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 파업이 남긴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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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파업이 남긴 것
김어진
이번 철도 파업 철회가 연승 가도를 달리던 노동자 운동에 패배를 안겨 준 것을 부인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철도 파업의 패배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철도 파업이 남긴 교훈을 곱씹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무엇보다, 철도 파업은 노무현 정부의 반노동자적 본질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노무현은 이전 정부의 반노동자적 악독함과 교활함까지 그대로 빼닮았다.
지금 노무현과 철도청은 파업 참가자 8천6백48명을 중징계하고 1백억 원에 달하는 손배가압류를 추진하고 있다. 두산중공업 파업은 노조에 대한 가압류를 철회시켰다. 노무현은 가압류 철회를 약속해 놓고 다시 손배가압류를 노조 탄압의 무기로 사용하고 있다.
노무현은 ‘지나치게 노동자들한테 양보하는 것 아니냐’는 우익의 불만을 씻어 내기 위해 철도 노동자들을 제물로 삼았다. 〈조선일보〉는 경찰력 투입 직후 노무현이 ‘올바른 길을 택했다’며 만족해 했다.
노무현 정부가 내건 토론 공화국의 이미지가 완전한 사기임도 드러났다. 노무현은 철도노조와 어떤 대화와 협상 자체도 거부했다. 노무현은 4월 20일 노·정 합의를 어긴 것은 자신인데도 노조가 합의를 어겼다며 뻔뻔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위기감
결과적으로, 철도 파업에 대한 노무현 정부의 강경 대응은 노무현 정부의 본질을 배우는 학습 효과를 냈다. 경찰력 투입 당일 정광훈 민중연대 상임 대표는 노무현 정부 규탄 집회에서 “이 정부는 없어져야 할 정부”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적어도 철도 노동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다.
철도 노동자들에 대한 마녀사냥식 탄압은 노무현 정부가 내세우는 ‘대화와 타협을 위한 노사 문화’나 노사정위 같은 계급 타협주의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을 가지기 어려운 조건을 만들었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일련의 거대 노조들의 파업 때문에 정권이 날아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흐르고 있었다.
철도 파업이 어떻게 마무리되느냐는 한국의 자본가들과 해외 자본가들한테 주목을 받았다. 이미 화물연대와 조흥은행의 파업은 국제 자본가들의 관심의 초점이 된 터였다. 실제로 영국의 BBC 방송은 두 파업을 연일 아시아 뉴스의 머릿 기사로 보도했다. 노무현 정부 내에서는 우파와 자본가들의 신임을 얻기 위해서라도 이전 파업 때처럼 밀려서는 안 된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그러나 노무현 정부가 강경했던 것에 비해 철도 노조의 지도자들은 단호함을 보이지 않았다.
철도 파업을 평가할 때 철도 지도자들의 굴욕적 배신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철도노조 위원장은 “파업 동력 부재”를 파업 철회의 이유로 꼽았다. 그러나 파업 동력이 미비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정부의 복귀 명령을 비웃기라도 하듯 열차 운행의 핵심인 기관사의 83퍼센트가 업무에 복귀하지 않았다. 6월 28일 연세대에 경찰력이 투입됐을 때 대열 끝부분에 있던 노동자들은 스크럼을 짜고 경찰과 격렬한 몸싸움을 벌였다.
기관사들의 복귀률이 낮아 화물열차의 운행률은 파업 이틀째에 이미 8퍼센트로 줄어들었다. 시멘트와 석탄 출하가 안 돼 건설과 화력발전소 가동 중단 사태가 거론되자 정부는 마른 침을 삼키고 있었다. 통쾌하게도 화물연대는 시멘트 등 철도 화물의 대체 운송을 거부했다. 더 나아가 화물연대는 “철도 노조 파업 지원 투쟁의 일환으로 화물연대 파업 일정을 앞당길 예정”이었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놓고 노무현 정부와 노동자들 간의 거대한 한 판 격돌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조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어떤 양보안을 내놓은 것도 아닌데도 파업 철회를 결정했다. 이것은 많은 철도 노동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이미 파업 철회 전 날, 철도노조 위원장이 파업 철회를 발표할까 봐 각지에 흩어져 있던 철도 노동자들 일부는 순식간에 민주노총에 모여 혹시 있을지도 모를 기자회견을 막으려 했다. 강원도에서 세 시간 택시를 타고 헐레벌떡 뛰어온 노동자도 있었다.
