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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민주주의?

전국적인 선거 절차도 엉망이고, 각 지역에서는 지역 정치인과 정치 관료들이 선거 제도를 악용하고 있는 나라를 상상해 보라. 더욱이 한 대선 후보의 동생이 중요한 경합 지역을 통제하고 있고, 그 동생의 동료들이 다양한 투표 절차를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압도 다수의 사람들, 즉 이 선거 제도를 못마땅해 하고 있고 이 선거 제도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 투표권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방해받거나 심지어 투표권을 박탈당했다고 생각해 보라. 때로 단순한 마약 소지죄로 유죄 평결을 받은 것 때문에 투표권을 박탈당한다고 생각해 보라. 선거 절차에서 이러한 문제점을 가진 나라라면 국제적인 유엔 감시단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은 민주주의를 보호한다며 이 나라에 개입할 의사를 분명히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땅"이자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민주주의"라는 말 뒤에는 추악한 진실이 숨어 있다. 가난한 사람들을 경멸하고 두 명의 백만장자 대기업 후보 중 한 명을 선택하도록 하는 종류의 '민주주의'는 실제 선거 절차를 똑같이 경멸하고 있다. 투표 제도는 복잡하고 기괴하며 또 혼란스럽다.

선거 분쟁이 일어났던 미국 남부의 주 플로리다는 조지 W 부시의 동생 젭 부시가 주지사로 있는 곳이다. 이 곳의 투표 용지는 고어에게 표를 던지려 했던 많은 사람들이 의도치 않게 극우익 후보인 팻 뷰캐넌에게 표를 던지도록 만들어졌다. 또, 플로리다 주의 일부 지역에서는 흑인들이 투표를 하지 못하도록 방해나 차별이 이루어졌다는 많은 증거들이 있다. 선거 초반에 67살의 한 노인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 음악 프로그램 진행자의 말을 듣고 투표하러 갔지만 경찰의 방해를 받았다. 흑인이나 중남미계 미국인들이 투표하기 위해서 별도의 신분 확인을 하느라 몇 시간을 허비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 전국흑인권익증진협회(NAACP)는 이러한 추문에 대한 항의 행동을 조직했다.

이러한 일이 플로리아 주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았다. 미국 전체에서 이와 비슷한 일들이 벌어졌다. 여러 도시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민주주의가 사라진 것에 항의하고 더욱 공정한 선거 제도를 요구했다. 승자가 없는 선거라는 점이 이번 선거의 최대 특징은 아니었다. 부시와 고어는 추구하는 정치뿐 아니라 득표면에서도 사실상 동일하다. 그러나 이번 선거 결과는 정치적인 난국뿐 아니라 이보다 더 많은 것을 보여 준다. 이번 선거에서는 대기업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두 후보로 이루어진 미국의 양당 체제가 무가치함을 드러냈을 뿐 아니라 두 후보와는 다른 대안을 추구했던 랠프 네이더 같은 사람이 지지를 얻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표현됐다. 더 극적인 사실은 이번 선거가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측면에서 매우 부패하고 또 결함도 많다는 점에서 미국 민주주의의 허구를 드러냈다. 선거 직후 끓어오르는 분노의 초점 가운데 하나는 선거 제도가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없음이 입증됐다는 점이었다.

인종과 계급

조지 W 부시가 미국의 대중 선거에서는 졌으면서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 분노의 일부였다. 이것은 미국의 선거인단 제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선거인단 제도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게 하고 그 권한을 각 주의 대표자들에게 넘겨 준다. 이 제도는 18세기에 미국을 "건국한 선조들"이 노예를 소유한 주(州)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제도다. 올해처럼 선거가 박빙의 싸움일 때 대중적 투표 결과와 패배자에게 승리를 안겨주는 선거인단 투표 사이에 불일치가 생겨날 수 있다. 그래서 언론인 크리스터퍼 히친스는 선거인단 제도를 두고서 "보통 사람들이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고안된 … 미국에서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비밀"이라고 꼬집었다.

