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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다피 사후, 리비아는 어디로 갈 것인가?

카다피가 사살된 이후 리비아 전망에 관한 양극단의 시각이 존재한다. 한편에는 서방 제국주의의 개입을 강조하며 리비아가 단순히 서방의 꼭두각시가 될 듯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견해에는 반제국주의적 정서가 담겨 있으나 카다피가 극악한 독재자였고 그가 통치한 42년간 리비아 민중이 겪을 고통을 무시한다. 또한 카다피가 서방 지배자들과 더러운 거래를 일삼았다는 사실에도 눈감는다. 다른 한편에는 독재자의 몰락을 강조하며 리비아 상황을 낙관적으로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견해는 서방의 개입에 따른 여러 악영향을 간과한다.

리비아 혁명 과정을 잘 복기해 보면, 리비아의 앞날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모순적 요소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레바논 출신 사회주의자 시문 아사프(《이집트 혁명과 중동의 민중 반란》(책갈피) 공저자)가 리비아 혁명에 대한 비교적 세심한 분석을 제공한다.

무아마르 카다피의 마지막 순간이 담긴 혼란스러운 비디오와 사진이 보도됐을 때, 대중은 크게 기뻐했다. 그러나 깊은 불안감도 동시에 생겨났다.

리비아 혁명은 서방 열강한테 승리를 빚졌다. 그러나 나라를 서방에게 넘기려고 이 혁명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카다피를 애도하지 않는다. 카다피를 법정에 세웠다면 좋았을 테지만, 그는 많은 비밀을 안고 저승길로 가 버렸다. 그런 비밀 가운데는 카다피와 서방이 맺은 많은 더러운 거래의 세세한 내역들도 있을 것이다.

10월 24일 카다피 정권의 몰락을 축하하는 리비아인들

그러나 많은 사람에게 그의 죽음은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카다피는 자기가 박해하던 사람들의 손에 죽었다. 모든 독재자의 운명이 이래야 한다.

2011년 2월 15일 카다피군이 평화로운 시위대에 발포했을 때 카다피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

이 시위는 이집트와 튀니지 혁명에 고무된 청년들이 조직했다. 시위대는 리비아의 2대 도시 벵가지의 법원 청사 바깥에 리비아판 타흐리르 광장을 만들었다.

벵가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보안군을 제압하고, 진압군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벵가지의 성공은 전국적 반란을 촉발했다.

공업 도시 미스라타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수도 서쪽의 자위야도 합세했다. 오랫동안 억압 받아 온 서부 산악지대의 베르베르인들도 반란을 일으켰다. 수도 트리폴리에서도 청년 수천 명이 벵가지의 요청에 화답해 거리에 나섰다.

청년들은 용맹했지만 중무장한 친정권 세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들의 반란은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이 튀니지로 도피하고 지하로 숨었다.

카다피 정권은 여전히 지지 기반이 있었다. 카다피 정권은 지지자들을 동원해 무기를 나눠주고 군대에서 반대 세력을 숙청했다.

사병과 장교 수백 명이 살해됐고, 정부의 핵심 인사들도 살해됐다. 수많은 민간인이 체포됐다. 이들은 대부분 나중에 살해됐다.

카다피의 반혁명으로 아랍 정권들이 폭력에 기대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잔인한 공격 탓에 평화적인 운동이 무장 봉기로 발전했다.

그것은 불균형한 전투였다. 트리폴리 서쪽 근교 자위야의 수비대는 탱크 네 대와 적은 무기만 보유하고 있었다. 정권은 탱크 50대와 중무장 전투병 수백 명을 보냈다.

동쪽에서는 혁명군이 미스라타와 트리폴리를 구하려고 진격했다. 빈약하게 무장하고 군사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혁명군은 카다피의 요새인 시르테 외곽에서 매복에 걸렸다.

벵가지까지 밀리는 기나긴 후퇴가 시작됐다.

카다피군이 반란이 일어난 도시에 접근했을 때, 카다피는 “우리는 어떠한 자비와 동정도 베풀지 않을 것이다” 하고 선언했다.

혁명의 미래가 암울해 보였다. 청년 혁명가들의 애초 바람은 무시됐다. 외국의 개입을 모두 거부한다는 요구를 포함해서 말이다.

