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1948년 미국이 남한을 점령했을 때:
저들은 분단과 전쟁의 상처만을 가져다 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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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패배하자 연합국이었던 미국과 옛 소련은 한반도를 둘로 나눠 주둔하기로 합의했다. 미국이 38선을 임의로 정했고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군소리 없이 받아들였다.
해방의 기쁨에 휩싸인 한국인들은 그것이 분단의 시작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처음에 한국인들은 대부분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고 그들을 무장 해제시켜 본국으로 돌려보낸 뒤 한국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미국과 옛소련은 한반도의 즉각 독립을 원하지 않았다. 이미 카이로회담(1943년 11월)과 얄타회담(1945년 2월)에서 그들은 전후 한반도를 신탁통치하자고 의견을 모았다.
강대국들이 신탁통치 안을 내놓은 것은 한국인들에게 자치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1920∼1930년대부터 성장한 한국의 독립 운동 단체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이 진정으로 걱정한 것은 그 단체들이 대부분 미국이 보기에 너무 좌익적이라는 점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전쟁 말엽 한국 상황에 대해 평가하면서 이렇게 예측했다. “일제 통치가 이완되면 한국의 혁명가들과 저항 세력들에 의한 공격이 있을 것[이다.]”
분할 점령
미군이 인천항에 발을 딛은 첫 날부터 점령은 피로 얼룩졌다. 미군을 환영 나간 한국인 2명이 일본군 총에 맞아 죽고 10명이 다쳤다.
미군 사령관은 이 날의 일본군 만행을 지지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맥아더는 조선총독 아베에게 한국의 질서를 유지하고 총독부를 보존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미군이 남한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조선인민공화국과 그 산하 지방 인민위원회가 조직돼 있었지만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총독부는 버젓이 유지시켰으면서 말이다.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도 미국은 일본군을 이용해 좌익 운동을 탄압하고 있었다.
한국인들은 자신들을 해방하러 온 사람들이 자신들을 탄압하기 위해 옛 억압자들을 이용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미군 사령부는 한국인들의 환상을 여지없이 깨뜨려 버렸다. 9월 말쯤이 되자 한국인들은 일본의 지배가 미국의 지배로 대체됐을 뿐이라고 여겼다.
미군정의 보좌관들은 남한에 파견된 미군 요원들에게 “점령의 일차적인 목적은 공산주의에 대한 방벽을 만드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것의 주된 임무는 토착 좌익 세력을 분쇄하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인민위원회 간부들을 이유 없이 체포하고 죄를 거짓으로 꾸며 내어 유죄 선고를 내렸다. 미군정은 이들에 대한 군사 재판이 시작되기도 전에 판사에게 형량을 전달하곤 했다.
1945년 12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인민공화국의 활동을 탄압하기 위해 2만 5천 명 규모의 중앙 경찰을 창설하게 해 달라고 본국에 요청했고, 트루먼은 이를 승인했다.
미군정은 일제 경찰을 보조했다가 해방 후 숨어다니던 한국인들을 재빨리 긁어모았다. 경찰 조직 임무를 맡았던 미군 대령 매글린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들이 만약 일본인들을 위해서 좋은 일을 했다면 우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역할을 하리라 생각했다.”
또, 미군정은 40년 동안 미국에 체류한 이승만을 남한의 통치자로 내정하고 그가 미국에서 귀국하자마자 5만 군중을 동원해 환영 행사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공산주의자들을 격렬하게 비난했다.
미군정은 탄압과 공작을 폈지만, 인민위원회의 대중 기반을 붕괴시키기는 어려웠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 본국에 보내는 보고서에서 한국인들은 이승만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고 시인했다.
저항
미군 점령 아래서 남한 민중의 삶은 날로 악화됐다. 일제 식민 통치 하 한국 민중의 삶은 처참했지만 미군정 아래서 상황은 훨씬 더 나빠졌다.
쌀은 구할 수 없었고 물가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뛰어올랐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에 남한 민중은 일본인들의 재산을 접수하기 시작했다. 소작인들은 토지를, 노동자들은 공장을 접수해 스스로 경영했다. 그런데 미군은 진주하자마자 일제의 소유대장문서를 이용해 농민과 노동자를 토지와 공장에서 내몰았다.
농민들은 가난한 소작농 신세로 돌아갔다. 일제 통치 아래서는 쌀에 대해서만 고정된 비율의 소작료제를 실시했는데, 미군정은 모든 곡식에 대해 그 제도를 강요했다.
노동자들은 ‘군정법령 19호’에 의해 파업권을 박탈당했고 투쟁 참가 호소는 모두 불법으로 규정됐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이하 전평)는 “쌀을 달라”, “임금을 인상하라”고 미군정에 요구했다. 미군정은 이를 무시했다.
9월 23일 부산 철도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이번에도 미군정은 전평의 요구를 무시했다. 전평은 총파업을 선언했고 성난 노동자들 30만 명이 이 파업에 참가했다.
미군정은 대구 시위를 잔인하게 진압했다. 경찰의 총에 맞아 41명이 살해됐다. 미군정은 계엄을 선포하고 시위자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이에 격분한 학생 10만 명이 노동자들을 지지해 시위에 나섰다. 잔혹한 진압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사살됐다. 체포된 1천3백42명 가운데 16명이 사형당했다.
