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생 자퇴:
“스무 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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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3월 10일] 오전, 백지에 매직으로 투박하게 쓴 대자보 하나가 고려대 학생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라는 이 글은 교내를 오가는 학생들의 발길을 붙들었다.
“오늘 저는 대학을 그만둡니다. 진리도 우정도 정의도 없는 죽은 대학이기에”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침묵시위를 하는 김예슬 학생에게 사진 촬영과 인터뷰 요청 등이 쇄도했다.
많은 학생들은 그녀가 자퇴의 소회를 밝히는 글에서 호소력 있게 서술한 대학생의 처지에 공감했다. “‘빛나거나’ …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한 마음과 “자격증의 시대”가 돼 버린 무한 경쟁에 대한 압박감,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느끼는 소외, 경제 위기 시대에 대학을 다니는 평범한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불안감이 그녀의 글에 가득했던 것이다.
동료 학생들처럼, 나는 이 대자보를 읽으며 한편으로는 응원을, 다른 한편으로는 희망을 보내고 싶다.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사회에 대한 희망은 함께 싸우는 과정에서 찾아야 한다고, 이 사회를 함께 바꾸려면 실제로 “저들”을 멈춰야 한다고, 그렇게 희망을 찾자고 말하고 싶다.
그녀의 침묵시위를 지켜본 내 친구는 “사실 이 글에 담긴 주장이 우리가 교육투쟁을 통해 이뤄야 하는 것”이라며 “함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얘기했다.
그 친구 얘기처럼 학생들이 서로 연대하고 “국가와 대학 … 자본”을 멈출 수 있는 노동자들의 투쟁과 함께할 때, 진정으로 그녀와 나, 그리고 학생들이 원하는 경쟁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은 고려대 경영학과 학생인 김예슬 씨가 ‘자발적 퇴교’를 선언하면서 학교 안에 부착한 대자보 전문이다. 입시·취업 경쟁 속에서 시장과 경쟁 논리에 물든 이 사회와 대학을 비판하는 김예슬 씨의 이 글과 자퇴 선언은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지며 사회적 파장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다리기를 하는 20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우리들의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이제 나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나 는 25년간 긴 트랙을 질주해왔다. 친구들을 넘어뜨린 것을 기뻐하면서, 나를 앞질러가는 친구들에 불안해하면서. 그렇게 ‘명문대 입학’이라는 첫 관문을 통과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더 거세게 채찍질해 봐도 다리 힘이 빠지고 심장이 뛰지 않는다. 지금 나는 멈춰서서 이 트랙을 바라보고 있다. 저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취업이라는 두번째 관문을 통과시켜 줄 자격증 꾸러미가 보인다.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향한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아차렸다. 내가 달리고 있는 곳이 끝이 없는 트랙임을.
이 제 나의 적들의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이름만 남은 ‘자격증 장사 브로커’가 된 대학. 그것이 이 시대 대학의 진실이다. 국가와 대학은 자본과 대기업의 ‘인간 제품’을 조달하는 하청업체가 되었다. 기업은 더 비싼 가격표를 가진 자만이 접근할 수 있도록 온갖 새로운 자격증을 요구한다. 10년을 채 써먹을 수 없어 낡아 버려지는 우리들은 또 대학원에, 유학에 돌입한다. ‘세계를 무대로 너의 능력만큼 자유하리라’는 넘치는 자유의 시대는 곧 자격증의 시대가 되어버렸다. 졸업장도 없는 인생이, 자격증도 없는 인생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학습된 두려움과 불안은 다시 우리를 그 앞에 무릎 꿇린다. 생각할 틈도, 돌아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또 다른 거짓 희망이 날아든다. 교육이 문제다, 대학이 문제다라고 말하는 생각있는 이들조차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성공해서 세상을 바꾸는 ‘룰러’가 되어라", "네가 하고 싶은 것을 해. 나는 너를 응원한다", "너희의 권리를 주장해. 짱돌이라도 들고 나서!" 그리고 칼날처럼 덧붙여지는 한 줄, "그래도 대학은 나와야지". 그 결과가 무엇인지는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도.
큰 배움 없는 ‘大學 없는 대학’에서 우리 20대는 ‘적자세대’가 되어 부모 앞에 죄송하다. 젊은 놈이 자기 손으로 밥을 벌지 못해 무력하다. 스무살이 되어서도 꿈을 찾는 게 꿈이어서 억울하다. 언제까지 쫓아가야 하는지 불안하기만 하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작은 탓을 묻는다. 이 시대에 가장 위악한 것 중에 하나가 졸업장 인생인 나, 나 자신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 대학을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시들어버리기 전에. 쓸모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인간의 길은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겐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상처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생각한대로 말하고 말한대로 행동하고 행동한대로 살아내겠다는 용기를 내련다. 이제 대학과 자본의 이 거대한 탑에서 내 몫의 돌멩이 하나가 빠진다. 탑은 끄떡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학을 버리고 진정한 大學生의 첫발을 내딛는 한 인간이 태어난다. 내가 거부한 것들과의 다음 싸움을 앞두고 말한다. 그래, “누가 더 강한지 두고 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