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도, 85호 크레인 답사기
〈노동자 연대〉 구독
1
사람들이 다 돌아가고 나서 김진숙 지도위원은 트위터에 웬 토마토 사진을 올렸다.
“만 명이나 모인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같은 꿈을 꾸다 같은 고통을 당하는 일. 그러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게 희망임을 오늘 작은 생명에게 배웁니다.”
사진 속의 방울토마토는 아직 빨간색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괜히 신이 났다. 빨갛게 익으려면 더 많은 햇빛과 비가 필요했다. 빗소리가 여전히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2
시청역에 도착하자 오후 1시에 때 아닌 러시아워가 몰아치고 있었다. 송경동 시인의 185대 버스 구상을 들은 건 유성기업 집회 때였다. 185대면, 어림잡아도 7천 명이 넘었다. 7천 명이 일시에 부산이라니! 좋은 기획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어쩌겠나. 못내 미심쩍었다.
그런데, 얼쑤. 재능교육 농성장 앞이 발 디딜 틈 없어졌다. 학생들은 모여서 민중가요를 합창하고, 재능교육 농성장에서는 뭔가 발언을 하고, 누구는 간식을 사 오고, 누구는 벌써 뭘 우물우물 씹고. 185일째 크레인 위에 있는 그녀를 만나러 가는 길은... 그렇다. 수천 명 단체 소풍 같았다. 이럴 수가, 소풍 인원이 수천 명이라니.
학창시절 도합 12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소풍을 즐겁게 가 본 적이 없었다. 대체로 왕따를 당하고 있거나, 친구가 없었거나, 유일하게 한 명 있는 친구와 싸운 상태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꼬박 1년 동안 같은 반이었던 학창시절의 ‘학우’들보다, 이 수천 명이 더 마음을 놓이게 했다. 버스가 하나씩 도착해서 사람들을 태우고 가고, 태우고 갔다. 하지만 도무지 이 수천의 인파는 줄어들 생각을 안 했다. 즐겁게도 말이다.
버스 안에서 우리들은 영상을 보았다. 수천의 사람들이 만나러 가는 그녀는 무슨 집들이를 하듯이 카메라를 들고 휘적휘적 그 높은 크레인 위를 잘도 걸어다녔다. 조합원의 아이들이 그려준 그림, 달력, 휴대폰 배터리, (침상 같지도 않은) 침상, 그 꼭대기에서 뜬금없이 키우는 방울토마토. 크레인 위는 참 두려울 거 같았고, 무료할 거 같았고, 온갖 생각을 끌어안게 할 것 같았는데, 우리가 만나러 가는 그녀는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여기 오시면, 제가 얼굴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건 뭐, 아이돌이 따로 없다.
185대의 버스가 끝내 출발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심지어는 전국 각지에서. 8천 명이라고 보도한 신문기사 얘기가 나왔다. 8천 명이라니. 부산까지 가는 멀고 먼 소풍 인원이, 8천 명이라니. 잠깐 머릿속에 반지의 제왕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프로도이기엔 진숙 언니는 너무 멋있으니까.
옆자리에 앉은 동지가 『소금꽃나무』를 꺼냈다.
“이것은, 요즘 하나씩 끼고 다니지 않으면 트렌드세터 취급도 못 받는다는 화제의 책!”
“패션의 완성은 소금꽃나무!”
“집을 나설 때 소금꽃나무가 없으면 나선 게 아니죠!”
...
농담만은 아니다. 후마니타스에서는 『소금꽃나무』를 5천원으로 인하한 가격으로 다시 출간했다. 바로, 지금이 『소금꽃나무』를 읽을 때라는 것이다. 보통 재출간되는 책은 가격이 오르게 마련이다. 하지만 이 인기 도서는 잘 팔리기 이전에 더 많은 사람에게 읽혀야 했다. 그녀는 훌륭한 칼럼니스트이자 에세이스트다. 그녀의 글에는 분명 거친 부분이 있다. 옆에 앉은 동지는 수사가 과도하다고 했고, 나는 그걸 생각지도 못했다는 사실에 놀랐다. 하지만 그 수사를 생각지도 못한 이유는 분명했다. 그 글이 ‘진정’으로 넘치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모든 걸 던져서 진심으로 하는 이야기, 한 사람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 보이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글은 다정하면서도 단호했다. 수사적 기술이야 어쨌든 바로 이런 글을 쓰고 싶어질 정도로. 아니, 모든 수사를 깨부수는 힘이 오히려 《소금꽃나무》에는 있었다.
3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처음 맞닥뜨린 건 억수같은 비였다. 우산을 들고서는 걸음을 내딛기도 힘겨울 정도로 엄청난 비. 빗속을 뚫고 송경동 시인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해고노동자라고.
