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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사건을 돌아보며:
‘운동권 가부장제’ 논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견해

지난 2월 밝혀진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사건은 진보 진영 활동가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최근에는 전교조 교사의 성추행 사건도 있었다. 그런데 장자연 사건, 청와대 성접대 사건과 관련돼 있는 우파언론과 한나라당이 간부도 아닌 몇몇 개인 회원의 일탈을 마치 전교조 전체의 문제인 양 비난하는 것은 위선이다.)

민주노총 간부 성폭력 사건을 계기로 진보 진영 내부에서도 자성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좌파단체, 여성단체, 페미니스트 들은 민주노총을 비판하며 각자 이번 사건의 본질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간부 성폭력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를 발표 하는 민주노총 전 수석부위원장 ⓒ사진 제공 민중의소리

개인이 저지른 성폭력을 민주노총 전체의 문제로 봐선 안 된다. 그럼에도 민주노총을 비판한 좌파와 페미니스트들의 지적처럼, 민주노총과 전교조 간부들의 사건 처리 방식은 과연 노동운동이 여성억압 문제에 진지한지 돌아보게 했다.

실제로 그동안 진보 진영에서 여성 문제는 여성들만의 과제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었고, 심지어 “남성 노조 활동가들이 노래방 가서 도우미를 부르고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룸살롱에 가는 것을 용인하는 분위기”(현대차 노조 여성 조합원)도 있었다. 많은 여성 활동가들이 자신을 동등한 동지로 여기지 않거나, 성적 대상으로 여기는 남성 활동가들이 있다고 토로하며 진보운동의 변화를 촉구해 왔다. 이런 문제 제기는 정당하다. 여성차별이 존재하는 조직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자부심을 느끼고 남성들을 동지로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런 정당한 문제 제기는 혼란스러운 정식과 섞여 있다. 페미니스트들은 진보 진영에도 여성차별적 풍토가 여전히 남아 있는 원인이 ‘운동권 가부장제’에 있다고 주장한다. 다수의 좌파단체(진보신당, 사회진보연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준비모임 등)들도 정도는 다르지만, 이런 주장을 수용한다.

가부장제라는 말을 워낙 모호하게 쓰고 ‘운동권 가부장제’라는 말을 그저 ‘운동권에도 여성차별이 존재한다’는 뜻으로 쓰기도 하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이 말을 사용할 때는 더 깊은 함의가 있다.

가부장제 이론이 현실을 잘 설명하는가

페미니스트들은 현재 사회가 가부장제 사회고, ‘운동권’에도 가부장제가 고스란히 반영된다고 여긴다. 가부장제 이론은 여성차별이 남성지배의 결과이며, 사회가 계급으로 나뉜 것과는 상관없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어느 사회에서건 여성차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운동권’도 예외가 아니라는 것이 이 이론의 당연한 결론일 것이다.

페미니스트들은 계급사회의 역학에 기초해 여성차별을 설명하려는 마르크스주의적 시도를 모두 ‘계급 환원주의’로 여긴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 투쟁의 우선적 중요성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하는 ‘운동권’들은 필연적으로 여성차별 문제를 소홀히 여길 수밖에 없다고 비판해 왔다. ‘운동권 가부장제’를 비판한 책 《오빠는 필요없다》의 저자이자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100인위원회’ 일원이었던 전희경은 “마르크스주의가 … 여성억압의 문제를 계급 모순에 흡수해 왔”고, 이것은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계략”이라고 평가했다.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진보 진영에서 여전히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는 것은 마르크스주의가 여성해방에 소홀하다는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종종 제시된다. 이 때문에 노동계급 투쟁과 꽤 일체감을 느끼는 좌파단체들에서도 마르크스주의와 가부장제 이론을 절충하는 것이 ‘대세’가 됐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말 가부장제 사회에 살고 있을까? 계급사회가 여성차별의 토대이며 계급을 철폐하는 운동을 통해서 여성해방도 가능하다고 말하는 마르크스주의는 낡아빠진 구닥다리일 뿐일까?

가부장제 이론가들은 남성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기 때문에 여성차별 유지에 이해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성의 낮은 임금이 남성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될까? 오히려 여성의 낮은 임금은 남성들의 임금을 깎기 위한 압력으로 작용해 왔다. 여성의 낮은 임금에서 진정 이득을 얻는 것은 자본가 계급이다. 여성이 주로 집안일을 떠맡기 때문에 남성이 이익을 누린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여성의 ‘손해’일 수는 있지만 남성의 ‘이익’은 아니다. 남성과 여성 노동자 모두에게 가장 유리한 것은 바로 육아와 가사노동을 사회가 책임지는 것이다. 여성의 무보수 가사노동에서 진정으로 이득을 얻는 것은, 거의 공짜로 안정적인 노동력을 공급받는 자본가들이다.

그러면 가정폭력을 휘두르고, 여성을 비하하고,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남성에게 ‘이익’을 주는가? 이런 잘못된 행동은 그러나 대체로 소외의 왜곡된 표현이자,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고 여기는 허위의식일 뿐이다. 여성차별이 체계적으로 유지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람들의 의식에도 여성차별의 찌꺼기가 남아 있다. 의식의 찌꺼기는 일상의 삶 속에서는 떨쳐내기 어렵지만, 체제에 맞선 투쟁 속에서는 떨쳐버릴 수 있다.

