위기 관리 대리인이었다. 취임 첫 반년 간 그는 대량 해고를 성공적으로 밀어붙였고 노동자들은 얼떨결에 당했다.
하지만 1998년 8월 김대중은 주된 저항에 부딪혔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를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나섰다. 그들에게는 강력한 노조 조직과 전투적 전통이 있다. 그들은 공장을 점거했다. 그들은 경찰 공격에 대비해 가슴에 식칼을 품고 연좌했다. 전경 부대들은 노동자들의 이 투지에 겁먹어 위축됐다. 노동자들의 아내와 자녀들도 귀가하지 않고 아빠와 함께 연좌했다. 지금 금속연맹 상근 간부인 아무개 씨는 후일 모여대에서 열린 한 사회학 토론회에 초청자로 나와 당시의 열기를 회고하면서, 자신은 경찰보다 노동자들이 더 무서웠다고 말했다.
현대차 노조의 공장 점거는 지도부의 소심함과 동요 때문에, 승리를 거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정리해고를 완전히 막지는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해고 규모를 대폭 줄일 수 있었다. 당시의 구체적인 계급 세력 저울을 고려한다면 선방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자들은 국제통화기금과 신자유주의에 맞서 싸울 수 있음을 깨달았다. 다만, 심각한 경제 위기의 시기에 대량 해고에 직면한 노동자들은 “불법”일지라도 공장 점거말고는 일자리를 지킬 다른 방도가 없다.
현대차 노동자 투쟁은 그와 거의 같은 때 일어난 러시아와 브라질의 외채 상환 불능 사태와 함께 김대중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 대폭 수정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1998년 당시 세계은행 부총재였던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한국이 IMF의 정책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덕분에 경제 공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지적했다(《세계화와 그 불만》, 세종연구원 펴냄, 220쪽). 이것은 우익과 자유주의자들의 공통된 볼멘소리에도 불구하고 노동자 투쟁이 경제 위기의 진정한 해결책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둘째 사례는 노동자들이 전투적 전술의 채택을 망설임으로써 패배한 부정적 사례이다.
김대중 취임 3주년 기념일인 2001년 2월 25일, 민주노총은 김대중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뒤이어 대우차 노조가 해외 매각 반대 시위를 벌였다. 김대중 정부는 “불법” 파업을 계획하는 것 자체도 “불법”이라며 테러 진압 특수 부대를 시켜 선제공격을 했다. 대우차 노조는 좀더 일찍 파업에 돌입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꾸물거릴 여유가 없이 한시가 바빴는데도 굼떴다. 노조 지도자들은 특히 공장 점거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
결국 해괴한 상황이 벌어졌다. 경찰이 공장을 점거하고 노동자들이 공장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는 상황 말이다. 물론 나중에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공장 출입을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이것은 항복 후 작업 복귀였다.
정부는 자신만만해져 맹렬하게 노동자들을 공격했다. 설상가상으로 포퓰리스트들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김대중 퇴진이라는 “무모한” 발상을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그 덕분에 정부는 더욱 자신만만해졌다.
그러나 4월 중순쯤 정부는 무리를 하고 있었다. 공장 출입을 요구하며 농성하는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항의하던 민주노총 소속 변호사를 경찰이 구타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항의 운동이 물결쳤다. 민주노총 총력 파업이 7월 초에 벌어질 것이라고 예고됐다. 그러나 내가 이 잡지의 다른 글(‘김대중 정부 하의 남북 관계’)에서 말했듯이 포퓰리스트들과 민주노총 지도부가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민화협과의 공동 행사를 위해 김대중 정부와의 충돌을 피하고 싶어했기 때문에 이 파업은 시작되기도 전에 취소됐다.
전망
그러므로 전투성뿐 아니라 정치도 중요하다. 물론 필요한 정치는 계급 정치이지, 포퓰리즘 정치가 아니다. 그러나 이 나라 노동자 의식의 초기 발전 단계에서 노동자 운동의 정치는 포퓰리즘이기 쉽다. 이것은 민족 분단, 미국의 지배적 영향력, 근래까지 군사 독재를 경험한 것, 정치적 억압의 지속 등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다.
노동자 운동에서 아직도 포퓰리즘이 유력하다 보니 포퓰리스트인 노무현이 권영길 후보보다 훨씬 더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빈부격차 심화로 대표되는 계급 양극화와 그에 따른 (좌우) 정치 양극화가 계속되면 좌파 정당인 민주노동당의 입지는 더 강화될 것이다. 특히 경제의 상태가 열쇠인데, 내년부터 경제가 다시 나빠지면 경제와 정치의 양극화가 심화돼 이런 추세는 더욱 속도가 붙을 것이다.
