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맑시즘 참가기:
혁명적 활기와 자신감이 넘쳐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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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국 런던에서 6월 30일부터 7월 4일까지 열린 대규모 포럼인 맑시즘 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왔다. 영국 맑시즘은 영국의 최대 극좌파 조직인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수십 년째 매년 개최해 온 행사로 유명하다.
특히 이번 맑시즘은 4천5백여 명이 등록해서 십수 년 만에 최대 규모로 치뤄졌다. 폐막식 때까지 1백여 명이 SWP에 가입했다고 한다. 또 5만 파운드(약 8천만~9천만 원)어치의 각종 좌파, 마르크스주의 서적이 팔렸다고 한다.
참가자가 너무 많아서 웬만한 인기 강연은 자리가 꽉 차서 사람들이 못 들어갈 정도였다. 그래서 주최 측은 내년에는 더 넓은 장소를 섭외하겠다고 했다.
각종 토론에서 젊은 청년들의 발언이 두드러졌다. 단지 고무적인 경험을 늘어놓는 수준이 아니라 정교하고 이론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발언이 많았다. 젊은 사람들 특유의 시끌벅적하고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특히 개막식 당일(6월 30일)에는 영국에서 75만 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 규모의 공공부문 파업이 열려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다.
포럼 기간 내내 강조된 메시지들은 먼저, 노동계급의 중심성이었다. 이집트 혁명과 영국 6.30 공공부문 파업은 사회변혁에서 노동계급의 힘이 중요함을 보여 주었다는 것이었다.
또 총파업과 혁명의 현실성이 강조됐다. 영국에서 6월 30일 이후 ‘총파업’은 더는 선전적 구호가 아니게 됐다. 또 이집트 혁명은 혁명의 현실성 보여 주었다는 것이다. 1년 혹은 반년 전만 해도 혁명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조직의 중요성도 강조됐다. 영국 6.30 파업은 저절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SWP가 노조의 기층 네트워크를 움직여 상층 관료들에게 압력을 넣은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혁명적 조직 없이는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같은 기회는 평생 다시 오지 않는다’며 혁명 조직에 함께할 것을 호소하는 주장이 거듭됐다.
그리고 ‘가을에 4백만 명 규모의 총파업을 성사시키자’, ‘노조 지도자들이 10월 언제쯤 더 큰 파업을 하겠다고 공언했는데 구체적인 날짜를 박아야 한다’, ‘그들의 말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분발하자’, ‘총파업은 전면 파업, 무기한 파업이어야 한다’, ‘10월 2일 보수당 전당대회를 박살내자’, ‘파시스트 정당(EDL)이 선거에 나오지 못하게 본때를 보여 주자’는 자신감 넘치는 주장들이 넘쳤다.
강연 중에는 ‘혁명을 이해하기’가 눈에 띄었고, 아랍 혁명도 단연 굵직한 주제였다. 나는 이 밖에 ‘위스콘신 이후 미국 노동계급은 어디로?’, ‘경찰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정치 혁명에서 사회혁명으로’, ‘엥겔스와 가족의 기원’, ‘세상에 사람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인가’ 등의 강연을 들었는데 차후에 기회가 되면 소개하겠다.
불평등이 한 사회의 평균 수명, 유아사망률, 정신병 발병률, 비만율, 범죄율, 학업 성취도 등 각종 사회 지표에 끼치는 해악을 체계적으로 분석한 연구서, 〈The Spirit Level〉을 써서 영미권에 일대 논쟁을 불러온 저자 리처드 윌킨슨이 같은 주제로 강연을 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영국 맑시즘의 위상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젊은 사람들의 관심사를 고려한 듯 음악, 문학, 예술 등을 주제로 한 강연도 많았다. 최근 경찰 폭력의 수위가 부쩍 높아진 것을 반영한 듯 경찰을 주제로 한 강연도 많았다.
포럼 동안 발언자가 많을 때는 여성 발언자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거나 사회자로 거의 대부분 여성을 배치하는 등 성평등적 조직 방식도 인상적이었다. 진행팀원들은 거의 대부분 젊은 학생들이었다.
맑시즘 마지막날 폐막식에서는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사메 나기브가 연설했다.
“이번 맑시즘의 메시지는 세 가지다. 하나, 이 체제는 지속 불가능하다. 둘, 체제에 맞선 저항이 본격화하고 있다. 셋, 혁명적 조직이 필요하다.
