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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자들의 ‘진화론 삭제’ 시도를 굴복시켜야 한다.

최근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교진추)라는 종교 단체가 고등학교 교과과서에서 ‘시조새는 파충류와 조류의 중간이다’라는 기술과 ‘말(馬)의 진화’ 부분을 삭제해 달라고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했고, 과학교과서를 펴내는 출판사 여섯 곳에서 받아들이기로 해 논란이 되고 있다.

‘진화론 부정 논란’이 확산되자 영국의 유명한 과학저널인 〈네이처〉가 ‘한국의 진화론, 창조론자들에게 무릎 꿇다’라는 다소 조롱 섞인 글을 실었고 미국의 과학 잡지인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에도 “세계적으로 개인의 지적 수준이 제일 높다고 알려진 나라에서 벌어진 이번 일은 무척 실망스럽다”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이처럼 외국의 과학 잡지들이 이 소동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과 반대로 한국의 과학계는 무능하기 그지 없었다. 그동안 과학계가 창조론자들의 진화론 삭제 논란에 대해 안온하게 대응해 온 것의 ‘자업자득 아니냐’ 하는 탄식도 들릴 정도다.

왜 지금인가?

창조론자들은 그동안 한국 교과서에서 진화론을 삭제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1981년 설립된 한국창조한국회가 대표적인데 이들은 《진화는 과학적 사실인가?》에서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 과학이 아니다”라며 진화론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리고 2009년 한국창조과학회가 ‘진화론만 가르치는 교과서는 위헌’이라는 내용으로 준비하던 헌법소원준비 업무를 교진추로 이관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진화론 삭제를 요청하는 이러한 시도는 몇 차례 반복되었지만 관철되지 못했다. 그러나 한국창조과학회는 아주 집요하게 요구해 왔다.

최근 우파들은 진보진영에 대한 ‘종북’몰이로 자신들의 위기를 일시 모면하면서 진보진영을 공격했다. 게다가 이 기회를 이용해 우파적 정책들을 밀어붙이려 한다. 정부는 국민의 60퍼센트 이상이 반대하는 KTX 민영화를 임기 안에 강행하겠다고 선언했고 박근혜는 민생법안 1호로 ‘사내하도급법’을 내놓았다. 이법은 사내 하청 노동자들을 계속해서 비정규직으로 묶어두겠다는 것이다.

이런 여파 속에서 창조론자들의 진화론 삭제 시도가 불거진 것이다. 교진추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6~7월에는 ‘화학적 진화는 생명의 기원과 무관하다’는 청원을, 9월에는 ‘생물계통수가 허구다’라는 청원을 낼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교진추의 최종 목적은 진화론을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것이다. 교진추 이광원 대표는 “진화론의 본래 성격은 유물론이다. 사람의 정신도 물질현상이라고 보는 진화론을 가르치면 학생들에게 잘못된 세계관이 형성된다. 물질은 순환하기 때문에 생명을 죽여도 죄악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낙태나 이기주의도 마찬가지다” 하고 주장한다.

이들은 낙태 반대와 동성애 혐오 등과 같은 우파적 정책들도 널리 퍼뜨리길 원한다. 진화론과 같은 ‘불손한’ 생각들이 자본주의의 질서에 맞지 않고 ‘신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문제 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형 교회들을 비롯한 일부 교회들은 기득권의 사상을 옹호하고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다. 대형 교회들은 정부의 우파적인 정책들을 지지하면서 그 대가로 교회의 몸짓을 키우고 기득권을 유지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장로로 있는 소망교회가 한국창조과학회를 적극 후원하는 대표적인 대형 교회라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논리적 비약

다윈의 진화론은 ‘지난 2세기 동안 인류가 생각한 개념 중 가장 심원하고 강력한 개념’이라고 평가되기도 하고 과학사에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에 버금갈 업적을 남긴 역작이라고 칭송되기도 한다.

물론 현행 교과서에 다루는 진화론은 매우 엉성하고 허점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과학자들이 지적하듯이 교과서의 대부분은 진화론을 기계적으로 기술하거나 부적절하고 오해를 불러올 수 있는 부분이 많다는 인정하고 있다. 즉, 진화론을 매우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론자들은 이러한 진화론의 허점을 이용해 마치 진화론 그 자체가 근본에서부터 잘못된 것인 양 논리적 비약도 서슴지 않는다.

진화생물학의 거장 스티븐 제이 굴드를 거론하며 굴드가 진화론 자체를 거부했다고 왜곡하고 있다.

굴드가 “말의 점진적 진화는 학술적으로 불가능하며 상상의 산물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굴드는 교과서에서 말의 진화 과정이 너무 편협하게 다뤄졌고 오해의 여지가 큰 해석을 남긴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다.

“히라코테리움에서 에쿠스에 이르는 계보는 지난 5,500만 년 전에 걸쳐 엄청나게 복잡한 패턴으로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진화의 얽히고 설킨 가지들 중에서 단 하나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 말의 진화 계통수에는 수많은 종착점이 있고, 그 각각은 가지가 갈라지는 사건의 미로를 따라 히라코테리움으로 거슬러 내려간다. … 이러한 경로 중에 일직선은 없으며, 미로 같은 수많은 경로들 중에 중심이 된다고 특별히 주장할 만한 것도 없다.(《풀 하우스》)

굴드는 진화가 직선적이고 예정된 경로를 따라가는 것이 아님을 역설하면서 기계적인 진화론에 반대한 것이다. “모든 생명종들의 진화 과정이 마치 정점을 향해 치닫는 직선적이고 진보적인 진화 과정을 답습”하고 있다는 진화론에 대한 흔한 오해를 지적한 것이다.

교진추는 진화학계의 내부 논쟁을 두고 아전인수식 해석을 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대외적으로 진화론의 오류와 과학발전에 따른 최신 이론 등을 학계와 교육계에 알림으로써 건전한 과학발전 및 학술 진흥에 이바지한다”고 설립 취지를 밝히고 있지만 이 논거가 얼마나 편협한 것이지를 여지없이 보여 주고 있다.

한국 과학계는 그동안 창조론자들의 주장을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이들을 ‘링안에 끌어들이는 것 자체가 창조론자들의 꼼수에 휘말리는 것’이라는 판단에서 였다. 역설적이게도 과학계의 이런 안온한 태도 때문에 창조론자들의 활동 반경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진화론을 뒤흔드는 창조론자들의 도발을 단지 종교적인 문제로 협소하게 보아서는 안되고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간과해서는 안된다. 과학의 기본 근간을 뒤흔들고 우파적 정책들을 옹호하는 기회로 활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창조론자들의 ‘불손한’ 시도에 맞서 과학계뿐 아니라 진보진영이 같이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