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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룡열차를 타고 있는 한국 경제

4월 14일 미국의 주식시장이 대거 폭락하자 세계의 주요 언론들은 신문의 머릿기사를 거의 모두 “검은 월요일”, “피의 월요일”로 뽑았다. 뉴욕 증시 대폭락 사건이 터진 지 단 3일 만에 일본과 홍콩, 싱가포르 주식 가격도 거의 10퍼센트 가까이 일제히 내려갔다.

미국의 주식시장과 거의 비슷하게 움직이고 있는 우리 나라의 주식시장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 4월 17일 하루 동안 주식시장의 총액 감소 규모는 자그마치 39조 5천억 원에 달했다. 누가 은행에서 돈을 훔치지도, 공장의 부품을 떼어간 것도 아닌데 40조 원이 갑자기 공중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 동안 김대중 정부는 “IMF에서 탈출했다”, “한국 경제가 회복됐다”고 얘기해 왔다. 한국 경제가 회복됐다는 것은 어느 정도 진실이다. 작년 4분기의 성장률은 13퍼센트였고, 지난해 GDP 기준 실질경제성장률은 10.7퍼센트였다.

실질 국민총생산도 외환위기 전 수준으로 회복됐다. 실질 국민총생산 수준은 1997년을 100으로 했을 때 1999년은 103.3이다. 민간소비도 97로 거의 구제금융 직전의 수준을 회복했다. 작년 상장기업들도 사상 최대의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최근 뉴욕 증시 폭락은 한국 경제 회복에 샴페인을 터뜨리는 얘기들 ― “경제성장률 두 자리 수 전망”, “신경제 국면 진입”, “정보통신 혁명” 등 ― 을 갑자기 무색하게 만들었다.

한국 경제 회복은 얼마나 오래갈 수 있을까? ‘한국 경제 회복’의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이 숨겨져 있는 것 아닐까?

우선, 1987년 이래 가장 큰 폭이라는 최근의 경제성장률은 아예 마이너스(-6.7퍼센트) 성장을 기록했던 1998년과 비교한 수치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행도 “지난해 경제가 급성장한 것은 1998년에 워낙 경기침체의 골이 깊었던 데다 작년에 수출 경기와 정보통신 업종이 호황을 보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 회복의 원인에 대한 솔직한 평가들을 종합하면 대외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는 지적이 우세하다. 저금리·미국의 호황·엔화 강세 덕분이지 한국 경제의 실질적인 경쟁력이 높아진 결과는 아니라는 지적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2000년 한국경제를 위협하는 요인을 다섯 가지로 요약했는데 그 가운데 “미국경제의 경착륙”을 첫번째로 꼽았다.(그 밖에는 금융시장의 불안정, 산업구조의 불균형, 소득 불균형과 노사문제, 외환위기 이후의 재정적자 누적)

미국 경제는 계속 버팀목이 돼 줄 것인가?

그 동안 미국의 호황은 주로 세 가지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미국의 산업이 군수 조달 계획과 깊게 연관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 둘째 노동자들에게 더 많이 더 오래 일을 시켜서 이윤을 보호하고 있다는 점이다.(미국 노동자들은 프랑스 노동자들보다 40퍼센트, 독일 노동자들보다 29퍼센트, 영국 노동자들보다 13퍼센트 더 오래 일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실질 소득도 하락하고 있다.)

그런데 미국 호황의 두번째 요인은 상당한 한계를 갖고 있다.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착취율 증대에는 한계가 있다. 하루는 24시간이지 36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질소득 하락은 소비자들의 지출 축소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미국의 부르주아 경제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이런 상황이 일어나기라도 할까 봐 두려워하고 있다.

호황의 셋째 요인은 바로 미국 자본주의가 미국 경제를 지탱하는 데 다른 나라 자본가들의 투자에 의존했다는 점이다.

일본이나 유럽 경제는 계속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그 지역의 부자들은 미국의 주식을 사는 데 돈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주식과 연관된 기업들이 튼튼하다면 별 문제 없는 것 아니겠는가?