기업주들은 내년 경기 전망을 그다지 밝지 않게 보고 있다. 달러화에 견준 원화 가치 상승은 수출 가격 인상을 불러 수출품의 가격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부동산 가격과 주식 가격에 거품이 있다. 저금리 덕분에 중간 계급 상층이 은행에서 대출해 아파트 등 투자에 열심이었던 탓이다. 가계 부채 과다로 인한 신용 불량자가 급증하고, 이에 따라 은행이 대출을 규제하면서 소비 지출이 줄고, 그래서 거품도 꺼져 가고 있다. 이처럼 경제 전망이 밝지 않으므로 기업들은 실제로 투자하기보다는 그냥 자금(은행에서 대출한)을 비축하고 있다.
정부의 경제 정책도 중요하다. 경제 정책이 시장주의적일수록 빈부격차 심화와 양극화가 심화될 것이다. 그밖에 미국의 영향력도 일정한 역할을 하고, 다른 변수들(정치의 부패 정도, 탄압 수준 등)도 역할을 한다.
이제 노무현은 자본가들이 노동 계급에 대한 공세를 통해 자신들의 경제적 곤란을 노동 계급에 전가하는 것을 도와 줘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집권한 노무현은 김대중과 똑같은 처지일 것이다. 〈한겨레〉처럼 말하고 〈조선일보〉처럼 행동하는 것 말이다.
좌파는 때때로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곤 한다. 1968년 프랑스의 “5월 반란” 전야에 〈소셜리스트 레지스터〉 지의 앙드레 고르즈는 노동자 대중이 총파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세계 경제의 위기, 미국의 전쟁 몰이, 정치의 혼돈과 위기, 반자본주의·반전 운동의 성장, 라틴아메리카 등 일부 지역의 휘발성 강한 불안정 등 때문에 어쩌면 제2의 1968년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전망은 결코 사변이 아닐 수도 있다.
최일붕
김대중 정부의 남북 관계
미·소 간 냉전이 끝났는데도 한반도에는 봄이 오지 않고 있다고 탄식하는 소리를 가끔 듣는다. 미국 탓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미국은 이렇게 행동하는가?
1989년 동유럽에서 스탈린주의 제도가 붕괴하고 세계 규모에서 냉전이 끝난 후 한반도는 오히려 불안정해졌다. 그 전에는 미국과 옛 소련이 각자 자신의 진영을 단속했다. 이제 양대 초강대국 제국주의 시대가 끝나자 세계는 더 위험해졌다. 1991년 걸프 전쟁, 1995년 보스니아 전쟁, 1999년 발칸 반도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다가올 이라크 전쟁이 이를 예증한다. 한반도도 1994년 6월에 전쟁 일보직전으로 치닫는 듯한 위기를 겪었다. 당시 미국 대통령 클린턴이 북한 핵 사찰을 빌미로 일본과 중국에 미국의 맹주권을 분명히 해 두려 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12월 10일에 미국이 예멘 인근 해역에서 북한 선박을 나포하고 다음 날 북한이 핵 시설 동결을 해제하겠다고 선언한 사건도 이런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올해 6월과 1999년 6월의 서해교전도 미사일과 “핵무기” 제거를 핑계로 북한을 압박하며 동북 아시아에서 자신의 헤게모니를 재천명하려는 미국에 북한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이었다. 자신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며 심지어 “선제공격” 가능성을 얘기하기까지 하는 부시에게 김정일은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러한 탈냉전기의 불안정한 세계 속에서, 게다가 미국의 대북 압박이라는 조건 하에서 김대중의 대북 정책은 모순으로 가득 찰 수밖에 없었다. 동해에서 여객선이 금강산을 왕래하고 있는 동안 서해에서 서해교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햇볕 정책” 하에서 무기 구입을 위한 예산이 급속히 증가해 왔다. 남북 정상 회담과 6·15선언의 해인 2000년도 군사 예산은 전년도에 비해 21퍼센트 증가했다. 그리고 김대중은 미국의 미사일 방어(MD) 체계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미국제 첨단 무기를 10조 원어치나 구입했다.
세계적 불안정과 미국의 대북 압박에 더하여 국내에서 우익의 압력이 있었다. “북한의 위협” 운운하는 선전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우익은 이데올로기 위기를 걱정하고 있다. 김대중은 우익의 마녀 사냥에 직면할 때면 언제나 스스로 좌파를 마녀 사냥하는 것으로 대응해 왔다.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다.
