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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편지
수험생 자살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문제다

전국을 떠들썩하게 한 대학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수험생들을 입시공부라는 틀 안에 가둬두고 억압하던 체제가 이제는 살인마가 되어 ‘낙오’된 수험생들에게 자살을 부추기고 있다. 최근 심심찮게 나오는 뉴스에서 수험생과 관련된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한다. 모진 세상을 견디지 못해 떠나간 꽃다운 목숨들은 지금쯤 저승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이승을 내려다볼까? 내 친구 역시 수능 전날, 스스로 자신의 배를 칼로 찌름으로서 이 세상과 작별하려 했다. 평소 생각이 많고 수능을 포함한 여러 복잡한 사정 때문에 어깨에 눌린 부담이 정말 컸던 친구였다. 다행히 치료가 잘 끝난 덕에 친구는 현재 병원에서 요양하는 중이다.

그런데 친구의 사건이 기사로 나가자, 사람들의 반응 중 두드러지는 것이 있었다. ‘의지가 그따위로 나약해서’ 자살을 시도한 거란다. 또 다른 사람은 ‘그걸 이겨내지도 못할 거면 세상 살지 말아야지’ 라는, 비슷한 맥락의 말을 하며 그 친구의 자살시도를 매우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쾌유를 기원하는 반응은 의외로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그 친구가 자살을 시도한 것이, 더 나아가 수험생들이 이맘 때 쯤 자살을 기도하는 것이 그들 개인 의지의 문제일까? 그건 아닌 것 같다. 일반 사람들은 그 친구의 사정을 표면적으로 들은 후에 ‘겨우 그 정도도 못 견디면’ 따위의 말을 입 밖에 내곤 한다. 정신적 문제는 개인 의지에 따라서 극복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랑스레 ‘극복 사례’를 제시한다. ‘너희는 왜 이렇게 하지 않느냐’라는, 은근한 조소와 조롱이 그 안에 섞여있다.

필자 역시 친구와 비슷한 우울증을 겪은 적이 있다. 또한, 자살 역시 시도해본 적이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이러한 필자의 솔직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다.) 본인의 경험해본 바, 그리고 주변의 사례를 지켜본 바, 정신적 문제는 결코 개인 의지 문제로만 해결이 가능한 부분이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다. 간혹 스스로의 의지로서 그것을 극복해내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그런데, 그 ‘의지’는 어디로부터 왔을까? 그들 나름대로 용기를 주는 책을 읽는다던가, 뭔가 그들에게 희망을 줄만한 무언가 행위를 했을 것이 틀림없다. 달리 말해,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일정 부분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았다는 소리가 된다.

수험생의 자살시도는 개인의지박약으로 가볍게 넘길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필연적으로 사회로부터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또한 그러한 것을 요청하기 위해 극단적인 방법을 쓰는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문제를 계속 개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게 되면 매 수능 이후마다 죽음의 문턱을 밟는 수험생의 숫자는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경쟁을 동력원으로 한다. 경쟁은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게 되며, 그 안에서 낙오된 것은 ‘폐기처분’된다. 기업이 대표적이다. 인간이라고 예외일까? 최근 신자유주의 조류는, 아니 자본주의의 역사는 인간 역시 그러한 잔인한 대오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그러한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서로 승자와 패자를 가르고, 순위를 정해 낙오자를 탈락시키며 그들에게 희생을 강요함으로서 그들의 피를 먹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낙오자가 낙오한 이유는 전적으로 낙오자 개인에게 있다.

수능은 이러한 자본주의의 경쟁체제를 그대로 본받고 있다. 수험생들은 서로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끊임없이 경쟁한다. 심지어 한 때 ‘삼당사락(세시간 자면 붙고 네 시간 자면 떨어진다)’이라는 말이 유행했을 정도로, 수험생들로부터 인간의 필수불가결 조건인 ‘잠’을 빼앗아 가기도 했다. 대학의 학벌 카르텔은 그러한 수험생들의 경쟁을 더욱 부채질한다. 학벌은 사회 곳곳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고, 그들은 자라나는 수험생들에게 ‘스펙’을 요구한다. 수험생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위한 문턱은 점점 높아지고 있고, 비정규직의 급증과 더불어 취업난이 겹쳐 생존을 위한 투쟁까지 격화되고 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풍요의 시대’ 혹은 ‘기회의 시대’를 찬미하며 누구든 열심히 하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선전한다.

이 얼마나 한심한 모순인가? 사람들은 이미 ‘노력’의 허구성을 깨닫고 있다. 자본주의 독점체제 하에서 ‘노력’이란 단지 ‘생존’을 위한 노력일 뿐 ‘자기 계발’ 혹은 ‘자아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대학에 가기 위한 맹목적 경쟁, 취업을 하기 위한 맹목적 경쟁, 심지어 결혼하기 위한 경쟁까지. 이 안에서 진정한 ‘자아 실현’을 찾아볼 수 있을까? 지배 계급은 그 안에서 자아를 찾으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자아를 찾는다 한들 그것이 과연 오래, 지속 가능할까? 근원적으로 ‘생존’에 대한 불안감이 지배적인 이상 그 안에서 진정한 ‘자아실현’이란 있을 수 없다.

수험생의 자살은 그들이 결코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자본주의 하에서 이뤄지는 무한 경쟁 속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낙오자의 대열에 ‘실수로’ 끼어든 것 뿐이다. 자본주의는, 특히 최근의 신자유주의 조류는 이들에게 결코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면 이들의 말로는? 비인간적 삶의 연속 혹은 극단적으로는 ‘죽음’이다. 자본주의는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결코 내놓지 않는다. ‘풍요의 시대’이자 ‘기회의 시대’이며 ‘살기 좋은 세상’임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단순하게는, 관심과 애정일 것이다. 그러나 관심과 애정만? 우리는 이들에게 좀 더 구체적 대안을 제시해줄 필요가 있다. 나아가, 이들과 공감대를 형성하며 접근하여 연대를 이루어야만 한다. 부단한 설득과 함께 대안을 제시해주며 그들을 죽음의 손아귀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 삼도천의 둔덕까지 가본 이들이야말로 인재라는 점을 인식하고 그들을 버려선 안 된다. 주변을 돌아보자. 혹 주변에 ‘나 자살할거야’라고 종종 말하는 친구가 있는가? 있다면 그들의 손을 잡자. 그리하여 그들을 다시금 삶의 길로 이끌자. 그것이 우리의 책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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