문제는 이 기업들이 상당히 과대 평가돼 있다는 것이다. 인터넷 산업은 미국 주식 시장의 견인차 구실을 해 왔는데, 미국 인터넷 산업의 주식을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기관에 따르면 상장된 미국 인터넷 기업들의 4분의 1이 1년 안에 자금이 바닥나게 될 운명에 놓여 있다. 여기에는 세계 굴지의 인터넷 회사인 아마존컴도 포함돼 있다.

미국 주식의 가치는 지난 백오십여 년을 통틀어 가장 과대 평가돼 있던 대공황 직전인 1929년 9월(33배)보다 더 부풀려져 있다. 월 스트리트는 올해 1월에 주식 수익률이 44배까지 치솟았다고 경고했다.

1990년대 말 동아시아를 휩쓴 공황을 예견한 바 있는 폴 크루그먼은 첨단기술주 열풍이 몰고올 비참한 말로를 조심스럽게 경고했다.

새로운 기술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을 것 같은 기업의 주가가 상승해서 초기 투자자들이 막대한 이득을 내게 되면 더 많은 투자자들이 달려들어 주가는 더욱 오르게 된다. 이런 과정이 지속되면 처음에 의심했던 투자자들은 바보처럼 보이게 되고 가격이 떨어질 것이란 비관적 전망은 사라진다.

자신들이 만들어 낸 사기에 자신들이 매료되고 이윤이 마술처럼 오를 거라고 기대했다가 현실은 비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 경제 전체는 나락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이미 신경제를 대변하는 나스닥 지수 폭락은 구경제를 대변하는 다우 지수까지 사상 최악으로 끌어내렸다.

미국 주식시장에 돈을 댄 유럽과 일본의 부자들이 자신들의 투자가 어리석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손해를 만회할 기회가 사라진 뒤일 수도 있다.

4월 중순의 증시 폭락 이후 다시 주식 가격이 조금 반등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뉴욕 증시 폭락은 미국 호황의 불안정뿐 아니라 지금의 호황이 본질적으로 1973∼1974년의 위기에서 근본적으로 벗어나 있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최대의 저주

‘호황’인 미국 주식시장이 좀더 휘청거릴 기미가 보일 때 한국경제를 비롯한 동아시아 경제는 어떻게 될까?

폴 크루그먼은 “2000년 말이나 2001년 중반쯤 미국 증시의 거품이 무너지면 그 여파로 금융 위기 재발 방지를 위한 구조조정 노력을 게을리하고 있는 동아시아에 금융 위기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런데도 재정경제부 장관 이헌재는 한국의 주가가 곤두박질치고 있던 4월 17일, “우리 경제는 미국과 달리 위기극복 뒤 회복 단계에 있으며 어떤 과열이나 인플레이션 징후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미국 증시 폭락에 대해 우려하거나 과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식의 말을 김영삼 정부 때도 들은 기억이 있다. “그래도 경제의 기초 여건은 튼튼하다.”는 얘기로 평범한 사람들을 우롱하고 있을 때 한국 경제는 무능하고 부패한 경제 관료들과 재벌들의 손에서 이미 공황의 냄새를 피우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주식시장의 변동과 거의 비슷한 변동 폭을 보이고 있는 한국의 주식시장에 미국의 주가 하락이나 미국 경제의 불안정한 조짐들은 그야말로 최대의 저주가 될 것이다.

정보통신 혁명을 통한 새로운 경제?

최근 김대중 정부의 통치 이념은 정보통신 국가다.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으로 경기 회복을 안정시키자는 방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미국 경제의 호황이 가장 유행시킨 말도 “신경제”라는 단어였다. 정보통신 혁명으로 미국 경제가 생산성 향상을 누리면서 인플레가 없는 경제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이다.