적대적 공생 관계
“두 개의 한국”이 언제나 갈등을 빚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둘은 야합도 했다. 가장 가증스런 사례는 “총풍”이라고 특별히 부르는 사건이었다. 1996년 4월 11일 총선 직전 판문점에서 북한 병사들이 갑자기 남쪽을 향해 사격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현 한나라당)의 은밀한 요청에 북한 정권이 응답해 일어난 일이었음이 1997년 말에 밝혀졌다. 그 뒤로 남쪽 정권의 요청에 따른 북쪽 정권의 위협적 행위를 가리켜 일반으로 “북풍”이라고 일컫게 됐다.
15대 대선이 있었던 1997년 12월에도 안기부(현 국정원)는 북한 정보 기관과 합작해 당시 야당 지도자 김대중의 낙선을 위한 음모를 꾸몄다. 안기부는 “총풍”을 재연해 달라고 북한쪽 보안 기관원들에게 요청했던 것이다.
흔히들 그러하듯이 북한을 사회주의 사회의 한 형태 또는 모종의 노동자 국가로 본다면, 왜 두 개의 한국이 이처럼 칼 마르크스가 “서로 싸우는 형제”라고 부른 것(자본가들)처럼 행동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자본가들은 서로 경쟁하고 으르렁거리지만 노동 계급의 주요 저항에 직면해서는 기꺼이 서로 협력하곤 한다. 북한은 남한과 꼭 마찬가지로 민중을 억압하고 노동 계급을 착취하는 국가자본주의 국가이다.
분단과 좌파
분단이 남한 좌파에 미친 효과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남한 좌파의 다수는 포퓰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이다.(포퓰리즘은 “국민”의 이익과 의견·정서에 충실함을 표방하는 정치 사상과 정치 활동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지배 계급 쪽에서 봤을 때는 대중[인기] 영합주의이고, 노동 계급 쪽에서 보면 사회 최상층만을 배제한 계급 협력주의이다.) 포퓰리스트들은 김대중이 북한에 화해적이고 협력적인 정책을 추구하려 애쓰는 듯하다 해서 그를 공격하는 것을 기피해 왔다. 김대중은 이를 이용해 투쟁 노동자들과 다수 좌파(포퓰리즘적인)를 이간함으로써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려 해 왔다.
한 가지 사례는 2000년 여름 민주노총 투쟁이었다. 수천 명의 사회보험노조원들과 롯데 호텔 노조원들이 작업장을 점거하고 연좌 농성하다가 6월 29일 테러 진압 특수 부대에 의해 강제 해산당했다. 진압 과정에서 야만적 폭력이 난무했음은 물론이다. 이 사건은 남북 정상 회담과 6·15공동선언 직후에 일어난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직장 이탈 파업과 7∼8월 거의 매일 서울 시내 중심지를 행진하는 것으로써 저항하고 항의했다. 8월 15일 김대중 정부는 민화협 축제 행사를 개최했다. 이 행사 참가 여부를 둘러싸고 좌파가 내분했다.
비슷한 사태가 2001년 7월에도 재연됐다. 그러나 전해와 달리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투쟁을 중단했다. 민주노총 안팎의 포퓰리스트들이 민주노총 지도부에 압력을 가해, 8월 평양 방문을 앞두고 괜시리 말썽피우지 못하도록, 정부가 물러설 때까지 끝까지 싸우지 못하도록 싸움을 말리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은 정부와 공동으로 민화협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으므로 이렇게밖에 처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최근 사례는 노무현 지지를 위해 일부 주체사상 지지자들이 투표일 며칠 전에 발표한 권영길 후보 사퇴 촉구 성명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남북 화해가 계급 투쟁에 선행해야 한다.
이것은 스탈린주의의 2단계 변혁 이론과 민중전선(국민 연합) 전략과 관계 있다. 변혁 단계 이론에 따르면 민족 해방이 먼저 오고 사회주의적 변혁은 그 다음에 와야 한다. 우리 민족의 경우 민족 해방은 민족 통일을 뜻한다고 주체사상 지지자들은 말한다.
인민 전선 전략의 경우는 어떤가? 주체사상 지지자들은 민족 화합적 자본가들과 냉전적 자본가들을 구별한다. 놀랍게도, 죽은 정주영과 도망중인 김우중이 민족 화합적 자본가에 포함된다. 현대와 대우가 북한에 투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주영이 죽었을 때 한총련 지도자들은 조문을 가기까지 했다. 이런 종류의 자본가들과 동맹함으로써 이회창과 〈조선일보〉 같은 냉전 우익에 대항하려 함에 따라 주체사상 지지자들은 노동자 투쟁을 외면하고 때로는 2001년 7월에 그랬던 것처럼 심지어 파업 파괴자 구실까지 해야 한다.
