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광해〉를 정치적으로 보기:
광해와 하선, 그리고 노무현과 “노무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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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가 벌써 7백만 관객을 동원해 냈다. 〈광해〉의 무엇이 사람들을 그렇게 사로잡은 것이었을까? 사료의 실제 내용과 앞뒤를 치밀하게 맞춘 탁월한 상상력, 정교한 플롯, 이병현과 유승룡의 명품 연기만으로 〈광해〉를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도 일면적인 평일 것이다. 아니, 일면적이다 못해 진실을 외면한 평이다. 이 영화는 현실을 탁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 현실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정치 영화다.
노무현 vs 하선
〈광해〉는 평범한 사람들의 변화에 대한 열망을 ‘하선’이라는 인물을 표상으로 삼아 이야기하고 있다. 하선은 대중이 원하는 권력의 표상이다. 여기에서 꽤 많은 사람들은 하선을 보고 노무현을 떠올린다. 특히 명황조에 사대의 예를 갖추기 위해 2만 명이나 되는 백성들을 사지로 내몰자는 신료들의 주장에 맞서며 “부끄러운 줄 아시오!” 하고 외치던 하선의 모습은 우익적이고 친미적인 군장성들을 향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고 말하던 노무현의 모습과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노무현 정신”이 노동 존중, 보편적 복지, 민주주의 같은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를 종합한 개념으로 꽤 많은 사람들에게 어필하고 있는 이 시기에 더욱 크게 빛을 발한다. 사람들은 “실패한 개혁군주 광해군”과 “실패한 개혁가” 노무현을 동위에 놓는다.
그러나 과연 하선의 보름을 노무현의 5년과 동위에 놓일 수 있는 것일까? 즉 “노무현 정신”이라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인가? 조금이라도 진실을 들여다보기 위해 노력한다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2008년 촛불을 들고 “MB OUT”을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은 노무현이 죽었을 때 노란 풍선을 들고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던 노무현의 유서와는 정반대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빼앗아 간 정부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아마 2008년 촛불과 2011년 한미FTA 반대 투쟁 등을 제외한다면 이른바 ‘서거 정국’이라 불린 이 시점이야말로 이명박이 가장 많이 떨었을 시국일 것이다. 이때부터 “노무현 정신”은 온갖 종류의 사회정의를 하나로 묶는 단어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노무현 정신”과 노무현의 실제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다. 배달호, 김주익, 곽재규, 류기혁, 홍덕표, 전용철, 이경해, 허세욱…. 이들은 이명박이 죽인 이들이 아니라 노무현이 죽인 이들이다. 이명박이 쌍용 노동자 22명을 사지로 내몰았듯 노무현은 집권 초 열사정국을 만들어냈다. 이명박이 “왕재산 간첩단”을 조작해 냈듯 노무현은 “일심회 사건”을 조작해 냈다. 김진숙이 회고했듯 “그의 시대에 가장 많은 노동자가 잘렸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구속됐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비정규직이 됐고, 그리고 가장 많은 노동자가 죽었다.”
결국 “노무현 정신”은 빼앗긴 삶을 되찾고자 하는 대중적 열망과 이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지배적 의식이 함께 만들어 낸 정치적 환상이다. 노무현 자신도 그러한 환상에 올라타 대통령이 되었다. “반미면 어떠냐”라는 노무현의 급진적 언사, “크레인 위의 노무현”이라는 이미지에 매혹되지 않을 억압받는 자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그러나 조윤호가 이야기했듯 “지금 노무현 정신이라는 기표는 여기저기 떠돌아다니지만, 아무것도 담지 못”한다. 노무현 정신은 “텅빈 기표”다. 하선이 진짜 광해군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은 노무현의 그것이 아니다. “노무현 정신”은 노무현에 의해 품어진 적도, 노무현에 의해 구현된 적도 없다.
노무현과 “노무현 정신” vs 광해군, “하선”
이를 있는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노무현 정신”이라는 유령이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는 현상, 이명박에 대한 반감이 노무현에 대한 향수로 흘러가 노무현을 “실패한 개혁가”로 격상시켜 버린 현재 만큼 퇴행적인 시기는 없을 것이다. 이것은 이 나라의 변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자유주의적 퇴행 속에 갇혀있다는 증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말이 맞는 말일까? 이러한 결론 하에 비관적 정세관을 정당화하는 것은 무척이나 일면적인 관점이다. 진정한 변혁 활동가라면 사람들의 의식이 모순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서서 그 모순된 의식 속으로 파고들 줄 알아야 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모순 속에서 사회 변혁의 씨앗을 발견했다. 하나의 소우주라는 인간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인간의 의식 역시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지배적 사상과 변화에의 열망이 공존하고 있다. 그것은 모순적 통일을 이루며 그의 의식의 총체를 형성한다. 그리고 그 모순 속에서 우리는 급진화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모순적 의식 속에 내재한 내적 급진성을 보아야 한다.