투쟁은 각 지역으로 확산돼 10월 인민항쟁으로 타올랐다. 미군정은 투쟁을 무지막지하게 분쇄하고 전평과 좌익 조직들을 파괴했다. 감옥은 만원이었고 수백 명은 산으로 들어가 게릴라가 됐다.
이승만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은 모든 문제를 유엔으로 넘기자고 제안했다.
미국이 제안한 선거 계획은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세워 자국의 지배를 받게 하려는 의도였다.
1947년 10월 미국은 국회의원 선거 감시 임시위원단을 한반도에 파견하기 위해 유엔 총회에 결의안을 제출했다. 소련은 이에 반대했다. 그러나 유엔 총회는 소련의 반대를 무시하고 미국의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한국에 파견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활동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았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유엔에 다음과 같은 2차 보고서를 보냈다. “위원단은 좌익 단체들과 접촉하기 대단히 어려웠으며, 좌익 단체 대표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감옥에 있거나 수배중이었다.”
그 무렵 대규모 단독 선거 항의 시위가 있었고, 이에 대한 탄압으로 1946년 상반기에 8천 명 이상이 구속됐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사면을 제안하자 미군정 사령관 하지는 “남한에는 정치범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단독 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은 좌파만이 아니었다. 이승만 일당을 제외한 모든 세력이, 심지어 우익조차 단독 선거에 반대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유엔한국임시위원단 내에서조차 분열이 일어났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 대표는 명분 없는 선거를 감시할 수 없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자국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위원들은 곧 비민주적이고 불공정한 업무로 복귀했다.
선거는 경찰과 이승만 일당의 깡패 조직들 때문에 폭력으로 얼룩졌다. 선거 열흘 전에 323명이 이런 폭력에 의해 살해됐고 1만여 명이 체포됐다.
출마자는 거의 모두 이승만 일당이었고, 유권자들은 대부분 투표 참가를 저지당했거나 이승만 일당 지지를 강요받았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남한에서 가르친 첫 ‘민주주의’ 수업이었다.
미국 국무부는 “약 80퍼센트의 유권자가 등록해 이들 가운데 92.5퍼센트가 열렬하게 투표에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미국의 거짓말과 유엔의 옹호 속에 친미 독재 정권이 탄생했다. 1948년 5월의 선거는 한반도를 영원히 분단시키고 이승만 일당에게 권력을 주는 형식적 절차였다. 이승만은 무지막지한 정치 탄압을 자행했고 북진 통일을 공공연히 얘기할 정도로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미군은 한반도에 “해방군”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3년 간의 미군정은 한반도를 분단시키고, 위기를 한층 격화시켜 전쟁으로 가는 길을 닦았을 뿐이다.
한국전쟁 - 유엔의 이름으로 자행된 학살
남북한에 들어선 이승만 정권과 김일성 정권은 둘 다 무력 통일을 부르짖었다. 38선에서는 소규모 전투가 끊임없이 계속됐다.
이승만은 미국에게 공격용 군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구했다. 일본 주재 미국 국무성 대표 윌리엄 세발드는 “무장이 갖춰지면 이승만은 즉각 38선을 넘어 북으로 공격해 들어갈 것”이라고 걱정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승만은 골치 아프고 위험스런 존재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부패한 이승만 정권을 지탱하고 있었다. 미국은 극동에서 자국의 이해관계를 지키기 위해 이승만이라는 카드를 간단히 내버릴 수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시작됐다. 처음에 남한군은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곧 미군을 투입하고 북한을 공습하라고 명령했다.
이 전쟁이 단지 미국만의 관심사가 아닌 듯이 보이기 위해 유엔 긴급 회의가 소집됐다.
1년 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석은 여전히 장개석 정권이 차지하고 있었고, 이 이유 때문에 러시아는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보이코트하고 있었다.
덕분에 미국의 전쟁결의안은 쉽게 통과됐다. 훗날 합동참모본부의 한 연구서가 인정했듯이 “미국 정부는 단독으로 무장 개입을 결정해 놓고 다음날 유엔의 승인과 지원을 구했다.”
유엔 덕분에 미국은 이 전쟁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면서 여론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
2백만 명의 미군 부대가 유엔의 깃발 아래 한국에 파병됐다. 유엔은 여기에 4만 명을 보탰다. 유엔총사령관은 미국 장군 맥아더였다.
맥아더는 유엔의 이름으로 북한을 공습해 초토화시켰다. 모든 건물과 공장과 도시와 마을이 파괴됐다.
전쟁 기간 동안 트루먼은 핵 폭탄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중”이라고 발표했다. 맥아더는 사후 출간된 인터뷰에서 “30∼50개의 핵 폭탄을 투하하려 했다”고 말했다.
핵 폭탄은 사용되지 않았지만 온갖 야만적 수단들이 동원됐다. 이 전쟁으로 한국 양민 2백만 명이 학살됐고 한반도 전체가 수십 년쯤 퇴보했다.
유엔의 깃발이 양민 학살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이 말은 이라크 파병에도 적용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