계급 쟁점들이 이 각별히 엘리트적인 제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한편, 인종 쟁점들은 이번 선거를 둘러싼 문제에서도 거듭 등장했다. 미국의 일부 지역에서, 특히 흑인들이 투표를 하지 않도록 유도되는 일이 그 동안 있어 왔다. 그러나 올해 플로리다에서는 흑인 투표율이 증가했다. 전체 흑인 투표율이 13퍼센트인 데 비해 플로리다 주는 15퍼센트로 1996년의 10퍼센트에 비해 증가했다. 한 가지 이유는 소수인종 투표자들이 투표소에 가도록 격려하는 운동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는 젭 부시가 플로리다 주에서 소수민족과 여성 배려 제도(어퍼머티브 액션)를 중단하려는 움직임에 대한 항의의 분위기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갖은 방해 수단들이 동원되어 흑인들이 자신들의 민주적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했다. 가장 기괴한 것은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 오직 마약 소지 혐의로만 유죄 평결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투표권을 박탈한다는 판결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복역을 한 뒤에도 투표권을 얻지 못했다. 이렇게 해서 투표하지 못한 흑인이 전체의 13퍼센트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미국의 선거 제도에는 더 일반적인 불평등이 존재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가장 억압당하는 사람들이 전체 선거 제도와 투표로부터 소외돼 있다는 점이다. 어떤 추산에 따르면, 부유한 사람들은 거의 모두 투표를 하는 경향이 있다. 박빙의 승부라고 하는 이번 선거에서 절반도 안 되는 인구가 투표를 했다. 소수인종과 노동자 계급의 많은 수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 중에서 투표한 사람들은 민주당에 표를 던질 가능성이 더 많았지만, 적어도 플로리다에서는 자신들의 표가 공화당 지지자들의 표보다 더 많이 무효표가 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플로리다의 무효표 비율은 전보다 이번에 더 많았다. 재검표가 이루어졌던 가장 커다란 세 카운티인 팜비치, 브로워드, 마이애미 데이드는 플로리다 주 총 투표수의 30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무효표는 40퍼센트였다. 이들 카운티가 민주당 지지자들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이 카운티에서 무효표가 많았다는 사실은 민주당에게 더 큰 타격이었다. 공화당이 강세인 카운티에서조차 민주당 지지세가 강력한 지역이 무효표가 가장 많이 나왔다. 고어가 투표수의 99퍼센트를 획득했던 마이애미의 오버타운에서 투표수의 11퍼센트가 무효표였다.

투표의 계급 성향은 대부분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나라에서 나타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양당 체제뿐 아니라 다른 많은 요인들 때문에 투표에서 계급적 성향이 더 두드러진다. 더 많은 가난한 사람들과 흑인들이 민주당에 표를 던지는데도 민주당은 노동자들과 어떤 연계도 갖고 있지 않으며, 이 점에서 공화당과 전혀 차이가 없다. 선거에서 선택할 후보가 없어서 선거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바로 이 때문에 랠프 네이더 후보가 양당 체제의 허구를 드러내는 것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고, 또 그래서 그가 민주당의 자유주의적 권력 집단의 분노를 샀다. 네이더는 고어가 선거에서 패배하게 한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고어 자신이 선거에서 지는 길을 자초했다. 고어는 자기 고향인 테네시 주에서도 패배했으며, 호황기에 민주당에 투표할 "수밖에" 없었다는 사람들을 투표장으로 이끌어 낼 수 없었다. 소위 정치 평론가들의 통념에 따르면 고어는 거기서는 질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고어가 진 것은 선거인단 제도 때문이었다. 고어 진영에서 선거 제도에 대해 아무리 불평을 해도 두 정당은 오랫동안 이 비민주적이고 부패한 방식을 계속 주관해 왔고 노획물을 자기들끼리 나누어 가질 태세가 돼 있었다. 네이더가 거둔 성공 중의 하나는 미국의 심장부에 민주주의가 없다는 점을 드러낸 것이다.

취약한 정부

네이더로서는 가슴 아프게도 특히 민주당 좌파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공화당원들은 똑같은 비판을 팻 부캐넌에게 가할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 현 상태에 대한 도전이 민주주의의 확대가 아니라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으로 ― 과두 지배 계급의 눈에 ― 보인다는 점이 체제가 부패했음을 보여 주는 징후다. 그러나 과두 지배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네이더의 가장 중대한 범죄는, 소수는 엄청난 부를 지배하지만 대중은 가난해졌다고 느낄 정도로 깊이 분열돼 있고 불평등한 사회의 감추어진 진실을 네이더가 분명하게 들춰 냈다는 점이다. 네이더는 또한 1년 전 시애틀에서부터 발전한 반자본주의 운동의 상징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비쳐지고 있다. 네이더에게 던진 표와 선거 과정 전체에서 노정된 난국은 확산되고 있는 정치적 불안정과 대중의 불만의 산물이다.

이번 선거를 통해 선거인단 제도, 투표용지 조작, 개표 부정의 문제가 제기됐으며, 앞으로 헌법을 개정해야 한다는 요구도 제기될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지금의 제도 때문에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르기 시작했다. 선거 결과는 이러한 생각을 더욱 굳히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부시의 당선이 확정됐어도 이번 선거 혼란으로 인해 새 정부는 매우 취약한 정부가 될 것이다. 선거에서 난국에 빠졌던 두 당은 정책에서 타협의 필요성을 더 느낄 것이며, 대외정책 같은 쟁점을 둘러싸고 어느 정도 제약을 받을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불안정성이 정치 제도에 반영되고 있으며, 이것은 미국과 세계의 여러 곳에서 증대되는 반자본주의 운동에는 좋은 소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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