탈북자
탈냉전기의 가장 독특한 현상은 탈북자이다. 탈북자 문제는 동북 아시아 국가들에 정치적으로 “뜨거운 감자”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미국에도 뜨거운 감자다. 미국 의회는 지난 6월 중국 정부의 탈북자 정책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것은 순전한 위선이다. 미국 정부는 지난 5월 탈북자 9명의 난민 신청을 기각했다. 국무부는 이미 미국 안에 있거나 국경에 있는 사람들만이 망명 신청을 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것은 사실상 탈북자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당시 의회는 행정부의 이러한 조치에 철저히 침묵했다.
믿을 만한 추산에 따르면, 탈북자가 적어도 30만 명이 중국에 있다 한다. 이들은 1995년 이래로 북한 민중 1백만 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을 피해 가까스로 국경을 넘은 사람들이다. 안타깝게도 남한 좌파는 대부분 탈북자를 환영하지 않고 있다. 주체사상 지지자들은 탈북자들이 “사회 부적응자”라는 북한 지배 관료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다른 사람들은 탈북자를 무조건 환영하면 남한이 그들로 “넘쳐날지도” 모른다는 정부측 주장을 받아들인다. 전임 정부처럼 김대중 정부도 탈북자 입국 규제 정책을 채택하고 있다. 중국 정부도 탈북자를 골칫거리로 여긴다. 일본 정부는 가장 엄격하게 입국을 통제하고 있는데, 만일 탈북자가 대량으로 발생한다면 일본 정부는 그것을 “유사시”로 규정하고 “자위대”를 한반도에 파견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는 국제 노동 계급 단결의 원칙에 따라 모든 탈북자의 난민 수용을 요구해야 한다. 더러 황장엽 같은 자가 포함되면 그럴 수 없지만 말이다.
최일붕
김대중 정부의 경제 정책
새로 집권한 정부는 김대중 집권 5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김대중이 김영삼의 전철을 밟았듯, 차기 정권의 대통령은 김대중 정권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김대중 집권 5년은 신자유주의 정책의 한계가 무엇인지 보여 준 나날들이었고 노무현도 시장 위주의 정책을 펴려 한다.
김대중은 집권하자마자 IMF의 요구에 순순히 굴종했다. IMF가 요구하기도 전에 먼저 자본 자유화 조치를 시행함으로써 자신이 명실상부한 IMF의 모범생임을 유감 없이 보여 주었다. IMF의 주문에 따라 금리는 30퍼센트대까지 뛰었고 IMF의 주문대로 기업 퇴출 정책도 진행됐다. 1997년 말에는 종합금융사들이 대거 퇴출되고 1998년 6월에는 55개 기업과 5개 은행이 폐쇄됐다. 노숙자들과 실업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일련의 긴축 정책과 퇴출 정책으로 표현된 신자유주의는 경제를 살리기는커녕 한국 경제를 더 곤두박질치게 했다. 경제성장률은 -6.7퍼센트까지 내려갔다. 집권 초기에 김대중 정부는 우선 현금을 만지고 보자는 생각에서 해외 매각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해외 매각의 결과는 비참했다. 제일은행은 공적자금을 16조 원 넘게 투입하고 뉴브리지 캐피털에 단돈 5천억 원을 받고 팔았다. 대우차는 어떤가? 12조 원 가치의 회사가 1조 원도 안 되는 가격에 팔렸고 18조 원의 부채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 됐다. 그런데도GM은 법인세·취득세·지방세 감면 혜택까지 받았다.
그러다 1998년 중반 이후부터 IMF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단골 메뉴인 초고금리 정책은 수정되기 시작했다. 6월 단기금리는 30퍼센트에서 15퍼센트로, 콜금리도 28퍼센트 수준에서 15퍼센트로 하락했다. 김대중 정부가 IMF 긴축 정책 위주에서 경기부양책 쪽으로 움직인 주된 이유는 “초고금리 정책이 극심한 경기 침체를 동반하자 대내외적 비판이 거세어졌기 때문이다.”(《동향과 전망》, 2002년 봄호.) 무엇보다 1998년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투쟁이 정책 전환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스티글리츠는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한국 정부가 IMF의 충고를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 붕괴를 피할 수 있었다고 말했는데, 김대중 정부가 그렇게 한 이유는 그 자신이 IMF의 정책에 반기를 들어서가 아니었다. 긴축정책에 반대하는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압력 때문이었다.
