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노사관계가 ‘모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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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노사관계가 ‘모델’인가?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은 5월 11일 자신이 재직했던 경북대에서 ‘참여정부의 국가발전 전략’에 대한 특별 강연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혁 없이는 성장도 없다”고 주장하며, 노사관계에 대해 “우리 노사관계는 불신과 대립을 증폭하는 영미형은 맞지 않으며 노사가 대타협하는 네덜란드 모델을 하루 속히 도입해야 한다”면서 “이를 통해 노사가 수시로 머리를 맞대고 신뢰를 바탕으로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총선 때 국민소득 2만 달러를 소리 높여 외치던 열린우리당은 이제 이를 위해 노사 대타협의 새 모델을 도입하자고 하고 있는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내가 바라보는 ‘네덜란드 모델’은 노사가 쓸데없는 신경전으로 힘을 빼지 않는 그런 모델이다. 그러나 이런 평화 상태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그것은 장담할 수 없다.
네덜란드는 어떤 나라인가? 인구 1천 6백만 명의 작은 나라(면적은 한국의 40퍼센트), 주변에 독일·프랑스·영국 같은 나라에 둘러싸여 힘은 못 쓰지만 유럽의 항구로서 물류산업과 유통산업, 제조업과 금융업이 발전된 한국 다음의 세계 11위의 경제 강국이다.
아마도 네덜란드를 방문한 한국의 학자나 정부 관료나 정치인들은 네덜란드가 너무나 부러울 것이다.
히딩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감이 가는 데다가 축구도 잘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기업이 많은 나라기 때문이다. 몇 개를 뽑자면 석유회사 셸, 전자회사 필립스, 가정용품과 식품으로 유명한 유니 레버, ING은행, ABN 암로 은행, 유명한 맥주회사 하이네켄 등이 있다.
네덜란드가 이렇게 잘 나가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이 네덜란드의 독특한 노사합의 문화를 꼽는다.
해마다 두 차례 노사와 전문가들이 모여 노동 문제뿐 아니라 사회복지와 경제정책까지 논의해 가능한 합의를 이끌어내고, 파업이 거의 없고, 파트타임은 세계 1위를 달리고, 비정규직이 많고, 노동자들은 적어도 영어와 독어 정도는 능숙하게 한다.
그리고 기업 법인세가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서 적고, 유럽 최대의 항구 로테르담에서 유럽전역으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망 덕분에 물류비도 싼 편이다. 정말 네덜란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라고 할 수 있다.
필자도 처음 네덜란드에 왔을 때는 우리가 IMF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꺼풀 벗겨 보면 네덜란드의 다른 면모가 보인다.
비정규직은 3년 이상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반드시 전환시켜야 한다. 계약직 노동자도 동일노동에 대해서는 동일임금이 보장된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은 유럽에서 가장 짧은 수준이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100으로 놓을 때 미국 노동자들은 140이다. 주5일 근무제는 1960년대부터 시행됐고, 보통 제조업 노동자들은 한 달간 여름 휴가를 즐긴다. 그리고 그 공백은 용돈을 벌기 위한 대학생들이 메운다.
회사 사정이 어려워 노동자들이 해고될 때는 그들의 재취업과 당장의 생계 보장을 위한 계획을 노조와 사용자가 함께 마련한다.
바로 이런 안전판이 있기 때문에 네덜란드의 노동조합은 임금인상에 모든 것을 걸 필요가 없었다. 민주노동당이 주장하는 무상교육(고등학교까지), 무상의료가 거의 완전하게 실시되고 있고, 부자들이 세금을 더 많이 내도록 되어 있다.
머리띠
그러나 네덜란드는 갈수록 심해지는 국제경쟁 속에서 혼자만 평화로운 섬은 아니다. 한국처럼 수출 의존도가 높은 네덜란드는 2001년부터 미국과 독일, 이 두 주요 교역국가의 경제가 어려워지자 극심한 불황에 빠졌다. 1990년대 중반 3퍼센트대의 견실한 성장을 보이며 서유럽에서 가장 부러움을 많이 샀던 것은 옛날 얘기가 돼 버렸고, 2001년 1퍼센트 이하의 성장을 보인 후 하강곡선을 그려 작년에는 마이너스 0.8퍼센트 성장에 머물렀고, 올해와 내년에도 1퍼센트대에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초 출범한 네덜란드 정부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대의 재정 삭감을 감행하고(약 25조 원),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 동결을 요구하고, 연금제도 변경 등 사회복지 부문의 재정 지출을 낮추기 위한 대수술에 들어갔다.
이에 대해 노조들은 재정 삭감이 사회복지 분야에 집중되어 저소득층과 사회적 약자들이 일방적으로 고통을 전담하게 된다는 점을 들어 정부에 대한 전면 투쟁을 선언했다.
여름 휴가 기간이 끝난 지난해 9월부터 시작된 노동자들과 사회 각층의 투쟁은 점점 열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10월 중순, 노조는 하루 전날까지도 정부의 태도 변화가 없다면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하다가 별다른 소득도 없이 정부의 임금동결에 합의를 해주었다.
어이 없는 타협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는 대단했다.
그러나 노조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는 정부와 싸우기에는 너무 약해져 있었다. 1982년 고용안정과 임금동결을 맞바꾼 노사의 역사적 대합의(바르세나르 협약) 이후, 노조는 점점 온건해졌고, 20년이 지난 후에 다시 투쟁의 깃발을 올렸지만 머리가 희끗한 늙은 투사들이 앞장서는 상황에 이르렀다.
네덜란드 정부는 노동자들의 약점을 알았다. 이제 정부는 노동시간을 하루 최대 12시간, 주당 60시간으로 연장하는 충격적인 계획을 들고 나왔고, 실업과 산업재해 기금 수혜자 제도를 엄격하게 적용하는 데로 나가고 있다.
그야말로 네덜란드 노동자들이 지금까지 쟁취해 온 성과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네덜란드 노동자들은 이제 마치 한국 노동자들처럼 머리띠를 동여매고 거리로 나서고 있다. “노동자 자본가 사이에 결코 평화란 없다”는 노래가 문득 떠오른다.
장광열(민주노동당 유럽지구당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