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송금 특검 논란 -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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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송금 특검 논란 - 어느 쪽도 지지해서는 안 된다
김인식
노무현이 대북 송금 특검 연장을 거부함에 따라 6월 25일에 특검이 막을 내렸다. 대북 송금 과정의 전모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박지원 150억 원 수수 의혹’까지 불거지자 노무현은 특검 연장을 거부했다.
노무현은 “150억 원 수수 의혹 사건이 법률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별개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설득력 없는 얘기다. 애초 특검 수사 범위가 대북 송금 조성 과정이었고, 박지원은 이 과정에서 일종의 정치 자금을 챙겼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 돈이 민주당 선거 자금이나 또 다른 대북 지원에 사용됐을지도 모른다는 의혹이 확산되자, 노무현은 서둘러 의혹의 뚜껑을 닫았다.
노무현은 재특검 거부 뜻을 밝혔다. 특검이 해결하지 못한 사안을 국가 검찰에 넘길 수도 있다는 얘기다. 그러나 “검찰이 객관적으로 수사하기도 어렵고, 또 국민들이 수사 결과를 믿으려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
노무현은 사실상 대북 비밀 외교에 대한 국민의 알 권리를 거부한 셈이다. 이것은 자신이 취임식 때 한 약속을 뒤집은 것이다. 당시 노무현은 “대내외적인 투명성을 높이고 국민 참여를 확대”하는 “평화 번영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노무현은 김대중식 ‘햇볕 정책’을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나라당식 남북 상호주의를 지지하는 것도 아닌, 뚜렷한 대북 전략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다. 어찌 보면, ‘냉탕’과 ‘온탕’을 정신 없이 오갔던 김영삼의 즉흥적 대북 정책과 매우 흡사하다.
특검 수사는 일단락됐지만, 여야간 분열의 골은 더 깊어졌다. 한나라당의 새 대표 최병렬은 당선되자마자 재특검법안을 이 달 말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야당의 분명한 의사를 정면으로 짓밟을 경우에는 타협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이 문제를 붙들고 늘어지는 것은 가증스럽다. 한나라당은 냉전 시절부터 북한과 비밀 접촉을 해 왔던 당사자다. 전두환은 장세동을, 노태우는 서동권을 북한에 몰래 보냈다. 박철언은 1985~1991년까지 모두 42차례 대북 비밀 접촉을 했다. 김영삼은 1996년 총선 직전에 비무장 지대에서 무력 시위를 벌여 줄 것을, 이회창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그 비슷한 ‘총풍’을 북한에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남북간에 무슨 거래가 오갔는지는 철저하게 장막에 가려져 있다. 이런 당이 대북 정책 투명성을 말하는 것은 악마가 성경을 인용하는 것만큼이나 위선적이다. 한나라당의 재특검법안 요구는 냉전의 광기에서 비롯한 반북의 굉음이다.
대북 송금을 놓고 남한 지배 계급이 분열하는 모습은, 그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의 진정한 관심사는 나 몰라라 하고 오로지 자신들의 당파적 이해 관계에만 골몰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한편, 특검 팀은 김대중 정부가 비밀 외교와 뒷거래를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특검 팀은 사실상 ‘남북 정상회담을 돈으로 샀다’는 결론을 내렸다.
나머지 4억 달러는 현대의 경협 사업 선투자금이라고 한다. 더 정확히 말해, 정부가 현대라는 특정 기업의 대북 사업을 도와 주기 위해 특혜
위선적이게도, 김대중과 그 가신들은 이 사실을 끝끝내 숨기려 했다. 박지원은 지난해 국회에서 “
대북 비밀 외교의 전모가 밝혀지기 시작하자, 김대중과 민주당 구주류들은 이 모든 것이 “통치 행위”이자 “평화 통일 안착 비용”이라고 강변했다.