4대 부문 구조조정의 결과
김대중 정부는 사기업화가 경제 살리기 해법이라는 주장을 신앙처럼 내세웠다. 그러나 사기업화가 더 낫다는 증거를 찾기는 쉽지 않다.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서비스 질 악화, 공공요금 인상이 불가피하다. 이미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공공요금은 9.5퍼센트나 껑충 뛰어 올랐다. ‘물가인상률 3퍼센트 안정’이라는 말도 순전한 거짓말이다. 2001년 12월까지 공기업 6개가 사기업이 됐으며 2002년 현재 5개 공기업에 대한 사기업화가 진행되고 있다. 김대중은 1980년대 영국 총리 마거릿 새처가 10년 동안 밀어붙인 사기업화 기간을 4년으로 단축하려 하다가 철도·발전·가스 노동자들의 파업에 걸려 넘어져 뒤뚱거리고 말았다. 결국, 철도 사기업화는 차기 정권의 몫으로 남았다. 누가 당선되든 그는 철도 노동자들의 강한 반발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기업 구조조정은 어떤가? 김대중 정부의 관료들이 자신있게 내놓은 기업 구조조정 프로그램인 워크아웃은 시작한 지 1년도 안 돼 실패로 판명났다. 워크아웃 자금을 받은 기업들은 그 돈을 엉뚱한 돈 잔치에 썼다. 예컨대 동아건설은 워크아웃 자금을 정치인들에 대한 로비 자금으로 썼다.
재벌 개혁은 변죽만 울리다 끝났다. 김대중 집권 재벌 총수의 소유지분율은 더 강화됐다.2001년 4월 현재 3대 그룹의 자산증가율은 IMF 구제 금융 직전인 1997년에 비해 49.8퍼센트나 늘어났다. 부채비율을 2백퍼센트로 줄이는 정책도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부채를 줄이기보다 유상증자를 통해 자산을 불려 형식으로만 부채 비율을 줄이는 식이었다. 김대중은 대중의 반재벌 감정을 정권 유지에 이용하려고만 했을 뿐이다.
빅 딜 정책도 마찬가지다. 빅 딜은 재벌들 사이의 사업 맞바꾸기를 통해 과잉 중복 투자를 줄인다는 취지를 표방했다. 그러나 기업 재산의 내용이 투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맞바꾸기가 불가능하리라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일련의 재벌 개혁 프로그램의 실패는 자본주의적 국가가 대기업의 이익을 거슬러 행동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보여 준다.
1차 금융 구조조정은 전혀 금융 부실을 해결하지 못했다. 되레 부메랑 효과만을 냈다. 예컨대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다섯 개 은행을 퇴출하자 순식간에 은행에서 빠져나간 돈은 투자신탁회사들로 몰렸고 수익률 경쟁 압력은 고금리의 대우 채권 매입으로 이어졌다. 대우그룹의 파산은 채권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었고 투신사들의 급작스런 부실은 은행 부실로 이어졌다.
2차 금융 구조조정의 핵심은 은행 합병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은행 대형화”만이 살 길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금융 부실은 기업 부실의 결과다. 따라서기업이나 가계의 부실을 은행이 떠안게 되면 금융 공황은 언제든지 다시 찾아올 수 있다. 다른 구조조정이 그렇듯이 은행 합병도 인원 감축을 뜻했다.김대중 정부는 1998년 5월 다섯 개 은행을 퇴출시킬 때 절대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약속한 P&A, 즉 고용 승계 의무가 없는 자산 부채 이전 계약 방식을 은행 합병에 동원했다.
깨진 독에 물 붓기 식이던 공적자금 문제는 또 어떤가? 김대중 정부는 총 2백조 원의 공적자금을 썼다. 금융 구조조정에 막대한 돈을 퍼부었지만 금융권 전체의 부실 채권은 더 늘어났다.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희생만 강요했을 뿐이다. IMF 구제 금융 3년 만에 기업당 평균 노동자 수는 위기 직전인 1996년 말에 비해 비재벌 기업의 경우 5.6퍼센트, 재벌 기업의 경우에는 30.3퍼센트나 줄었다.
한 마디로 김대중 집권 5년의 구조조정은 이런 교훈을 남긴다. 제대로 성공하기도 어렵고 된다 해도 노동자 목자르기로 끝나는 구조조정을 위해 왜 압도 다수가 희생해야 하는가.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
김대중 집권 5년은 신자유주의자들의 대의명분인 정부의 개입 축소가 실제 자본주의 현실과는 사뭇 다른 미사여구였을 뿐임을 입증한다. 금융강도위원회는 동아건설에 1조 원에 이르는 협조 융자를 해 줬고 대우의 부도를 막으려고 금융기관의 창구를 일일이 지도했고 현대의 파산과 하이닉스를 위해 구원 투수 노릇을 자처했다. 구원 투수 노릇은 정경유착으로 이어져 비리 사건의 기록 갱신 행진이 이어졌다. 벤처 육성, 주가 조작, 대통령 아들들, 검찰, 국정원 …. 이것들은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벌어진 일련의 비리 사건들을 요약하는 코드명이었다.