요즘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들도 이 말을 부쩍 애용하고 있다. 이헌재는 얼마 전 심야토론회에서 “우리 나라도 신경제 모델로 이행하고 있고 그 덕분에 성장률이 1.5퍼센트 이상 더 오를 것이다.”고 호언장담했다.

물론 정보통신 산업이 최근 미국 경제 호황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다. 정보통신 산업이 한국에서도 호황을 이끈 주된 부문이었다. 실제로 정보통신 부문의 성장기여율은 38.3퍼센트에 육박한다. 그러나 정보통신 산업의 발전이 경제를 경기후퇴에서 구출해 주고 있다는 “신경제” 주장은 뻥튀기다.

사실, 이런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1929년 대공황 직전에도 라디오라는 신기술이 주식 호황을 주도하면서 “신기술로 인해 기존의 경제 법칙이 무력화됐다.”는 환상이 사람들을 투기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라디오라는 신기술은 1929년 대공황을 막지 못했다(〈한겨레〉 1999년 10월 20일치.)

미국의 신자유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조차 올해 초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신경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도 기술 변화에 따라 급속도로 팽창하는 뉴 이코노미는 많이 있었다. 1920년대 미국에선 자동차가, 1980년대 일본에서는 TV와 가전제품, 카메라, 1990년대에 미국에서는 인터넷과 관련된 산업들이 경제를 주도했다. ‘새 시대’, ‘신경제’는 종종 찾아오는 것이다. 신경제가 만개하는 시점에 늘상 기술 발전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경제 전반과는 관계가 없다.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은 사라진다. 지금의 새로운 현상들도 아마 2000년대의 어느 시점에선가 사라질 것이다.”(〈조선일보〉 2000년 1월 17일치.)

자본주의는 1770년대의 최초 방적 공장에서 시작하여 1차 대전 전의 최초 생산 라인을 거쳐 1950년대의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사업 확장 방식을 계속 변화시켜 왔다. 그럼에도 새로운 확장 방식은 경기후퇴와 불황, 공황을 결정적인 순간마다 떼어놓지 못했다.

인터넷 등의 정보통신 산업이 생산성을 비할 바 없이 향상시키고 있다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임금과 고용 구조에 기술이 미친 전반적인 효과는 1990년대와 1980년대보다 1970년대에 오히려 더 컸다.”는 지적도 있다.

심지어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의 지적에 따르면 미국에서 컴퓨터 산업이 전산업의 생산성 증가율에 기여한 정도는 겨우 0.4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KIEP, 1999년 5월, ‘미 경제 장기호황의 원인 분석과 향후 전망 및 세계 경제의 불안 요인 평가’)

정보통신 산업은 미국 경제 호황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보기 힘들 뿐 아니라 오히려 정보통신 기술주들이야말로 이번 뉴욕 증시 폭락의 주인공들이었다.

“신경제 핏줄”, 정보통신 주식의 거품

“신경제”의 핏줄은 바로 주식이었다. 주가 상승은 국민들이 너도 나도 주식 시장에 발을 들여 놓도록 유혹했다. 그래서 벤처 기업들은 풍부한 자금을 저렴한 비용으로 조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정보통신 관련 주가는 한 달만에 3분의 1이 떨어졌다. 정보통신주들은 최근 주가 하락을 주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정보통신 관련 주식들은 미국의 첨단주들 이상으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과대 평가돼 있다. 예컨대, 기업의 매출액에 대한 주식 가격의 수익률은 다음커뮤니케이션이 155배, 새롬기술이 75.9배, 하나로 통신이 166.2배를 기록했다.(한국전력과 포항제철 등 우량주의 경우에는 1.2배∼1.8배이다.) 그러나 이윤 증대에 대한 기대와 실제 이윤과는 별개이다.

이미 올해 초부터 대주주들은 수익성이 검증되지 않는 인터넷 온라인 기업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거래소 주식시장이 어린이 대공원의 청룡열차라면 코스닥 시장은 에버랜드의 청룡열차다.