아랍 혁명에 맞선 서방의 개입은 당신들이 막아달라. 장군들은 우리가 알아서 손볼 수 있다. 시리아에서는 아직 노동계급이 무대에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는 이집트 노동자들이 시리아 노동자들에게 ‘오직 당신들만이 혁명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게 하려 애쓰고 있다.
수에즈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되고 있다. 몇 주 전에 전력 노동자들은 ‘추가적 행동’을 예고한 바 있다. 장군들은 이들에게 ‘제발 전기만은 끊지 말아달라’고 애원했다. 그러자 전력 노동자들은 ‘한 번 논의해 보겠다’고 응답했다. 그 정도로 노동자들의 힘이 세다.
이집트 역사상 최대의 파업 물결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집트인들은 군 원수의 해임과 무바라크의 처형을 요구하고 있다. 스페인에서의 시위 장면을 TV로 본 이집트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왜 스페인 사람들은 경찰서를 습격하지 않을까? 우리는 혁명 3일 만에 경찰서를 덮쳤는데 말이지. 3일 만에!’”
개막식
개막식 연사는 니코스 루도스(그리스 사회주의자), 제스 에드워즈(영국 전교조 활동가), 케말 아부 아이타(이집트 징세원 노조 위원장), 루비(영국 대학생 점거 운동 지도자), 마크 캠벨(강사 노조 활동가), 주디스 오어(SWP 중앙위원) 등이었다.
니코스는 이렇게 연설했다. “바로 어제와 그저께 그리스에서도 48시간 총파업이 일어났다. 20년 만에 처음이다. 타흐리르 광장이 마드리드와 아테네에서 재현되고 있다. 그리스 사태는 노동자들이 끊임없이 학습하는 과정이다. 이제 긴축이 그리스 사태의 해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9.5퍼센트에 불과하고 25퍼센트의 사람들은 외채를 갚지 말고 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여긴다. 전직 총리는 언론 인터뷰에서 ‘시위를 이대로 놔 두면 러시아에서 군중이 동궁을 습격했을 때와 비슷한 상황으로 갈 수 있다’고 말했다. 저들은 혁명을 실제로 두려워하고 있다.”
제스는 “노동계급이 죽었다고 말하던 사람들 다 어디로 갔나? 오늘은 정말이지 내 생애 최고의 날이다. 교사 보조들도 교사들의 피켓 라인을 존중했다. 감동적인 연대의 모습이었다”며 6.30 파업에 감격해 했다.
다음으로 이집트 연사가 연단에 오르자 청중의 박수와 환호와 구호 소리로 장내는 일대 아수라장이 됐다. 케말은 이렇게 연설했다.
“이집트는 오랜 세월 외세에 점령당해 왔는데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이집트를 점령하고 있다. 비록 무바라크가 물러났지만 여전히 우리 작업장에는 수천 명의 무바라크들이 포진해 있다. 지방의회에도 구정권 세력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이틀 전에 우리는 지방의회를 해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집트 어용 노조도 해체 대상이다. 경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이 아닌 위기의 주범들이 치르게 하겠다.”
루비는 “대학생 점거 운동에 참여한 것이 자랑스럽다. 지난해 가을 학생들의 행동이 노동자들을 고무해서 오늘의 총파업을 가능케 했다”고 연설했다.
마크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각성이 시작됐다. 10월에는 4백만 내지 5백만 명의 노동자 파업이 가능하다. 총파업이 더는 추상적 구호가 아니다”고 주장했다.
마지막 주디스의 연설은 특히 인상적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우리는 체제가 우리에게 가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우리가 체제에 가하는 반격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됐다. 역사의 객체에서 주체로 바뀌는 느낌은 정말 엄청난 것이다. 그렇게 된 것은 결정적으로 이집트 혁명 덕분이다. 우리는 이집트에 엄청난 빚을 졌다. 이 빚을 어떻게 갚을 수 있을까? 이집트 활동가의 말로는 ‘당신 나라에서 혁명을 만드는 것’이다. 보수당은 우리에게 ‘돈이 없으니 긴축을 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명의 특권층 기생충들(케이트와 윌리엄)이 결혼한다고 난리법석을 떨 때는 그런 얘기 한마디도 안 했다.(환호와 박수) 오늘은 역사적인 날이었다. 오늘의 성공에 SWP도 한몫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하루 파업으로는 불충분하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노조 지도자들이 말한 가을 총파업의 날짜를 박는 것이다. 전면, 무기한 파업이 필요하다. 혁명이라는 말이 1년 전에는 사람들에게 와닿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오늘은 와닿는다. 혁명의 승리를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SWP 주변을 서성이고만 있었다면 더 이상 시간 낭비하지 말고 가입하라.”