집권 5년 동안 김대중 정부는 부자들을 위한 정책 펴기에 여념이 없었다. 각종 법인세와 양도소득세 감면은 그런 정책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민주당이 만들고 한나라당이 통과시켜 준 경제자유구역법도 부자들을 위한 정책이기는 마찬가지다. 기업주들은 외국 자본과 10퍼센트만이라도 연결돼 있다면 노동기본권·환경·보건·사회복지·안전기준 같은 “의무 이행” 조항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반면, 김대중 집권 5년 동안 빈부격차는 더 심해졌다. 상위 10퍼센트의 소득은 30퍼센트 늘어났지만 하위 10퍼센트의 소득은 겨우 3퍼센트 늘어났을 뿐이다. 상위 10퍼센트와 하위 10퍼센트의 소득 차이는 김대중 집권 전 7배였지만 지금은 9배로 늘었다.
미친 듯이 질주하는 시장주의 정책, 이윤 중심주의가 낳는 단기적이고 근시안적인 시각과 대처, 부자들을 위한,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의 정책. 이것들과 단절할 때 우리 모두 김대중 정부의 시장경제 망령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다.
김어진
김대중 정부의 인권 점수
이번 12월 10일은 세계인권선언 54주년 기념일이다. 국가인권위원회, 대한변호사협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등은 잇달아 인권 보고 대회와 토론회를 개최하고 인권선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인권선언 1조 “모든 사람은 날 때부터 자유롭고 동등한 존엄성과 권리를 가지고 있다”―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이 말에 대해 감히 반대할 용기를 가진 자가 있을까?
아니 있었다. 인종 청소를 감행한 나치와 종군위안부로 우리 할머니들을 끌고 간 일본 제국주의! 그 악성 바이러스들은 지구상에서 사라졌는가? 불행히도 변종 바이러스들이 합리적 보수, 민족주의 등의 숙주를 매개로 끊임없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들의 실체가 보인다.
이렇게 인권선언 54주년을 맞아 각종 기념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가운데 자랑스런 대한민국에선 국가보안법이 54번째 생일상을 먼저 받았다.(세계인권선언은 1948년 12월 10일에, 국가보안법은 그 보다 9일 앞선 12월 1일 만들어졌다.)
당연히 폐기돼야 할 국가보안법이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고 55살을 먹어가고 있다. 국가보안법 55년의 역사를 세세히 살펴볼 필요는 없다. 국가보안법에 의해 빨갱이로 몰려 생명을 잃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빨갱이로 조작되는 과정에서 고문당하고 직장을 잃고 가족을 잃은 사람들은 그 얼마나 될까. 그들 모두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이었다. 국가보안법 55년은 국민들의 피와 한의 역사였다. 그리고 강요된 반공 이념에 짓눌린 창백한 우리 강박관념의 역사였다.
김대중 대통령은 인권 대통령을 표방했다. 재임중 인권 상황에 대해 복잡하게 여러 분야를 훑어볼 여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당연히 폐기해야 할 국가보안법으로 얼마나 많은 국민들을 잡아들였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국가보안법 적용 사례는 인권 상황에 대한 리트머스지이기 때문이다.
굳이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 정권 시절로 되돌아갈 필요도 없다. 김대중 정권과 김영삼 정권의 차이만 살펴봐도 되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 5년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국민은 모두 1천9백77명이다. 김대중 정권 4년 10개월간 구속된 국민은 1천36명이다. 수적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1년 평균 2백명이 넘는 국민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된 것이다. 이른바 빨갱이라는 이유로. 아니 빨갱이로 몰려서.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선고 결과 형량이 어떠했는지 살피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을 폐지한다, 대체입법을 하겠다고 공약하더니 노벨상을 타고도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아예 그러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단지 상징적인 두 가지 사례만 짚어 보기로 한다. 김영삼 정권이 정치적 위기에 몰려 한총련 전체를 이적단체로 몰아 대대적으로 탄압했다. 김대중 정부는 이러한 잘못조차 바로 잡지 못하고 그대로 답습했고 한총련이 정부에서 꼬투리잡던 강령을 고쳤는데도 요지부동이다. 그리고 대의원들의 탈퇴를 강요했다. 한총련은 이적단체다. 한번 이적단체이면 영원한 이적단체다.(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그러므로 대의원 등 간부가 되면 이적단체구성죄다. 이러니 해마다 한총련 출범식 후 경찰은 바빴다. 전국 각지의 대공경찰들이 발 벗고 나서 대의원 부모들을 붙잡고 입에선 침이 튄다. 대부분 부모들은”어렵게 대학 보냈는데 빨갱이 만들어 큰일”이라는 형사들의 말에 하늘이 무너진다. 노랗다. “내 아들이, 내 딸이 빨갱이라니.” 급기야 시골 작은 마을에 소문이 퍼진다. “아무개가 대학 가더니 빨갱이가 되었다네”. 도저히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 형사들을 따라 자식 잡으러 다닌다. 그리고 운 좋게 잡으면 농약병을 자식 얼굴에 들이대고 “애비 죽는 꼴 볼 테냐, 탈퇴해라”고 한다. 실화다. 한총련 대의원 탈퇴 공작이란다. 일제도 독립 운동을 하던 학생들 조직 전체를 치안유지법으로 얽어 넣지는 않았다. 이승만은 물론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등 군사 독재자들도 전국 학생 조직을 이적단체로 몰아본 일이 없다. 그런데 문민 정부 김영삼 대통령께서 이적단체로 올가미를 씌워 버렸고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이 그 올가미를 끌고 다닌 것이다.