벤처 기업들 가운데 대부분이 부실 기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코스닥 시장은 붕괴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월 스트리트의 일부 투자 분석가들은 첨단기술주에 대한 투자를 ‘누군가 피박을 쓰게 될 폭탄 돌리기’라고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폴 크루그먼도 “정보기술 혁신의 결과로 세계경제 특히 금융시장 불안정성은 더 심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폴 크루그먼, ‘21세기의 세계경제’, 〈조선일보〉와의 대담, 〈조선일보〉 1999년 12월 31일치.) 위의 지적들을 들으면서 한국 경제의 상황을 떠올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한국의 경우 특히 정보통신 부문이야말로 급격한 호황과 불황이라는 엇갈리는 운명을 맞이해 왔다. 대표적으로 반도체는 1995년 반도체 특수 물결이 지나가자 가격의 80퍼센트가 폭락하는 사태에 직면한 바 있다. 지금은 엔화 강세 때문에 가격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런 대외적 요인이 사라지고, 한국 경제의 견인차 구실을 하고 있는 기둥이 흔들린다면 어떻게 될까? 정보통신 산업의 독주는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도 있다.

산업불균형과 무역적자

무역수지에 적자폭이 늘어나는 현상도 경기 회복의 불안정을 보여 주는 두번째 증거다.

난방을 위해서는 연료가 계속 필요하다. 자본주의의 연료는 이윤이다. 특히 한국과 같은 수출 주도 경제에는 무역수지 흑자가 중요한 연료 탱크 역할을 한다.

그러나 국내 수출업체의 채산성은 1년 전부터 다시 급격하게 약화되고 있다. 올해 4월 들어서도 수입 증가 속도가 수출 증가세를 훨씬 앞지르는 추세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1월의 경상수지는 외환위기 직전인 1997년 10월 이후 가장 나빠졌다. 무역적자는 올해 들어 더욱 악화되고 있다. 수출이 호조를 띠고 있지만 수입은 더 폭발적이다. 3월까지 수출은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 30.8퍼센트 늘었지만 수입은 51.8퍼센트나 더 늘었다.

정보통신 산업의 성장은 오히려 무역수지 악화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올해 1월의 무역적자 규모는 IMF 구제금융 직전인 1997년 10월 이후 가장 컸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무역 구조와 관련 있다. 한국 경제는 경제 규모가 확대될수록 그만큼 중간재 수입도 증가해서 무역수지가 구조적으로 악화되는 경향이 있다. 한국 경제는 원자재들을 주로 선진국에서 들여오기 때문에 수출을 많이 하려 들수록 더 많이 수입해야 하는 무역 역조 현상에 계속 시달려 왔다. 그 결과 비메모리 반도체 수입은 오히려 수출을 압도해서 비메모리 분야의 무역수지 적자규모만 지난 한 해 동안 무려 52억 달러에 달했다.

무역의 역조 현상은 산업의 불균형과도 관련 있다. 정보통신 산업은 1년 전보다 무려 41퍼센트나 성장했다. 자동차 생산도 21.8퍼센트가 늘어났다. 특히 이런 산업들은 선진국에서 기계와 부품을 수입해 들여와야 수출을 잘 할 수 있는 부문들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또 이런 주요 ‘효자 산업’들 가운데 하나라도 삐그덕거리면 그 결과가 너무 비참하다는 것이다. 1998년 한국 경제 공황 당시 반도체 가격 하락이 뇌관 노릇을 했던 것을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친자본주의 분석가들이 무역수지 적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1997년 외환위기를 낳았던 주범 가운데 하나가 무역수지 적자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조선일보〉는 “무역수지가 적자로 돌아서면 외환보유고 확충에 문제가 생기고 결국 이것이 대외신인도를 떨어뜨려 멕시코처럼 위기가 재발하는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심각해지는 재정 적자 ― 생산적 복지가 설 땅이 있을까?

