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IST

학생 운동은 퇴조했는가?

학생 운동은 퇴조했는가?

강동훈

여느 해처럼 보수 언론들은 일제히 2004학년도 학생회 선거를 보도하며 ‘운동권의 퇴조’와 ‘투표율 저조’를 선전했다.

투표율이 50퍼센트를 겨우 넘은 데다가 “11월 27일까지 집계된 경찰 통계에 의하면 비운동권 후보가 당선된 학교가 79곳, 한총련 계열 22곳, PD계열 2곳으로 집계”돼 ‘비운동권’ 출신이 70퍼센트가 넘는 학교에서 당선되었다며 호들갑이다.

그러나 〈유뉴스〉나 다른 학생운동 관련 사이트들이 집계한 결과를 보면 기존 ‘운동권’이 총학생회 선거에서 퇴조한 것은 아니다.

집계한 곳에 따라 결과에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한총련 계열은 약 50개, PD계열은 7개, 기타 운동권이 약 15개 대학 총학생회에 당선됐고, ‘비운동권’이 약 50개 대학에서 당선됐다.

투표율이나 각 대학 학생회의 선거 결과는 최근 5∼6년 동안의 결과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 즉, 올해 선거 결과로 특별히 ‘비운동권 약진’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보수 언론의 호들갑은 분명 의도가 있다. 그들은 “정치투쟁에 매몰돼 학내 복지 문제에 무신경했던 학생운동권에 대한 심판”이라고 결론 내려 운동에 대한 이데올로기 공격을 하고자 한다.

단지 보수 언론의 이데올로기적 곡해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다. 경제위기로 더욱 심화하고 있는 학생들의 ‘원자화’는 학생회와 학생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물론 학생들의 무관심이 고정된 것은 아니다. 특정한 계기에 의해 무관심은 정반대인 광범한 급진화로 바뀔 수 있다. 1960년대 말의 서구 학생 운동이 이러한 예다.

PD의 약화

낮은 투표율은 학생회에 대한 관심 저하를 보여 준다. 그러나 이것이 주로 운동권에 대한 반감 때문은 아니다. 비운동권이 학생회 선거에 참여하는 경우에도 투표율은 높지 않다.

한 대학 관계자는 “총학생회 자체가 학생들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며 “지금은 운동권 퇴조라고 보기보다는 총학생회의 퇴조로 봐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학생회의 퇴조는 또한, 부차적으로는 ‘운동권’의 약화와 관계 있다. ‘기존’ 운동권이 주로 학생회를 운영해 왔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총학생회 선거 결과로 볼 때 운동권의 세가 현저하게 약해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주로 운동권이 운영해 오던 각 대학 단과대학이나 과 학생회가 계속 취약해졌다. 이 점은 기존 운동권도 학생들의 불만을 조직하거나 효과적인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최근 5∼6년간 학생회 선거에서 운동권 전체의 세력은 크게 약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운동권 중에서 서울과 경인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던 PD 학생들의 약화는 눈에 띈다.

물론 올해의 경우 이전 전학협 학생들이 선거에 대거 불참함으로써 PD의 약세는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PD 학생들의 세가 약해진 것은 2001년 11월에 치러진 2002학년도 학생회 선거에서부터다. 이 때부터 PD들이 당선되는 총학생회 수가 줄어, 이제는 그 전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자리의 대부분을 좌파 민족주의 학생들이 차지했다.

이는 2001년 9·11 이후 세계적 반전 운동에 대한 대응에서 PD 운동이 좌파 민족주의에 비해 더 무기력했다는 점에서 나오는 것이다.

2001년은 학생 운동만이 아니고 사회 전체로 PD 운동이 곤혹스러웠던 해다. 2001년에 들어 남북 화해·협력 문제를 둘러싸고 민족주의가 광범한 포퓰리즘적 영향을 미치며 김대중 정부와 협력을 추구할 때 PD는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다.

2001년 상반기에 대우자동차 투쟁이 패배하고, 명동성당에서 농성중이던 민주노총 위원장도 8·15 남북축전을 위해 김대중 정부와 협력해야 한다는 좌파 민족주의의 압력을 받아 김대중 정부에 순순히 투항했다. 민주노총이 내세웠던 “김대중 퇴진”구호는 유야무야됐다.

