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 총통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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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은 어디로?
김용욱
3월 20일 총통 선거 이후 대만의 정치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현 집권당인 민주진보당[이하 민진당]의 총통 후보 천수이볜이 50.01퍼센트를 얻어서 당선됐다.
그러나 2위인 국민당·친민당 연합 후보 롄잔과의 표차가 총 득표수의 1퍼센트 미만인 3만 표뿐인 데다, 선거 직전에 일어난 천수이볜 저격 사건과 30만 표에 이르는 사표 때문에 야당은 부정 선거라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국민당과 친민당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대만의 민주주의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운 일이다. 왜냐하면 사실 국민당이야말로 민주주의 억압과 선거를 둘러싼 암투·음모의 대가였기 때문이다.
국민당은 1945년 일본을 대신해 대만을 점령한 다음, 1947년 2월 28일 대만 내성인들[17∼18세기 대륙에서 대만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후손]의 저항을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중국공산당에게 ‘빼앗긴’ 대륙을 회복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강요했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강압적인 경제발전을 추구하는 데 유리했다. 내성인의 의사는 철저하게 무시됐고 대만 독립 요구는 탄압받았다.
국민당 일당독재가 끝난 것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중간계급 지식인들의 저항과 특히 1980년대 노동자·학생의 투쟁 때문이었다. 이때 천수이볜이 속한 민진당과 기타 정당들이 결성됐다. 하지만 국민당은 계속 깡패와 정보기관원들을 이용해 상대당 후보 진영에 테러 공격을 가하고 협박했다.
역설
민진당은 본토인과 대만인 중간계급과 일부 사회운동[특히 환경과 여성 운동] 지도부들이 연합해서 결성된 정당이다. 역설적이게도 국민당에 반대해 나타난 이들이 지지를 구하는 방식은 국민당 일당독재가 설정해 놓은 구분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민진당은 내성인에게 ‘대만 민족주의’를 호소했다. 대만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내성인과 외성인[국민당과 함께 들어 온 대륙인] 간의 격차는 많이 소멸됐지만 내성인들은 국민당의 억압정책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외성인들이 당내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됐고, 당내 일부 분파가 대만의 독립을 공개적으로 내세우면서 당 선거전략의 일부가 됐다.
이러한 득표전략은 대만사회 내에 얼마간 근거를 갖고 있다. 최근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양안 관계를 현상 유지해야 한다”는 사람들이 무려 70퍼센트나 됐다. 현상 유지는 실제 내용에서 대만 독립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만 중국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우려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독립 염원을 표현하곤 한다. 많은 외성인들도 이런 의견에 동의한다.
다수의 대만인들이 자결권을 원하는 이유는 너무나 당연하다. 대만은 19세기 말부터 국민당이 건너오기 전까지 일본의 식민지였고, 국민당은 중국 공산당에 패배하면서 대만에 한정된 정권으로 전락했다. 사실 국민당과 함께 건너온 일부 외성인 1세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자신을 대륙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신자유주의
그러나 비록 민진당이 대만인 다수의 정서에 호소하지만 그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당은 아니다. 오히려 집권 후 민진당은 이들의 열망을 거슬렀다.
2000년 천수이볜의 집권 이후 대만은 일련의 경제 위기로 휘청거렸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성장률이 5퍼센트 이하로 떨어졌을 뿐 아니라 공식 실업률도 대만 역사상 최고인 5.3퍼센트에 이르렀다. 여기에 민진당은 전형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대처했다. 금융 규제가 대거 완화되고, 노동 시장이 유연화되고, 복지 비용이 축소되며,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다.
하지만 대만이 경기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신자유주의 “개혁”이 아니라 대만의 최대 시장인 중국 경제의 고도성장 덕분이었다. 신자유주의 “개혁”은 대만내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면서 사람들의 삶을 불안정하고 힘들게 만들었을 뿐이다.