심각해지는 재정 적자도 한국 경제에 또 하나의 암초가 될 수 있다. 경기 회복 추세 속에서도 정부 부채 문제는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한나라당의 4백조 원 주장이 뻥튀기이기는 하지만 정부의 빚이 김대중의 주장보다는 더 많은 게 사실이다.

GDP 가운데 정부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은 현재 2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빚까지 합하면 1999년 말 현재 재정 적자는 국내총생산의 23퍼센트에 이른다.

조세연구소에 따르면 이 같은 부채 규모는 1990년대 말부터 한국 경제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을 5.9퍼센트 잠식할 정도에 이르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김대중 정부는 긴축예산에 더 군침을 흘릴 것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지금 당장은 고통스럽더라도 복지예산을 조금 줄여야 나중에 국가의 이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 수 있다.”고 김대중 정부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래서 이헌재는 3월 15일 가급적이면 공적자금을 추가로 조성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올해 재정적자 규모를 당초 예상했던 18조 원에서 13조 원 이하로 낮추겠다고 밝힌 바 있다.

우리는 앞으로 김대중 정부가 재정 적자를 공공요금 인상과 간접세 인상으로 메우려 하는 장면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

이미 이헌재는 4월 20일 교통혼잡 부과금을 신설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은 얼마 전 물의 날 기념식에서 “물 가격도 점진적으로 인상하는 방안을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더욱이 김대중 정부는 올 상반기에 공공서비스 요금 체계를 전면 조정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지하철 요금 두 배 인상 ‘검토’가 ‘추진’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작년 중반 이후 김대중 정부가 퍼뜨려 온 “생산적 복지”의 내용은 모순투성이다. 실제로 김대중 정부는 ‘근로자 장기 우대 저축’과 같은 금융상품에는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는 등의 선거 직전 발표와는 사뭇 다르게 2000년 예산안에서 생활보호자지원 예산을 1999년보다 6.2퍼센트나 줄였다. 대상자도 174만 명 축소됐다. 이미 김대중 정부는 작년에 공공근로사업 예산을 올해 2조 1천억 원에서 9천억 원으로 줄인 바 있다.(〈조선일보〉 1999년 9월 21일자.)

긴축재정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내핍을 강요한다. 내핍은 사회를 더 커다란 긴장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생산과 소비 간의 불균형 ― 소득 격차 최대

부자와 가난한 사람들 간의 소득 격차 심화도 한국 경기 회복의 불안정을 보여 준다.

지난해 계층간 소득격차는 통계청이 통계 파악을 시작한 1979년 이후 가장 크다. 지니 계수는 1979년 이후 최고치다. 지니 계수는 IMF 경제위기를 맞았던 1998년 껑충 뛰었고 지난해는 더 올랐다.

김대중 정부는 이를 놓고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한다. 아랫목도 윗목처럼 따뜻해지고 경기 회복이 고소득층에 먼저 영향을 미치고 저소득층까지 혜택이 돌아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고 말한다.

윗목은 충분히 따뜻하다. 경제학자들은 최근 2년 동안 소비가 경제를 부양해 왔다고 말하지만 도대체 누구의 소비가 늘어났는가?

IMF 공황 첫 해 잠시 줄었던 사치성 고급소비재 수입이 지난해 이후 급격하게 늘었다. 외제 승용차의 경우 1998년에 비해 1999년에 거의 네 배가 늘었다.

저축·부동산·주식 등의 자산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더 쉽게 부를 쌓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작년 3/4분기에 상위 20퍼센트의 소득(월 평균 478만 원)은 하위 20퍼센트(월 평균 85만 원)의 5.3배에 이르러 외환위기 이전 1997년 같은 분기의 4.5배보다 크게 늘었다. 이 중 근로소득은 4.9배였고 부업 소득은 9.9배, 재산 소득은 12.1배였다. 고소득층은 근로소득보다 부동산 금융 자산 등으로 돈을 많이 벌고 있다.

주식 열풍으로 도대체 누가 이득을 보았는가?