최근 검찰은 전상봉 한국청년단체협의회 의장 등 3명의 한청 간부를 이적단체구성죄로 구속 기소했다. 한청의 강령을 보면, 올바른 세계관·인생관을 확립하고 노동 생활에 바탕한 정서 함양, 민족 문화 창조에 앞장선다는 것과 민족의 자주권을 회복하고 6·15 공동선언을 지지·이행하여 통일 운동을 한다는 내용으로 돼 있다. 강령 어디를 보아도 이적단체로 볼 근거는 없다. 그리고 한청은 전국 53개의 지역·부문 단체들이 모인 단체이다. 그 회원들이 모두 이적단체 구성원으로 처벌될 수 있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대의원 등 간부는 언제라도 국가보안법의 촉수가 뒤통수를 노리는 불안한 생활을 해야 한다. 문민정부가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몰았는데 또 무엇이 부족해 국민의 정부는 한청을 이적단체로 단죄하려는 것인지 아연할 따름이다.
국가보안법 폐지의 가장 강력한 반대 논리는 국가 안보다. 그러나 국가안보의 기초는 총칼의 무력이나 국민들에 대한 억압이 아니다. 국가의 인권 보장과 국가 권력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다. 마키아벨리즘이라는 정치 용어를 만든 마키아벨리도 “제 아무리 많은 성을 쌓는다 해도 국민들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국가는 모래 위의 성과 같아 순식간에 무너지고 만다”고 했다. 그리고 드넓은 중국 대륙을 통일한 진시황이 유학자들을 생매장시키고 책을 불사르며 만리장성까지 쌓았음에도 그가 죽자 진나라는 곧 망하고 말았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다. 민심은 천심이다. 지난 55년간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 원한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젠 더 이상 억울한 희생자가 없어야 한다.
다 그만두고 국가보안법을 휘두른 일만 가지고 김대중 정권에게 인권 점수를 얼마나 주어야 하는가. 여러분들이 채점해 주기 바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붉은 악마’가 6월에 시청 앞 과장을 붉게 물들였고, 미선이 효순이를 추모하는 겁 없는 시민들의 촛불이 광화문 네거리 반딧불로 내려앉았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런데도 대통령 선거를 코 앞에 둔 지금, 어느 후보가 국가보안법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보이고 어떤 약속을 국민들에게 하고 있는가. 결국 사람 대접은 받고 싶은 우리들이 가려낼 밖에.
쭉정이인지, 알곡인지.
이덕우 - 민변 회원, 민주노동당 인권위원장
김대중 정부의 노동 정책
21세기를 맞이한 우리 나라의 노사관계가 1970∼1980년대의 노사관계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평가가 많다. 더욱이 억압적인 노사관계의 관행으로 지탄의 대상이 된 노동자 구속과 파업 현장에 경찰력을 투입하는 일이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아니, 현 정권에서 구속된 노동자 숫자가 과거 정권보다 더 많다는 사실이나 아직도 파업 현장에 경찰력을 투입하고 구사대를 동원하는 구태의연함이 여전해 노사관계가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는 비난을 면치 못하고 있다.