노동자들은 밤 10시의 기자회견을 한 차례 막았다. 그들의 얘기는 거의 한결같았다. “아니 정부의 협상안이 나온 것도 아닌데 왜 미쳤다고 철회를 하려 하느냐?”
파업 철회 과정에서 민주노총 지도자들도 사태를 반전시키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되레 민주노총과 공공연맹은 철도 노조 지도부가 파업을 철회하는 것을 직접·간접으로 도왔다. 발전노조 위원장은 7월 1일 연세대에 집결한 노동자들 앞에서 “파업을 하느냐, 복귀를 하느냐,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조합원들이 끝까지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관건”이라고 발언해, 사실상 철도노조 지도부에 힘을 실어 주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무현 정권과의 전면전”을 주장했지만, 철도 파업을 지지하는 연대파업을 실질적으로 추동해 낼 이렇다 할 계획을 내놓지 못했다.
노무현 정권에 대한 태도
파업 동력에 근본적 한계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왜 파업을 철회한 것이냐는 의문을 던져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물음이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노조 지도자들의 태도가 파업 철회의 주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노조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가 그리도 단호한 태도를 보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듯하다. 노조 지도자들은 경찰력 투입 직후 “적절한 조치”였다며 만족해 하는 노무현을 보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6월 30일 철도구조개혁법안이 즉각 통과되자 노조 지도자들은 더욱 동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노무현 팀은 철도노조 안팎에서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부지런히 압력을 넣은 듯하다. 부산 지역에서 청와대의 문재인이 ‘노동자를 위한 연대’ 같은 노동법률상담소 등을 통해 그 지역 노조 지도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정보가 있다. 또, 박태주도 공공부문노조와 철도노조에 영향을 미쳤다는 정보도 있다.
“파국을 막아야 한다.”는 식의 타협 논리를 거스를 태세가 돼 있지 않았던 까닭에 철도 노조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의 단호함에 맥없이 주저 앉았다.
노무현 정권의 본질이 변한 게 아니라 애초에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정부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는 것은 너무도 중요했다. 애초에 적지 않은 노조 지도자들이 공사화가 사기업화의 수순 밟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노무현 학습 효과
적지 않은 활동가들이 이번 철도 파업 철회로 패배감에 빠져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럴 이유는 없다. 설사 전투에서 패배했다 해도 이번 파업 철회가 전쟁에서의 패배를 뜻하지는 않는다.
독단과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이 신자유주의 정부는 3차 금융 구조조정과 사기업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려 할 터인데 지금까지 한국 노동자 운동의 패턴을 본다면 이제 더욱 본격적인 격돌이 예고된다. 경제 위기는 이것을 더욱 부채질할 것이다. 세계경제가 위기에서 헤어날 조짐을 보이지 않고 한국경제 위기는 급랭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반노동자적 본질이 분명하게 드러난 지금, 장차 노동자들의 정치 의식이 ‘노무현 학습 효과’를 통해 고양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노무현은 배신적인 노조 지도자들 덕분에 잠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 정부의 일시적 안도감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철도 노동자들은 정부 탄압에 저항하는 연대를 호소하고 있다. 7월 11일 과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철도 노동자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었다. 규모는 적은 집회였지만 전투적인 철도 노동자들이 불씨를 되살리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철도노조 지도자들의 파업 철회로 말미암은 좌절감이 우리의 연대를 저해해서는 안 된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싸우는 한은 그들을 지지해야 한다. 현장 노동자들도 그들을 지지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