정말이었다. 정말로, 전국의 모든 해고노동자가 헤쳐 모인 것 마냥 부산역 광장이 북적거렸다. 재능 동지들과 쌍차 동지들이 희망의 버스를 타고 내려왔다고 했다. 유성기업 동지들이 야간노동 철폐하라고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사람들이 한진 노동 승리하자, 야간 노동 철폐하자를 같이 신나게 따라 외치면서 지나갔다. 이럴 수가, 우리는 진짜 모두 해고노동자였다.
서울 시청 앞을 떠나는 게 힘들었던 것처럼, 부산역 앞을 떠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빽빽하게도 많았다. 송경동 시인은 우리 모두 ‘같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희망버스를 조직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김진숙 지도위원은 김주익 열사 추모사에서 ‘비정규직을, 장애인을, 농민을, 여성을, 그들을 외면한 채 우리는 자본을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소름끼치고, 아무리 치가 떨려도 우린 단 하루도 저들을 이길 수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쌍용차에서 사람들이 외쳤던 건 ‘연대 파업’이었고, 우리는 언제나 더 많은 ‘연대’를 부르짖었다. 이 빽빽하게 많은 사람들. 부산까지 내려온 ‘연대 대오’들. 비가 여전히 억수같이 쏟아졌다. 〈빌리 엘리어트〉에서 광부들은 “모두는 하나를 위해, 하나는 모두를 위해” 라고 외친다. 똑같은 대사를 삼총사에서 달타냥이 말하는 것보다 백 배는 멋졌다.
처음 부산에 왔을 때는 락 페스티벌에 왔고, 두 번째 왔을 때는 애인이랑 놀러왔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릴 보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웬 언니 한 명이 박수를 치고 있었다. 이번엔, 정말로 부산에 왔다는 기분이었다. 비는 계속 쏟아졌지만,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비 오는 날 행진하면 힘들거나 괜히 비장한 게 보통인데, (솔직히 한진의 지금 상황은 괜히 비장할 법도 한데) 다리를 내딛는 게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대학생다함께가 유성기업에서 만들어 왔다는 피켓을 꺼냈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회’ 위에, ‘조남호를 회 뜨자’는 글씨를 보고 피식, 웃었다. 내려오는 길에 틀어주었던 영상에서는 서른두 살의 해고노동자가 말했다.
‘나 같은 사람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고, 참 기뻤죠. 올해엔 결혼하려고 했는데, 결혼하려고 하자마자 잘려버려서.’ 말을 마치고 그는 쑥스럽게 웃었다. 믿어주는 여자친구가 고맙다면서.
알까, 조남호 씨는. 그 월급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책임지고 있었는지, 그 돈으로 우리가 숨을 쉬고 걸음을 걷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어떻게 세상을 만들어 나갔는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은 배가 떠서 출항을 하면, 그 배를 보면서 자갈치시장에서 회를 한 접시 먹었을까, 어땠을까. 조남호 회장을 회 뜨자는 말을, 그 사람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까.
피켓을 들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학생들이 걸어나갔다. 불렀던 민중가요를, 부르고 또 부르고, 영도대교를 지나면서 췄던 춤을 또 추고, 또 추는데, 이상하게도 다리에 힘이 안 풀렸다. 그전에 이렇게 신나게 대합창을 한 게 대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진숙언니는 조수원 열사 추모사에서 “절망해 보지 않은 사람은 희망의 가치를 모른다. 좌절해보지 않은 사람은 다시 서는 일의 거룩함을 모른다. 그래서 우린 이미 승리했다.” 라고 했었던가. 이 수많은 사람들이 춤추고 노래하면서 다리를 건너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게 기뻤다. 그치, 부산에 왔으면 해운대는 됐고, 밀면도 됐고, 진숙이 언니만은 꼭 보고 가야 하지 않겠어?
4
언제나 그렇듯이, 우릴 기다리고 있는 건 김진숙 지도위원 이전에 경찰들이었다. 대체 어디 쓰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차들이 도로 전체를 깨끗하게 봉쇄하고 있었다. 평소에 경찰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드립을 그렇게 쳐댔는데, 오늘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시라”고 하자, 왁자하게 웃음이 터졌다. 아니, 갈 수 있어야 가야지...
비가 그치다 쏟아지다를 반복했고, 구호는 ‘정리해고 철회하라’ ‘폭력경찰 물러가라’에서 점점 더 절박해졌다. ‘김진숙을 지키자’ ‘더 이상 죽이지 마라’ 같은 구호들이 여기저기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래, 우리는 마치, 전국에서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멀리 있는 한진 중공업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해 온 왕자님 군단 같았다!