민주화와 새로운 노사관계를 내세우며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노동 정책이 왜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을까? 김대중 정권은 2·6 노사정합의를 추진하고 노사정위원회를 만드는 등 노사관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도입하려는 모습을 보였으나 경찰력과 사법적인 대응으로 노동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어 여전히 노동 배제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면 김대중 정부의 노동 정책이 과거에서 탈피하지 못한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에 대한 대답은 김대중 정권 출범 초기 경제 위기와 구조조정의 폭풍 속에서 현 정부가 선택한 노동 정책의 방향에서 찾을 수 있겠다. ‘시장 경제로의 이행’이라는 새로운 사회 모델을 형성해 가는 정치·경제적 이행 과정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던 구조 개혁 시기에 김대중 정권이 언급한 ‘민주주의’를 노동 문제에서 실현하려는 의지가 있었다면 노동과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기 위해 미래 지향적이고 적극적인 노동 정책을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권은 이러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위기 상황에서 노동 억압적이고 노동 배제적이던 과거의 노동 정책에서 탈피해 노동 정책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기회가 없지 않았는데도, 김대중 정권은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하려 노력하기보다는 노사관계를 위기 국면에서의 구조조정에 대한 갈등 관리라는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음이 역력했다. 그리고 김대중 정권이 택한 일련의 정책은 노사관계 패러다임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라고 할 수 없으며 위기 국면에서의 상황 대처적 성격을 가진 소극적 정책을 구사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권의 이러한 선택은 김대중 정권의 노동 정책 전반에 나타나게 된다. 김대중 정권이 경제 위기 국면에서 가장 먼저 추진한 정리해고법과 파견법 등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에서 김대중 정권의 노동 정책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노동시장 유연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정권은 노동과의 협상을 통해 추진하는 듯한 외양을 갖추고 있었으나 실제 적용 과정은 노동의 반대와 저항을 뚫고 추진되는 돌파형이었다. 정리해고법이 국회를 통과한 후 정리해고에 대한 정권의 대응은 노동을 참여시키는 진정한 의미의 대화와 타협과는 거리가 있었다. 정부가 원한 것은 노동과의 대화와 사회적 합의에 의한 새로운 노사관계에 있다기보다는 노동계가 정리해고를 수용했다는 정치적 성과를 챙기는 것이었던 셈이다. 노사정위원회도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시스템으로 제도화하려는 노사관계 전반에 대한 전략에 근거했다고 하기는 어렵고 위기 국면을 탈출하는 위기 관리 기구로서의 임무가 중심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또, 경제 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한 노동 시장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관계 제도의 변화가 절실했는데도, 실업자 조합원 자격·노조 전임자 임금·복수노조·산별노조 강화를 위한 제도와 행정적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노동 시장과 노사관계 시스템의 부조화가 심각해지는 문제를 낳고 있다. 급격한 노동 시장 유연화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크게 늘어나는 등 기존 노사 관계 제도의 범위에 포괄되기 어려운 노동자들이 대거 출현하게 되었다. 정규직 중심의 노사 관계 제도가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정규직 노동자들과는 다른 형태의 고용 상태에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조직하거나 노동조합 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일부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아예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아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또 다른 노동자들은 고용의 불안정 등 노동 시장에서 지위가 현저히 불안해 노동조합을 조직해 노동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실정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3권의 보호 범위 밖에 방치되고 있다. 또, 실업자 조합원 자격이 인정되지 않고 있으며 복수노조가 여전히 금지되고 있어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권을 침해받고 있다. 더욱이 구조개혁 프로그램을 IMF가 주도하면서 유연화와 사기업화(민영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요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어 구조개혁 프로그램은 노동조합 약화라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게 진행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노동부가 시도한 신노사 문화 운동은 새로운 노사관계를 구축하기 위한 논의라 할 수 없으며 과거의 노사 협력 캠페인이나 노사 화합 선언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수준에서 진행돼 정부의 신노사 문화 운동은 현 정권이 가지고 있는 노동 정책의 수준이 얼마나 구태의연한 것인지를 보여 줄 뿐이었다.
이러한 김대중 정권의 선택은 노동 정책을 경제 정책의 하위 정책으로 두었을 뿐 아니라 노동부의 노동 행정이 공안 부처에 좌우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동부 장관이 지역 안배와 경제 부처 출신의 자리 마련을 위해 좌지우지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으며 공안부처가 파업 현장의 경찰 투입을 결정하는 경우가 많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정권의 노동 정책은 미래 지향적인 노사관계 프로그램 없이 구조조정에 대한 노동의 반발을 무마하기 위한 상황대처적인 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경제와 노동 시장 구조를 급격히 시장경제로 전환하면서도 이러한 노동 시장의 변화에 상응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 마련되지 못했다. 정부부문과 정치 부문에 대한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아 사회의 각종 제도와 관행은 과거의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정치는 정경유착에서 한발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행정은 관치에 안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노동 시장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노동 시장에서 노동자들의 지위가 크게 나빠지고 있으나, 이 노동자들을 보호하거나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는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사용자들은 정부의 구시대적인 노동 정책에 기대어 노사관계 개선보다는 노사관계에서 눈앞의 이익을 좇기에 바쁜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노동자들은 새로운 노사관계나 삶에 대한 기대를 가지지 못한 채 구조조정에 따른 고통을 부담해야 하는 상황에 몰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상학 - 민주노총 정책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