주디스의 연설은 흡입력이 대단했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심장에 꽂히는 듯했다.
끝으로, 한 SWP 당원이 모금 호소를 했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 재정 문제로 방해 받지 않도록 합시다.”
흥미 있었던 강연1
리비아, 전쟁, 그리고 혁명
‘리비아, 전쟁, 그리고 혁명’은 영국 SWP 활동가인 시문 아사프와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의 활동가 질베르 아슈카르의 패널 토론이었다.
사이먼은 이렇게 발제했다.
“리비아인들은 카다피 정권의 저격수들에 맞서 돌멩이로 저항하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 줬다. 카다피는 아랍인들 대다수에게 증오의 대상이다. 처음에 카다피 정권은 붕괴의 조짐을 보였지만 곧 반격에 나섰다. 시위대 백만 명이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의 녹색 광장을 가득 메웠는데, 혁명 10일째부터 정권은 이들에게 공중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반란 지도부인 전국 위원회의 성격이 변질되기 시작했다. 특히 UN 대표단이 전국 위원회를 접촉하고 정권에서 이탈한 카다피의 전 측근들이 합류하면서 그렇게 됐다. 그 결과 벵가지를 비롯한 리비아 동부에서는 아래로부터의 자발적인 조직이 붕괴했다. 이는 서방의 지원 없이 홀로 정부군에 맞서 싸우고 있는 미수라타에서 시민군 조직이 고도로 발달한 것과 대비된다. 리비아 동부에서 나토군은 시민군에게 무기를 지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동부를 무장해제시키고 있고 전혀 필요 없는 경찰차만 들여놓고 있다. 명분이 무엇이든 간에 서방 개입의 본질은 언제나 똑같다.”
질베르는 이렇게 발제했다.
“일부 급진 좌파와 스탈린주의자들은 내가 제국주의를 지지했다거나 소위 ‘인도주의적 개입’을 지지했다고 비난하는데, 말도 안 되는 비방이다. 나는 서방 개입의 의도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 서방 개입의 경제적 동기는 석유를 장악하고 전쟁 재건 수요를 창출하는 데 있고, 정치적 동기는 뒤늦게라도 아랍 혁명을 편드는 척하는 데 있다.
그러나 리비아 반군들 자신이 비행 금지구역을 요청한 상황에서 우리가 거기에 반대할 수는 없었다. 단, 며칠 간의 폭격으로 일단 카다피의 공군이 파괴된 뒤에는 ‘폭격 중단’과 ‘반군을 무장시키라’는 요구로 전환해야 했다. 벵가지가 포위된 상황에서 대량 학살을 피하려면 대안이 없었다. 그렇게 해서 리비아 혁명이 패배했다면 아랍 혁명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사실 리비아 개입 반대 운동이 역대 반전 운동 중 가장 규모가 작았던 것도 반전 운동 진영이 벵가지의 운명에 너무 냉담해 보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무작정 개입을 반대하기보다 ‘반군을 무장시키라’고 요구했다면 훨씬 더 호소력이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주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는 카다피가 축출되더라도 반전 운동이 아닌 나토가 그 공을 차지하게 돼 버렸다.”
플로어 토론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질베르의 주장을 반박했다.
얼마 전 한국에서 강연을 했던 제이미 앨린슨은 “리비아 개입 문제를 더 큰 그림 속에서 살펴봐야 한다. 미국은 리비아를 폭격함과 동시에 바레인에 대한 사우디 군대의 침공을 승인했다. 둘은 떼어놓고 볼 수 없다. 서방 개입을 ‘반대하지 않는다’는 식의 태도는 운동을 마비시킨다. 서방 개입을 찬성하면 리비아 반군 일부의 지지는 얻을 수 있을지 몰라도 팔레스타인과 바레인, 기타 모든 아랍 세계 민중의 지지는 잃게 된다.”
SWP 당원 사샤는 “세상에 공짜란 없다. 서방의 개입에는 반드시 대가가 따른다. 나토의 유고슬라비아 개입도 (크로아티아 대통령) 투지만의 세르비아인 학살을 불러왔다.”