물론 2000년에도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민족주의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2000년은 노동자 투쟁이 활발한 시기였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반아셈시위가 벌어지는 등 반신자유주의 운동도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특히 9월 이후 경제 위기가 다시 심화하자 노동자 투쟁이 분출했고 이에 PD들도 자신들의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2001년 들어 노동운동이 일시적 소강상태에 들어가자 그 영향력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패배 이후에 그 의미를 곱씹고, 증가하는 포퓰리즘 압력에 대응해야 하는 시점에서 그들은 무기력했다.

노동조합 내에서도 PD 경향의 노동자 그룹들은 큰 위기를 겪었고 상당 부분이 무너졌다. 그러나 민족주의 운동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 그룹들은 그럭저럭 영향력을 유지했다.

2002년을 경과하며 표출하기 시작한 대중의 광범한 반미 감정은 운동을 주도하려고 하는 좌파 민족주의에게 힘이 되었다.

반면, PD들은 계속 ‘반신자유주의’를 주장하긴 했지만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고, 행동에서도 그다지 활력을 보여 주지 못했다. 최근의 반전 운동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좀더 회피적인 면을 보였다.

2002년 대선 이후, PD 학생들 중 주요한 부분인 전학협 학생들은 사회당 대선 참패의 영향을 받아 자율주의 경향으로 이동했고, 연대회의 학생들은 민족주의의 ‘유의미성’을 인정하면서 좌파 민족주의 세력과 ‘상설적 공투체’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그 동안 좌파 민족주의가 운동을 매우 잘 건설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PD 운동이 좀더 무기력했고 그 빈자리를 좌파 민족주의 운동이 차지할 수 있었다고 보는 게 올바를 것이다.

최근 전경련의 지원을 받는 자유기업원은 각 대학에 1천만 원을 지원하는 대가로 자신들이 수업 내용을 검열할 수 있는 “시장 경제의 이해”라는 과목을 개설하려고 했다.

우익들은 “최근 자유시장 경제의 어두운 면만 강조되고 있다고 판단해 대학생들이 기업과 시장 경제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이유를 밝히고 있다.

반전·반자본주의 정서

이것은 역으로 대학 내에 반자본주의 정서가 넓게 퍼져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게다가 학생들 중 일부가 좀더 급진적인 전망을 찾아 나서고 있다. 최근에 성균관대 김귀정 생활도서관에서는 자율주의를 비롯한 급진적 서적에 대한 수요가 늘었고, 고려대에서는 마르크스주의를 옹호하는 강연에 1백여 명의 학생이 참석하기도 했다.

그리고 〈유뉴스〉에 의하면 ‘운동권’과 ‘비운동권’의 선거 공약이 비슷해지고 있다. 학내 복지 공약을 중심으로 하고, 전쟁과 신자유주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점 등에서 둘 사이에 별 차이가 없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반전 운동의 성과와 대학 내 광범한 반자본주의 정서는 비운동권 학생회도 학내쟁점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그 중에는 서울대 총학생회처럼 비운동권으로 분류되던 학생회가 2003년 반전 운동에서 기존 운동권보다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했다. 그리고 선거 직전의 여론 조사에서 2003년 서울대 총학생회는 서울대 학생 70퍼센트의 지지를 받았다.

새로운 대안을 찾는 학생들이 ‘자율주의’에서 친화감을 느낄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학생이 겪는 일반적 소외의 특성상 학생들의 투쟁은 ‘반권위주의’적 성격을 띄기 쉽다. 이는 학생 운동이 아나키즘이나 개인주의에 친화성을 갖는다는 것을 뜻한다.

사회당의 대선 참패 이후, 분열을 겪은 이전 전학협 학생들의 다수가 자율주의로 이동했다. 이것은 기존 전학협 학생들의 아나키즘적 경향이 좀더 강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들은 이번 선거에서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지만 조직을 정비하며 세를 확장할 준비를 하고 있다.

‘다함께’는 올해 반전 운동을 조직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특히 PD 운동이 반전 운동에 열의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공백을 메워야 했다.

PD 운동의 약세로 그 지지자들은 더 느슨해졌고, 일부는 이탈하기도 한다. 우리는 새롭게 운동에 참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주변화한 운동 지지자들도 조직할 필요가 있다.

대학 내의 광범한 반전·반자본주의 정서는 우리에게도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개방적으로 운동을 건설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는 진지한 학생들과 더 많이 토론하고자 노력한다면 더 많은 학생 투사들을 조직할 수 있을 것이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