또, 2000년 총통 선거 당시 천수이볜은 부패정치 개혁과 원전4호기 건설 폐기를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둘 다 대만 대중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천수이볜은 이러한 약속들을 지키지 못했다. 그는 국민당의 부패 커넥션을 일부 해체했지만 그 대신 민진당이 새로운 커넥션을 형성했다. 이번 선거에서도 천수이볜은 뇌물 스캔들에 시달렸다.
그는 원래 환경 보호를 바라는 대중의 열망을 받아들여 원전4호기 건설을 폐기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국민당과 자본가들의 압력을 받아들여 이것을 번복하고 건설을 지시했다. 대규모 항의시위가 이어지면서 그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졌다.
2000년 총통 선거 패배 이후 지지율이 10퍼센트대로 떨어지며 쪼그라들었던 국민당은 이러한 대중의 정서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민진당이야말로 부패·독재 정당이고 경제 위기에 책임이 있다고 공격하면서 “총통을 바꿔 대만을 바꾸자”는 선거 구호를 내걸었다. 게다가 중국과 대만 관계의 현상 유지를 공약에 포함시켜 독립 문제에서도 민진당과의 차이를 크게 줄였다.
그러나 국민당이 진정으로 정권 탈환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많은 자본가들이 자신들에게로 돌아섰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천수이볜을 대만의 즉각 독립을 원하는 ‘위험한’ 인물로 만들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중국공산당은 대만 독립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1996년과 2000년 총통선거 당시 드러났듯이 중국공산당이 대만인들에게 통일을 강요하는 방식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공갈협박(함포외교!)이었다. 여기에 미국 정부는 툭하면 중국공산당의 침공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겠다고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대만인들의 자결권을 지지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1970년대 이래로 사실상 대만에 대한 중국공산당의 권리를 인정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지지해 왔다. 이후로도 미국은 한편으로는 대만에 값비싼 첨단 무기를 판매해 군비 경쟁을 격화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만이 독립을 선언해 중국공산당을 자극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실망
이러한 요인들은 대만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낳았지만 동시에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대만 내에서 자결권을 지지하는 여론을 강화했다.
그러나 천수이볜이 대만 독립 구호를 때때로 사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일관되게 독립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90년대 초 민진당내 즉각 독립파인 “신조류파”에 반대해 당 강령에 독립이 들어가지 않도록 반대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미국의 의견과 충돌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총통 당선 이후에도 독립이 대만인들이 자주적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중국공산당과 미국과 협상 대상이 될 수 있음을 반복해서 암시했다. 게다가 그는 이전에 국민당이 설정해 놓은 대 중국 투자 상한선(미화 5천만 달러)을 폐기하며 대만 자본주의가 중국에 투자할 수 있는 통로를 활짝 열었다.
또, 비록 천수이볜이 이번 선거에서 미사일 방어 계획에 관한 국민투표를 함께 진행했고 중국공산당과 미국이 이에 반발했지만, 이 안은 현재 국민당 진영측 부통령 후보인 대표적인 통일·친미 정치인인 쑹추위(국민당에서 분리한 친민당 당수)가 2000년 총통 선거 당시 지지했던 본토 공격용 장거리 미사일 도입보다는 덜 공세적이었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자신의 제국주의 정책을 뒷받침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확실한 악당이 필요했고, 천수이볜은 민진당 총통이라는 이유만으로 충분했다. 중국공산당 정부는 대만인 자본가들을 만날 때마다 대만인의 투자를 적극 보호하겠지만 대만에 있는 “무책임한 정권” 때문에 문제가 생기길 원하지 않는다고 경고했다. 중국 시장이 대만 자본주의가 회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믿고 있던 많은 대만인 자본가들은 중국공산당의 뜻을 알아차렸다.
자극
상해에 거주하고 있는 대만 기업인 대표는 총통 선거 때 국민당에 투표하기 위해 20만 명의 상해거주 대만인들을 귀국시키겠다고 공언했다(실제로는 1만 5천 명이 귀국했다). 심지어 천수이볜의 기업인 친구들마저 개인적 친분을 떠나 천수이볜을 지지할 수 없다고 발표하고 나섰다.