케빈 오븐든은 “지난 1백 일간의 사태 전개는 리비아 개입의 의도가 제국주의의 중동 복귀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줬다. 질베르는 벵가지에서 학살이 일어났다면 아랍 혁명 전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단정하는데, 나는 수긍할 수 없다. 바레인에서도 학살이 일어났고 혁명이 사실상 패배한 상황이지만 그 때문에 예멘과 시리아 혁명이 좌절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서방의 개입이야말로 리비아 혁명 과정을 부패하게 만들고 있다. 서방 개입 반대는 결코 인기 없는 주장이 아니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도 반박했다. “많은 사람들이 리비아 혁명의 운명을 진심으로 걱정하기 때문에 서방의 개입에 동조했다. 따라서 그들과의 논쟁은 우호적인 논쟁이다. 그럼에도 질베르의 주장은 완전히 틀렸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이 정치의 연장선이라고 말했다. 리비아 개입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목표는 명백히 아랍 혁명을 길들이는 데 있다. 서방 개입 반대가 인기 없는 주장이라 해도 어쩔 수 없다. 때로는 인기가 없더라도 진실을 말해야 한다. 코소보 사태에 대한 ‘인도주의적 개입’ 반대도 당시에는 인기 없는 주장이었지만 결국 올바름이 입증됐고 이후 반전 운동의 자양분이 됐다.”
정리 발언에서 사이먼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담 후세인은 집권 시절에 이라크 북부 할라브자에서 정권에 저항하는 쿠르드족 수만 명을 독가스로 학살했다. 후세인 정권에 대한 적개심이 워낙 컸던 탓에 쿠르드족을 대표하는 정당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지지했다.
그러나 얼마 전에는 이 쿠르드 당이 할라브자에 지은 학살 기념관을 쿠르드인들이 불질렀다. 쿠르드 당이 미군 점령에 협조한 것에 주민들이 분노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당은 쿠르드 족의 저항 운동 속에서 탄생한 당이었지만 이라크 침공 당시에는 이미 변질돼 있었다. 내 모국인 레바논은 무수히 많은 외세의 개입을 겪었다. 거기서 얻어진 교훈 하나는 언제, 어떤 경우에도 외세의 개입은 절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레바논 남부에서 헤즈볼라가 이스라엘 군을 패퇴시킨 것도 외세의 도움 없이 이뤄진 일이다.”
질베르는 “벵가지 반군들도 처음에는 외세의 개입에 반대했지만 상황이 절박해서 결국 개입을 요청했다. 그들이 결코 서방의 본질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고 발제 내용을 다시 되풀이했다.
흥미 있었던 강연2
토니 클리프 전기 출판 기념 강연
영국 SWP의 창건자인 토니 클리프의 전기를 쓴 이언 버철의 출판 기념 강연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서 지하 강연장에 들어가기 위한 줄이 지상의 건물 입구 밖까지 이어졌다.
강연이 시작되기 전에 토니 클리프 생전의 인터뷰 영상이 15분 정도 상영됐다. 그 영상에서 “SWP가 무슨 일이든 효율적으로 척척 해내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토니 클리프가 “세상 물정을 충분히 잘 알면 현실에서는 선택지가 몇 개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업에 동참하느냐 마느냐, 둘 중 하나지 그 중간은 없듯이 말이다. 대안이 너무 많으면 사람이 마비되기 십상인데 몇 개 안 되면 그중 하나를 선택해서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힘이 난다”고 답변한 것이 기억에 남는다.
발제와 플로어 토론에서 거듭 강조된 클리프의 장점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냉정하게 바라보는 능력, 끊임없이 노동자들에게 경청하고 배우는 자세, 회원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챙긴 것, 권위적 태도를 완전히 배제한 것, 유머를 통해 가르치는 능력 등이었다.
한 당원은 젊은 시절에 토니 클리프를 처음 만났던 기억을 이렇게 회상했다. “토니 클리프에게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회의가 들 때는 없나’ 하고 물어보자 클리프는 대뜸 ‘왜 물어보냐’고 했다. ‘글쎄. 내가 보기에는 최근에 정세가 약간 침체기에 빠진 것 같다’고 하자 클리프는 ‘이게 침체기라고? 나치 점령기의 폴란드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하고 일갈했다.”
클리프의 부인인 팔순의 하니 로젠버그도 나와서 팔레스타인 시절에 불법 신문을 제작·배포했던 경험, 토니 클리프가 동생의 실수로 경찰에게 잡혀 1년간 옥살이를 했던 사연 등을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