스페인 혁명, 파리 꼬뮌, 한국의 1987년 항쟁, 러시아 혁명 등 거대한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수동적 존재’라는 생각과 동시에 여성차별 의식도 도전받았다.

파업에 나서 승리를 거둔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 오늘날 여성들은 진보운동에서 주도적 구실을 하고 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투쟁해 나가면서 여성차별 의식에 도전할 수 있다. ⓒ사진 레프트21

오늘날 여성차별은 여전하지만 여성들이 노동계급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변화도 일어났다. 특히, 진보 진영에서 여성들은 이전보다 훨씬 눈에 띄게 주도적인 구실을 맡는다. 한국의 촛불시위를 평가하는 활동가들은 여성이 앞장섰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만약 가부장제 이론대로 성차에서 비롯한 차별이 영원하고 남성들이 여성차별에서 이득을 얻는다면, 이런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물질적 조건이 변하면 여성의 처지도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가 현실에 더 잘 들어맞는다.

마르크스주의가 여성문제를 계급문제로 환원한다는 비판도 부당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여성 고유의 억압’이 있음을 인정한다. 자본가 계급의 여성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외모나 옷차림으로 평가받고, 대를 잇는 수단처럼 취급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노동계급 여성보다 훨씬 덜 억압받는다. 이건희의 처 홍라희와 이랜드 여성 비정규직이 받는 억압이 같을 수 없다. 게다가 홍라희는 같은 여성이지만 자신이 지배하는 체제의 이익을 위해 여성 노동자들을 착취하는 편에 선다.

계급이라는 토대를 공격해야

따라서 계급이라는 토대를 공격하지 않고서는 이 억압을 없앨 수 없다. 여성들에게 양육과 가사노동의 책임을 떠넘기고, 저임금으로 묶어 두고, 여성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해 이득을 얻는 자본주의 체제에 도전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체제가 바뀔 때까지 손 놓고 있자거나, 일단 여성 문제는 뒷전으로 미뤄두자는 것이 아니다. 전희경은 “[마르크스주의에서] 여성억압 해체는 근본적인 해방에 단순히 수반되는 부수 현상으로 치부됐다”는 한 페미니스트의 말을 인용했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때문에 진보운동에서 실제로 이런 비판을 받을 만한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구 소련과 동유럽, 북한, 중국 등 소위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여성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아이 낳는 도구로 취급받고 저임금과 열악한 일자리로 고통받는다. 이것은 진정한 사회주의 전통과는 무관하다.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은 “여성해방 없이 노동해방 없다”는 점을 실천에 옮기려 했다. 인류의 절반이자, 노동계급의 중요부분인 여성들이 억압받는 상태로 남아 있다면 노동해방은 가능하지도, 유의미하지도 않다. 그래서 사회주의자들은 여성의 선거권과 노동권, 낙태권 쟁취를 위해 앞장서서, 끝까지 투쟁해 왔다. ‘세계 여성의 날’을 제안하고 조직하기 시작한 것도 사회주의자들이었다.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볼셰비키의 압도 다수는 남성이었지만, 발전한 자본주의에서도 시도해 본 적 없는 혁명적 여성해방 조처들 ― 낙태와 이혼의 완전한 자유, 동일노동 동일임금, 집단적 공동 육아, 사회화된 식당 시설 등 ― 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다.

물론 계급사회의 찌꺼기들이 남아 남성 우위를 유지하길 원하는 남성들의 저항이 있었지만, 볼셰비키당으로 조직된 선진 노동자들은 남성과 여성의 단결이 계급 전체에 이롭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런 저항에 맞서려 했다.

비록 자본주의의 변형인 스탈린 체제가 혁명의 성과를 파괴하면서 여성해방을 위한 시도도 시궁창에 쳐박혔지만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여성해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보여 준다.

여성 노동자들이 여성 자신의 문제를 걸고 투쟁에 나서는 것은 중요하다. 1970~1980년대 동일방직 투쟁·구로동맹 파업, 2000년대 롯데호텔과 국민·주택은행, 이랜드와 기륭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성도 남성과 똑같은 투쟁의 주체임을 보여 줬다.

그러나 여성들만의 투쟁 이상이 필요하다. 위에 제시한 투쟁들도 모두 남성노동자들을 포함한 노동계급의 광범한 지지 속에서 승리의 열쇠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성과 남성 모두를 괴롭히는 자본주의 체제에 효과적으로 맞서려면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가 단결해야 한다.

물론 단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 노동자 모두에게 왜 단결이 절실한지 이해시키고 경험에서 입증하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남성 노동자들이 여성 노동자들을 동등한 주체로 여기고 연대에 나서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의식적으로 조직하고 촉구하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자들의 임무다.

이를 위해 토론과 설득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남성 노동자 집단을 낙인찍는 것과는 달라야 한다.

‘사회진보연대’는 그간의 반성폭력 운동이 규약 제정이나 성폭력 교육이라는 형식에 치중한 경향이 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남성들은 2차 가해자가 될 위험 때문에 차라리 입을 닫았고 결국 논의는 봉쇄”됐다고 평가한다. 남성을 잠재적 성폭력범으로 인식하는 분위기, 가부장제 이론에 이견을 제시하면 여성문제에 불철저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는 분위기가 토론을 가로막은 측면이 있다. 이런 분위기에서 벗어나 여성·남성 노동자가 함께 여성차별의 현실과 해방에 대한 토론과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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