그리고 나서 서방이 들어왔다. 나토의 전투기들이 카다피의 공세를 저지했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서방 열강은 이제 혁명을 가로채려 했다.

그 과정은 옛 정권의 고위 이탈자들이 혁명에 합류하면서 시작됐다. 반란의 초기 지도자들이 세운 과도국가위원회(NTC)가 이 이탈자들의 통제를 받게 됐다.

새 지도부는 서방 열강의 지원을 기대했다. 서방은 군사적, 재정적, 정치적 지원을 약속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매우 컸다.

제재

대중은 서방에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 외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느꼈다. 그것은 공갈이었다.

나토의 공습이 시작되기 직전에도, 벵가지의 청년 혁명가들은 여전히 서방의 개입을 반대했다. 그들은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혁명가들은 나토의 전투기와 그것에 딸린 조건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지상군” 투입은 결코 양보하지 않았다. 그것은 그들이 거둔 작지만 중요한 승리가 될 터였다.

그러나 서방의 군 장교들이 몰려왔다. 카타르의 특수부대 등도 몰려들었다.

나토 공습의 효과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전투기의 공습으로 정부군은 괴멸됐다. 그러나 지상의 전투가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전투는 대부분 무장한 시민들이 담당했다.

전쟁의 초점이 트리폴리 남부의 미스라타와 서부 산악지대로 옮겨갔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가 분할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서부 산악지대의 반란군이 튀니지 접경 지역을 장악한 여름 무렵 바뀌었다. 트리폴리 등지의 서부 도시들에서 탄압을 피해 피신했던 많은 리비아인들이 다시 국경을 넘어와 전투에 참가했다.

8월 20일, 트리폴리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반란군이 그 도시로 쇄도했다.

대중의 구실은 최후의 전투에서 결정적이었다. 반란의 시작을 알렸던 대중 시위가 결정타를 날릴 참이었다.

정권의 마지막 요소들이 몰락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러나 이 승리는 리비아, 그리고 서방의 지원을 받는 새 정부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들을 감추고 있다. 옛 질서의 많은 부분을 그대로 두는 것이 바로 새로운 정권이 ‘서방과 맺은’ 계약 조건이다.

여기에는 석유 계약, 이슬람주의자들을 통제하겠다는 보장, 유럽의 남부 국경을 사하라 이남의 이주민한테서 “확보”하겠다는 약속 등이 포함된다.

서방 열강은 리비아에서는 “옛 정권 인물들을 몰아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즉 이라크와는 달리 옛 정권의 인물들이 자기 자리를 지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미스라타 군사위원회는 이미 트리폴리의 과도 정부가 내리는 모든 강압적 요구들을 거부하고 있다.

옛 체제를 살짝만 바꿔서 재활용하려는 시도 또한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대를 받았다. 반란군의 핵심 군사 지도자들 상당수가 이슬람주의자들이다.

반란에 참가한 많은 세력이 과도국가위원회가 새 정부를 마음대로 구성한 것을 비난하며 이제는 과도국가위원회에 등을 돌리고 있다.

이 승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인도주의적 개입” 정책이 되살아났고, 이제 “유연한 군사력”이라 불린다.

카다피의 몰락은 아랍 혁명 전체의 환영을 받았다. 예멘, 이집트, 시리아에서 사람들이 승리를 축하했다.

반란군의 깃발이 아랍 세계 곳곳의 시위 현장에서 펄럭이고 있고, 리비아 혁명은 여전히 아랍의 봄의 일부로 여겨진다.

혁명은 슬로건을 외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혁명은 수많은 사람들이 직접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해 공동의 운명을 결정하고 새로운 사회 질서를 창출하는 과정이다.

전쟁 동안 리비아에 강요된 제약들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사람들의 열망과 커다란 마찰을 빚을 것이다.

리비아에서 벌어진 반란은 혁명의 모든 특징을 보여줬다. 그러나 내전으로 나라가 기진맥진해 있다. 새로운 리비아의 정치에서 사라진 요소는 혁명 초기의 성공을 이끌었던 청년 활동가들이다.

그들이 리비아의 새로운 질서에 어떻게 대응할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아랍 혁명이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