사상 최대로 증자된 반도체 관련주들로 삼성전자와 현대전자의 경영진들이 벌어들인 순이익은 자그마치 5조 원이 넘는다. 지난 1월중 주식 발행을 통한 기업의 조달 자금 중 76퍼센트는 삼성·현대·엘지·SK 등 4대 그룹 계열사에 집중됐다.

최근 ‘팔자’ 추세로 돌아서고 있는 대주주들은 단지 해외의 투기 자본들만이 아니라 한국 기업들의 역외 펀드(다른 나라 국적의 자본이지만 실제로는 한국인 소유주인)인 경우도 많다. 최근 엄청난 주식을 사들였다가 되팔면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는 역외 펀드는 말레이시아 국적이지만 실제 주인은 한국인이다. 최근 일간지의 경제 기사는 대체로 이 역외 펀드를 “검은 머리의 외국자본”이라 부르고 있다.(〈조선일보〉 2월 17일치.)

반면,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몫은 경기 회복 기간에 되레 줄어들었다. 국내총생산 대비 임금은 1997년 52.1퍼센트에서 1998년 47.5퍼센트로 줄었다. 기업내부가치 가운데 임금이 차지하는 비율은 1997년 47.3퍼센트였지만 작년에는 36.7퍼센트를 차지했다. 기업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1995년 12.9퍼센트였지만 1999년 상반기에는 9.6퍼센트로 뚝 떨어졌다. “고임금이 진정한 복병이다.”는 주장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지난 2년 동안 노동자들은 5퍼센트에 가까운 임금 손실을 입었다.

경기가 회복되면서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것은 늘어난 노동시간이다. 우리 나라 노동자의 주당 노동시간은 1990년 49.8시간으로 처음 40시간대로 접어든 뒤 1998년 46.1시간까지 떨어졌다가 1999년에는 다시 50.0시간으로 급속히 늘어나 10년 전 수준으로 후퇴했다. OECD 가입국 가운데 한국 노동자들이 가장 오래 일한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착취율 증대(이윤에 대한 노동자들의 몫이 줄어드는 것)를 통해 이윤을 보호하는 방식은 노동자들이 더 이상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나서는 순간 수포로 돌아간다. 또한, 앞에서 지적했듯이 이런 방식은 민간 소비를 둔화시켜 되레 자본가들에게는 부메랑이 될 수 도 있다.

금융 공황의 가능성

경제 체질이 나아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런 동맥경화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한국금융연구원은 “대내외 여건 변화로 경기회복이 주춤하거나 둔화될 경우 은행의 건전성이 급격히 악화돼 금융위기가 재발할 수 있는 상황”(〈조선일보〉 2월 16일치)이라고 지적했다.

한국의 은행과 기업들이 갖고 있는 빚의 규모가 분명해진 것도 아니다. 기업의 투명성은 오히려 악화됐다. 구조조정이 안 되고 있다. “한국의 경우 국제통화기금의 엄격한 감독과 새 정부의 금융 및 경제개혁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6.58이었던 투명성 평가 점수가 8.50으로 악화됐다고 밝혔다.”(〈조선일보〉 1999년 11월 21일치.)

영업 정지를 먹은 종금사들은 증권사들과 투신사들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주식시장 열풍에 뛰어들어 단단히 한몫 잡았다.

빨리 갚아야 하는 단기 외채도 빠르게 늘고 있다.(〈조선일보〉2월 3일치.) 금융연구원은 내년에는 단기외채가 40퍼센트에 육박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만약 이런 불안정한 회복 국면에서 금융 위기가 다시 재발하면 어떻게 될까? 경기 회복이라는 온갖 미사여구들이 산산조각날 때 김대중 정부의 위선은 또 한번 입증될 것이다. 그 때 경제 위기에 어떤 책임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더 커다란 고통으로 밀어넣은 책임은 모두 김대중 정부의 경제 관료들, 사장들, 그리고 기성 보수 정치인들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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