변혁을 바라는 활동가들이 “노무현 정신”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그들의 모순이 어디에 가로 놓여 있는지를 확인해야 하며, 그 모순을 예리하게 파고들어야 한다. 모순적 의식 그 자체를 비관하거나 “노무현 정신”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멍청이로 보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은 없다. 노동존중, 민주주의, 보편적 복지와 같은 것들을 한데 묶어 표현하는 말이 되어버린 “노무현 정신”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에게 있어 노무현은 누구인가를 중점적으로 파헤쳐야 한다. 〈광해〉는 여기에 좋은 힌트 거리를 던져준다.
이 영화를 보면서 생각할 만한 점 중 가장 재밌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목소리를 갖고 있는 진짜 광해군과 가짜 광해군 하선이 결국엔 모두 “광해군”이라는 이름으로 모두의 기억 속에 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죽염 때문에 은수저 색깔이 변한 걸 가지고 나인들을 문책하는 광해와 도부장이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어도 이를 용서하는 하선, 대동법 시행이나 중전의 오라비를 방어함에 있어 두려움에 떨며 기존 관료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한 광해와 이를 강경하게 밀어 붙이는 하선, 잔인한 냉혈한 광해와 나인과의 약속도 허투루 여기지 않고 조세 부담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아픔에 눈물 흘리며 공감할 줄 아는 하선 사이에는 거대한 강이 흐르고 있지만 모두의 기억 속에 광해와 하선은 똑같은 “광해군”으로 남을 것이다.
이는 현실과 쏙 빼닮아 있다. 청와대에 입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열사 정국을 초래한 부르주아 정치인 노무현은 지금 이 시점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되어 있다. 노무현은 집권 기간 내내 진짜 광해군처럼 굴었다. 광해가 “정치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주는 것”이라며 충신 유종우를 대신들에게 내주려 하고, 개혁 정책을 주저하는 것처럼 노무현 역시 이정우와 정태인 같은 ‘개혁파’ 관료들을 내쫓음으로 부자들에게 타협 메시지를 보냈고, 온건하기 그지 없는 ‘4대 개혁 입법’ 중 단 하나도 제대로 통과시키기를 주저했다. 그러나 이런 노무현은 지금 많은 사람들에게 “노무현 정신”으로 남아 있다. 영화 속 조선 백성들에게 하선의 모습이 광해의 모습으로 길이 남았듯 말이다. 하선이 광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나인 사월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노무현 정신”이 만들어진 정치적 환상이라는 점을 쉽사리 알아채지는 못한다.
그러나 대동법 시행, 모함으로부터 충신을 방어하는 일 등이 그 당시 조선 사회를 살아가고 있었던 이들이라면 누구나 품었을 법한 열망이듯 평범한 사람들이 “노무현 정신”이라는 이름으로 품고 있는 열망들은 변혁 활동가들이 결코 부정할 수 없는 것들, 아니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들이다. 변혁 활동가들이 이 점을 간과하고 평범한 사람들이 외치는 “노무현”이라는 이름을 노무현 시대의 그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대중의 의식 수준이 지독히도 낮다”는 결론밖에 도출해 낼 수 없을 것이다. 진정으로 퇴행적인 것은 대중이 “노무현 정신”을 되뇌인다는 것이 아니라, 비관적인 정세관으로 음울해져 있는 활동가들의 컨디션과 그 음울함 속에서 자라날 온갖 종류의 엘리트주의, 초좌파주의, 종파주의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시대의 도부장과 조내관, 허균을 찾아서
누군가에게 정치적 신망을 한 몸에 받는다는 것이 변혁가들에게 있어 가장 큰 행복이라면, 하선만큼이나 행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조내관은 하선이 광해군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음 속의 왕으로 삼았다.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내 마음의 대통령”이라 불렀듯이 말이다. 도부장은 광해군이 아닌 하선을 향한 충심으로 자신의 목숨을 버렸다. 허균 역시 결과적으로는 광해군의 신하가 아니라 하선의 신하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이 시대의 도부장과 조내관, 허균을 찾아나서야 한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환상이 전혀 다른 형태로 진화하고 있는 이 시점만큼 좋은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노무현의 ‘적통’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당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이른바 ‘친노’라고 불리우는 문재인, 안희정, 이광재 등 그 누구도 평범한 사람들의 변혁 열망을 담아내지 못한다. 심지어 반동적으로 튀어나가기까지 한다. 오히려 그것은 민주당을 넘어선 제3지대를 찾아 나서려는 대중의 정치 실험으로 귀결됐다. 박원순 당선과 안철수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새누리당은 안되고, 민주당은 싫은 상황. 기회는 좌파에게도 열려 있다.
사람들은 이제 “노무현 정신”이라는 애매한 묶음을 구체적이고 명확한 형상으로 인식하고 싶어 한다. 꽤 많은 사람들은 그 작업 속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노무현 정신”과 현실 역사 속 노무현은 전혀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환상과 실재의 괴리를 확인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대안으로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환상을 품고 있었던 시점부터 끊임없이 그들의 의식에 도전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들이 환상을 버리는 순간 가장 먼저 기억하게 되는 이들은 자신의 의식이 정치적 환상에 머무르고 때 끊임없이 그들에게 도전해오던 사람, 혹은 정치일 것이다. 이명박이 노무현을 무덤에서 불러낸 지 벌써 3년이 지나가고 있는 이 시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도부장으로, 조내관으로, 허균으로 만드느냐라는 질문이야말로 좌파 활동가들이 스스로에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