남북 관계와 노동자 투쟁
적지 않은 진보 단체들이 이와 비슷한 근거로 특검을 반대했다. “특검제
전쟁과 냉전을 경험한 나라답게 많은 사람들이 남북 화해를 바란다. 이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며 사회주의자들도 남북 화해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남북 적대는 전쟁 위협이 상존할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남북 적대는 국내 민주주의 억압과 짝을 이룬다. 군부 독재자들은 북한의 위협을 들어 민주주의 억압을 정당화했다. 군부 독재자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조차 ‘친북’과 ‘빨갱이’라는 낙인을 찍어 탄압했다. 대북 적대적인 한나라당이 이름만 바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 민주당식 국가보안법 개정조차 극렬 반대하는 것을 보라. 한나라당은 ‘햇볕 정책’을 물어뜯기 위한 정쟁용으로만 특검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그 동안 남북 화해 분위기를 집요하게 훼방놓았다는 것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명분을 쌓기 위해 미국은 북한을 ‘악의 축’으로 남겨 놓아야 했다. 그래서 김대중 정부는 미국 중앙정보국
남북 화해를 바라는 정서와 심정을 충분하게 이해하는 것과는 별개로, 특검 반대 주장은 몇 가지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특검 반대 주장은 남북 관계가 계속 당국간 비밀로 이뤄지는 것을 용인하게 되고 결국 남북 관계가 집권당의 정략적 수단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
다른 한편, 남북 화해를 지지하는 것과 김대중의 대북 정책을 지지하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 특검 반대 주장에는 김대중의 ‘햇볕 정책’이 남북 화해만을 뜻한다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김민웅 씨는 “특검이 냉전 체제 유지에 요구되는 실정법으로 냉전 체제 해체에 필요한 노력을 좌초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김민웅 씨는 김대중이 “냉전 체제 유지에 요구되는 실정법”인 국가보안법으로 “냉전 체제 해체에 필요한 노력”인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을 탄압했다는 사실에는 침묵한다. 김대중 정부하에서 수백 명의 한총련 대의원들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됐다.
겉으로 보이는 ‘햇볕 정책’의 이미지와는 달리, 김대중은 ‘온풍’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1998년 7월 초 잠수함 사건을 이용해 노동자 투쟁을 냉각시키려 했다. 그 무렵에 김대중은 현대차 파업을 공격하기 위해 ‘영남위원회 사건’을 터뜨렸다.
1999년 6월 서해교전은 “김대중의 햇볕 정책에도 포함돼 있지만 부각되지 않았던 ‘강경’ 측면,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종류의 무력 도발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
사실, 역대 남북 커넥션은 ‘냉풍’과 ‘온풍’ 모두를 불러일으켰다. 박정희는 1972년 7·4 공동성명이라는 ‘온풍’을 이용해 종신 대통령이라는 독재 체제
요컨대, 남북 당국자간 비밀 외교는 ‘냉풍’이든 ‘온풍’이든 체제 유지라는 점에서 거의 비슷한 효과를 낸다. 남북 지배자들은 뒷거래를 통해 지배 체제를 강화하는 데 이런 커넥션을 적극 활용했다.
결정적으로, 김대중의 남북 대화 정책은 노동자 운동을 통제하는 수단이었다. 가장 위선적인 사례는,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된 지 꼭 2주 뒤에 김대중이 호텔롯데와 사회보험 노조 파업을 공격한 것일 게다.
이런 상황에서 포퓰리스트 좌파들은 김대중이 북한에 화해 협력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것처럼 여겨 그를 공격하는 것을 기피했다. 김대중은 이 점을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는 데 적극 활용했다. 포퓰리스트와 투쟁하는 노동자 사이를 이간질하는 방식으로 그랬다.
김대중의 이런 통치 전략이 낳은 결과를 잘 보여 주는 수치가 있다. 김대중이 집권 4년 동안 구속한 노동자 수
더욱이 김대중의 대북 정책은 한반도 평화를 가져 올 수 없는 근본적 약점이 있다. 그는 “안보나 경제 발전 모든 문제에서 미국은 소중”하기 때문에 “반미”나 “미군 철수”는 절대 안 된다고 강조했다.
특검을 둘러싼 지배 계급내 논란에서 어느 한 쪽을 지지하는 것은 위험하다. 남북 화해를 절대선으로 여기는 생각 때문에, 다시 말해 남북 화해가 계급 투쟁에 선행한다는 생각 때문에 특검을 반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