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말레이시아 ― 우리는 더 많은 자유와 민주주의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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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8일 말레이시아 역사상 가장 큰 시위가 벌어졌다. 2007년부터 진행되어 온 ‘버시(bersih, 공정 선거 개혁) 운동’이 절정에 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시위로 쿠알라룸푸르 시내는 하루 종일 마비되었으며 중앙시장도 문을 닫아야 했다. 이번 시위는 35개 나라 85개 지역에서 동시에 벌어진 국제 행동으로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에서만 20만 명 이상이 참가했으며 전체 참가 규모는 3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철조망과 경찰자를 동원해 시위 장소로 예정되어 있던 독립광장(Datanran Merdeka, 말레이시아의 타흐리르)을 폐쇄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당일 새벽부터 광장 주변으로 몰려들었으며 2시로 예정되어 있던 집회는 오전부터 시작되었다. 반핵 시위대(호주 광산·광물기업 Lynas에게 방사능을 포함한 유독성 물질 배출을 중단하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집회에 합류하자 대열이 더욱 커졌다. 시위에 참가한 사람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였다. 시위 중에 쉬는 시간과도 같았던 5시 기도 시간. 모스크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오는 대학생은 지배자들의 부패와 경찰 폭력에 대해서 말하면서도 입가에 띤 웃음을 버리지 않았다. 한 현지 언론은 이 시위가 축제와 같았다고 보도했다.
주류 언론들을 경찰차가 뒤집어지고 경찰 1명이 다친 것을 두고 훌리건들이 이 시위를 망쳤으며 무질서와 폭력이 난무했다고 대서특필하고 있다. 정부와 경찰은 이번 시위에서 불법을 자행한 사람들을 사진과 비디오 판독으로 반드시 잡아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버시’의 공동대표 엠비가가 말했듯이, 이런 일이 발생한 것은 애초에 경찰과 정부가 시위 장소로 예정된 독립광장을 전날부터 폐쇄하고 광장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을 최루탄과 물대포로 무자비하게 진압했기 때문이다. 경찰은 시위대를 잡으러 전철 플랫폼까지 들어갔고, 1천5백여 명을 연행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시위대가 다쳤다.
이번 시위는 나집(Najib) 총리가 6월에 조기 총선을 실시할 것이라는 점이 유력해지자, 사람들이 지금과 같은 불공정한 선거 제도로는 도저히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의사를 분명히 표현한 것이다. 말레이시아 선거는 정부가 의회를 해산하고 순식간에 8일만에 선거를 치러 버리는 식으로, 선거 과정을 아무도 알 수 없도록 함으로써 집권당에 유리한 선거로 진행되고 있다. 이 덕분에 제 1여당인 말레이시아국가기구(UMNO)를 비롯해 28개 정당 연합인 국민전선(BN)은 유권자 매수, 선거인 명부 조작 등 부정 선거로 1957년 이래 장기 집권하고 있다.
이에 맞서는 ‘버시 운동’은 야당과 NGO 등 84개 단체가 참여하는 “깨끗하고 공정한 선거를 위한 연합”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 12대 총선을 앞두고 시작된 이 운동은 UMNO와 국민전선이 자신들만의 의회를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국민전선은 정말로 간신히 과반 의석을 얻을 수 있었으며, 처음으로 사회당(PSM)도 의석을 획득했다.
지난해 ‘버시2.0’은 죽은 사람이나 존재하지 않는 주소지에 유령 유권자가 등록된 선거인 명부를 투명하고 깨끗하게 다시 작성할 것, 선거에 지워지지 않는 잉크를 사용할 것, 유권자 매수를 중지할 것, 후보자들이 동등하게 언론을 활용하고 언론은 편파 보도를 하지 말 것, 선거운동 기간을 8일에서 21일로 늘릴 것 등 8개 요구안을 제시했다. 이번 ‘버시3.0’은 이러한 요구가 13대 총선 전까지 완전히 실현되어야 하며, 지금의 선거위원회(EC)는 해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선거위원회가 더욱 독립적이고 힘 있는 활동을 해야 한다는 이전 요구와 달라진 점이다. 버시 운동의 지지자들은 현 총리가 포함되어 있는 선거위원회를 더는 믿지 못 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은 안와르 이브라힘(민중정의당 리더)이나 이슬람원리주의 정당인 PAS가 이 운동의 배후이며 이들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라며 이 시위의 의미를 깎아 내리고 있다.
안와르 이브라힘은 마하티르 총리 시절에 정부에서 활동하며 IMF의 요구를 더욱 충실히 따르고자 했던 인물로 경제 정책으로 보자면 그다지 진보적인 인물은 아닌 듯하다. 그렇지만 그가 정부에 의해 세 번이나 구속 수감되면서 이전보다 더 급진적 언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완전한 의회민주주의를 요구한다는 점 때문에 버시 운동에 참여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운동은 안와르 이브라힘 지지를 넘어선다. 사람들은 이집트를 비롯한 아랍에서 불어오는 저항의 바람을 기억하고 있으며 말레이시아의 타흐리르를 만들고자 했다. 시위대가 광장으로 진입을 시도한 것도 이 때문이며 버시3.0도 “광장을 점거하라”를 구호로 채택했다.
언론은 버시3.0 지도부가 이번 시위를 통제하지 못했다는 점을 부각하며 지도부가 이 운동을 철저히 단속할 것을 주문하고 있다. 사실 이번 시위가 이 정도 규모가 될 것이라고 지도부도 예상하지 못한 듯하다. 평화집회법으로 15세 이하의 자녀를 데리고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어린 자녀와 함께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도 있었고, 남녀노소는 물론이고 중국,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 등 다양한 인종이 참여하는 시위였다.
나집 총리는 선거에서의 이점을 노리고 다른 인종 포용정책을 취하며 “하나의 말레이시아(1Malaysia)”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그것이 허울뿐이라고 말한다. (말레이시아는 다인종 국가로 말레이 60퍼센트, 중국인 25퍼센트, 인도인 8퍼센트로 구성되어 있으며 인도네시아 이주노동자들이 늘고 있다. 이주 노동과 인종, 종교 갈등은 말레이시아의 최대 이슈다.) 시위에 모인 사람들은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고 했다. 밤까지 계속된 시위에서 사람들은 곳곳에서 토론을 벌였다. “(시위대에서) 민감한 이슈는 없었고 사람들은 거침없이 인종과 종교에 대해서 토론했다. 모든 인종에게 똑같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부의 부패에 맞서 모두 하나가 됐다” 하고 말했다.
나집 총리는 악명 높은 국내치안법(ISA) 개정이나 버시 2.0의 요구 수용 시도, 노동절을 맞이해 최저 임금인상 등을 카드를 내놓는 등 저항 운동 달래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결코 이에 만족하지 않을 듯하다. 이 운동이 야당 지지 운동이나 특정 인종이나 종교에 기반을 둔 운동을 넘어서는 게 분명하다. 지배자들의 부패에 신물이 난 사람들은 더 많은 자유와 인권, 정의를 원하며 인종과 종교를 넘어서는 더 나은 삶을 바라고 있다. 성장하고 있는 버시 운동이 민주적 선거 절차를 쟁취하고 거기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더 나아갈 것인가. 분명 이 같은 기로에 설 것이다. 현재 버시 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말레이시아 좌파의 독립적인 목소리는 약해 보인다. 과연 이 운동이 어디로 나아갈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