하지만 늪 속에 있는 케르베로스는 이빨을 드러내고 계속 포효했다. 여기저기에서 연행자가 생겼다는 소리가 들리고, ‘연행자를 석방하라’는 구호가 그새 추가되었다. 앞쪽에서 경찰들 손에 사노위 깃발이 꺾이는 게 보였다. 그나마 뚫을 수 있을 법한 양 사이드로 한 쪽에는 대학생다함께 깃발이, 다른 한 쪽으론 전국학생행진 깃발이 경찰들과 엎치락 뒤치락 하고 있었다. 괜히 불안했다.
스피커에 갑자기 백기완 선생이 등장했다. 앞에서 외치는 소리와 비명소리가 백기완 선생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섞여들렸다. 그래도 노부의 목소리는 여전히 쟁쟁했다. 백기완 선생의 목소리가 쨍, 하니 어두운 하늘을 쳤다. “김진숙이, 힘내라!” 갑자기 사람들의 함성소리가 높아졌다. 이건 무슨 모세의 싸움도 아니고. 김진숙이 무슨 모세의 지팡이 같지 않은가.
대치 상태가 길어질수록 사람들은 지쳐갔다. 이대로 가다가는 여기까지 와서 김진숙 지도위원 그림자도 못 보는 거 아닌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맥이 풀려서 구호를 외치지 않았다. 선창하려는 사람들이 간헐적으로 구호를 외쳤지만, 사람들은 힘없이 한 번 따라하고, 두 번째부터는 구호 자체가 유아무야 되는 게 반복되었다. 하지만 연행자가 속출하는 걸로 봐서, 앞에 있는 사람들은 여전히 힘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힘을 빼는 건 앞에서 끝없이 나오는 방송이었다. 20대 초중반 정도 되었을 법한 여성의 사무적인 목소리. 여러분들은 지금 … 으로 시작해서 … 해산해 주시기 바랍니다, 로 끝나는 그 멘트가 몇 번씩 반복되고 있었다. 뒤에 있던 동지 한 명이 “언제부터 저 여자가 방송하기 시작했지? 옛날에는 남성이 방송했던 거 같은데.” 라고 말했다.
하긴, 그러고보니 그랬다. 옛날엔 남대문 경찰서장 목소리를 그렇게 들었었다. 나중엔 열받아서 방송에서 욕도 하고 그랬었지. 이상한 일이었다. 경찰서장이 내뱉는 욕지거리 때문에 웃음도 터뜨리고, 더 열받아서 주먹질도 하고, 그럴 때 우리에게는 방송을 하는 경찰서장이라는 실체가 있었다.
“부산인데 방송 사투리로 안 하네.” 또 누가 말을 꺼내서 잠깐 웃음이 터졌다. 그러고보니까 그랬다. 부산이든 전주든 울산이든 할 것 없이 모든 경찰 방송은 새초롬한 여성의 목소리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지하철에서도, ARS에서도, 텔레마케터들에게서도 변하지 않고 일정했다. 톤 하나 바뀌지 않는 목소리. 우리가 싸우는 대상이 누군지 불분명하게 만드는 목소리, 아주 거대하고 무지막지한 ‘자본’과 ‘시스템’의 힘을 느끼게 만드는 목소리. 바로 그 목소리가 우리에게 ‘너희는 무력하다, 이제 그만 집에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때 사회자가 김진숙 지도위원에게 전화 연결을 시도하겠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전화가 걸렸다. “김진숙입니다.”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사람들의 환호가 경찰 방송 목소리 위로 덮였다. 그럼에도 끈질기게 경찰 방송은 새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더 이상의 폭력행위는 … ” 그녀는 이 목소리가 우리에게 폭력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을까. 저 뒤에 서 있을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노력하는데, 옆에 있는 아저씨가 빽 하니 경찰차를 향해 소리를 내질렀다. “누가 저 썅년 입 좀 막아, 목소리가 안 들리잖아!” ‘시스템’이 순식간에 ‘썅년’이 되어버렸다.
“ … 서로에게 힘이 되는 길이 이토록 두려운가 봅니다…… 우리는 반드시 만날 것입니다, 꼭 만나게 될 것입니다. 투쟁!”
한 어절씩 똑똑 끊어 말하던 전화가 끊겼다. 우리는 결코 비키지 않을 거라고, 물러서서 집에 가지 않을 거라고, 안에 있는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사회자가 말했다. 늪을 건널 수 있게 만드는 힘이, 끝없는 용기와 지혜가(!) 전화 한 통에 있었다니. 김진숙 지도위원은 혼자 올라가 있는 게 아니었다. 4백 명의 해고자와 함께 올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쌍용차 노조원, 유성기업 노조원, 여기 있는 사람들 전부와 함께 있는 셈이었다. 그게 바로 ‘해고당하지 않는 세상’,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 ‘등록금 때문에 자살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에 대한 꿈이니까. 아니, 여기 있는 사람이 전부 다 김진숙이었다.