이런 사정 때문에 2003년 말에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롄잔과 국민당이 손쉽게 정권을 탈환하리라고 예상했다.
천수이볜은 중국 카드로 대응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기존 입장을 바꿔 2003년 말부터 공격적 발언을 시작했다. 그는 중국공산당이 대만을 겨냥하는 5백여 기 이상의 미사일을 철수하지 않으면 대만도 그에 상응하는 무장(미사일방어체제 구입)을 위한 국민투표를 총통 선거와 병행하겠다고 선언했다. 중국공산당은 “침략도 불사하겠다”며 민감하게 반응했다.
이 전략은 부분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천수이볜의 지지율은 원래 롄잔에게 크게 뒤져 있었지만 중국공산당의 발언이 대만인들을 자극한 덕분에 3∼4퍼센트 뒤지는 수준으로 만회했다. 그러나 2004년 초까지도 그는 모든 여론조사에서 롄잔에게 뒤져 있었다.
천수이볜은 이제 본격적으로 내성인의 ‘대만 민족주의’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그는 국민당이 대륙에서 건너온 군인들을 이용해 대만인들을 학살한 2·28사건 기념일에 중국공산당의 압력에 항의하는 2백만 명의 대규모 시위를 조직했다.
롄잔과 국민당도 비슷한 규모의 집회를 3월 초에 조직했다. 선거 직전 여론조사들은 천수이볜이 아주 근소한 차이에서 뒤지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아무도 승자를 자신 있게 예상할 수 없었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3월 19일, 투표 전 날 천수이볜 저격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천수이볜의 자작극인지 아니면 다른 누가 사주한 것인지는 여전히 확실치 않다.
국민당측은 즉각 총격 사건이 조작됐고 여러 선거 부정이 행해졌기 때문에 지지자들에게 항의 시위를 조직하라고 요구했다. 수만 명의 국민당 지지자들이 총통 관저 앞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이들 시위가 격렬해지자 국민당 내에서는 시위대를 통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 섞인 경고가 흘러나왔다.
여론은 분열됐다. 대만의 일간지 〈중국시보〉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66퍼센트의 사람들이 국민당의 요구인 즉각 재검표를 찬성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부패한 자본가 정당의 대명사인 국민당(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정당이기도 하다)이 민주주의와 대만인의 수호자로 자처하며 설치는 것에 대한 불만 때문에 3월 27일 대규모 시위를 전후로 롄잔과 쑹추위에 대한 지지율이 하락했다.
미래
대만의 총통 선거를 둘러싼 정치 불안이 어디까지 갈지 지금 예측하기는 힘들다.
천수이볜은 일단 재검표라는 국민당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대통령직을 내놓아야 하는 지경으로 내몰리기 전에 멈추고 싶을 것이다. 국민당의 롄잔은 일단 자기 요구를 관철했지만 마냥 낙관할 수는 없는 처지이다. 그는 만약 이번 선거 결과를 번복하지 못한다면 사실상 정치 생명이 끝난다. 그와 연관된 국민당 분파도 마찬가지다. 심각한 경우 국민당이 쪼개질 수도 있다.
3월 29일로 예정됐던 영수회담은 열리지 못했다. 설사 나중에 회담이 열리더라도 정치 위기를 신속하게 봉합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둘 다 판돈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여기에 중국공산당이 앞으로 어떤 입장을 취할지가 변수이다.
중국공산당이 새 대만 정권에 어떤 입장을 취할지는 불분명하다. 설사 중국공산당이 천수이볜보다 상대적으로 선호했던 국민당 롄잔이 우여곡절 끝에 총통이 되더라도 양안 관계에서 군사적 긴장이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누가 총통이 되든 대만의 여론은 갈수록 독립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중국공산당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자본주의와의 관계와 함께 중국 공산당의 군사적 위협은 대만 정치에 계속 중요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