사람들은 그 ‘늪’을 향해 또 우우, 몰려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안 될 거 같았는지 경찰은 물대포를 꺼냈다. “여성, 아이, 노약자, 국회의원분들은 옆으로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일단, 여성이고 아이고 물러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고. 이 상황에 물러나겠니. 그리고, 국회의원은 왜…… 하는 순간 물대포가 쏟아졌다. 색소까지 넣은 물대포도 있었다. 그 정도 물 가지고야, 어디 사람들을 막겠나. 서울에서 부산까지 억수같은 비를 뚫고 왔는데. 사람들은 낄낄대면서 또 앞으로 밀려나갔다.
물대포가 다시 머리 위로 쏟아졌다. 갑자기 기침이 정신없이 나왔다. 그렇게도 대차게 앞으로 나가던 사람들이 뒷걸음질쳤다. 아니, 뒤로 걷기 시작했다. 같이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도 못한 채 나 역시 경찰차를 뒤로 한 채 걷고 있었다. 진짜, 죽을 것 같았다. 가끔 최루액을 쏘는 걸 보거나 듣기도 했다만, 이 정도 농도의 캡사이신을 이 정도 범위의 사람에게 살포할 수 있는 거였구나.
고개를 돌려서 걸어나오는 사람들을 보았다. 수천의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여기저기에서 물을 달라는 절규가 들렸고, 조금 멀리선 웬 초등학생까지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직까지도 그 지옥같은 거리가 잊혀지지 않는다.
5
여섯 번을 토하고 나서야 속이 가라앉았다. 속이 가라앉자 팔다리를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지지는 것 같은 고통이 밀려왔다. 또 한참 시간이 지나서 손만 화끈거렸다. 그제야 문선(율동)도 보이고 노래도 들렸다. 일요일이었고, 목사님 한 분이 신도분들께 죄송하지만 오늘 오전 예배는 제끼겠다고 선언했다(안 제끼실 방법도 없으셨겠다만).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 자리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후드러 맞았는데도, 사람들은 힘이 있었다. 우리 모두는 김진숙일 수 있었다. 똑같이 죽을 거 같은 세상 속에서 어떻게든 싸워나갔다. 여전히 사람들은 아프고 괴로웠지만, 사람들은 서로 물을 나눴고, 물티슈를 나눴고, 의료진은 약을 나눴다.
아마 도착했으면 좀 더 좋은 자리에서 좀 더 편하게 공연도 보고 이런저런 프로그램들도 진행할 수 있었으리라. ‘싸우기’ 전에 우리가 얻은 건 늘 아무 것도 없었다. 어쩌면 지금 저 벽을 치고 있는 사람들은 그게 무서워서 더 심하게 이 많은 ‘우리’들을 대할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싸우기 전에 얻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서, (말하자면 돈을 벌기 위해서) 새벽에 돌아왔다. 기아차 노조분들이 일찍 떠나야 한다고 해서, 그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부산역 앞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택시가 부산역을 향하는데, 옆에 앉아있던 기아차 동지가 한 마디 했다. “저게, 크레인 아냐. 우리가 저거 볼라고 어제 밤새 싸운 거잖아.”
바다를 향한 공장 한 구석에 몇 대씩이고 커다랗게 크레인이 서 있었다. 저 크레인을 조종했을 사람들, 크레인이 들어 올린 선체에 대고 용접을 했을 사람들, 나사를 돌렸을 사람들, 저 크레인 위에서 잠자고 밥을 먹었을 사람들, 그리고 어제 한잠도 못 잤을 한 사람을 떠올렸다. 우리는 모두 그녀를 위해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 그녀 역시 우리 모두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All for one and one for all, Solidarity forever(한 사람을 위한 모두, 모두를 위한 한 사람, 연대여 영원하라).
우리는 85호 크레인을 보러 가서 끝내 그 근처에도 가 보지를 못했다. 대신 우리 마음속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세상에 다 85호 크레인이 서 있다는 걸 알고 돌아왔다. 아니, 오히려 세우고 돌아왔다. 지금 85호 크레인 밑에는 그물이 깔렸다고 한다. 권영길 의원은 “김진숙을 강제로 끌어내리려는 작전을 중지하라”고 트위터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지켜야 할 85호 크레인을 떠올린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해고당하지 않을 세상,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밤에는 잠들 수 있을 세상, 쌍용차 노동자들이 더 이상 죽지 않을 세상, 아흔아홉 번 우리가 쓰러질 지라도 단 한 번 승리해서 만들어 낼 그 세상이 바로 이 85호 크레인에 있다.
영도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아니, 지구 어디든 만국의 억압받는 자들이 하나씩 지켜내고 있을 그 크레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