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의 진로 논쟁:
사회민주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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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진보정당들 내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의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다. 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올해 초에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으로서 … 한국의 미래 모델과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가자”며 사민주의를 당 노선으로 제시한 바 있다.
노회찬 대표는 “이제까지 한국의 진보정당들은 일종의 사민주의 정당으로 분류되는 것이 정확하다”고 덧붙였다.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등 사회단체와 지식인들도 사민주의 논의에 적극 뛰어들고 있다.
사민주의는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개혁주의다. 사민주의 정당의 등장은 노동운동이 부르주아 정당에 기대지 않고 독립적인 정치적 표현체를 갖게 됐음을 뜻한다. 노동운동이 성장할 때, 기존 부르주아 정당들로는 노동운동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사민주의 정당도 강력한 노동자 투쟁을 거치며 탄생했다. 1987년 민주화 투쟁과 함께 터져 나온 노동자 투쟁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자주적 노동조합을 건설했다. 1995년에 민주노총이 탄생했다.
1997년, 노동법 날치기 항의 총파업을 거치면서 의회에서 노동운동의 정치적 표현체의 필요성은 민주노동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민주노동당은 “우리는 이 땅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질곡을 극복”한다고 당헌에서 밝혔고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 같은 대중의 개혁 열망과 요구를 대변했다.
정경 분리
그러나 사민주의는 약점과 한계도 있다.
우선, 사민주의 정당은 자본주의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저항을 체제의 틀 안에 묶어 두려 한다. 사민주의 정당들은 흔히 ‘사회를 바꾸는 길은 의회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해 개혁 조처를 도입하는 것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사민주의 정당에 정치 행위는 의회 참여로 환원된다.
이 점에서 사민주의의 또 다른 한계가 발생한다.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 중 하나는 경제와 정치의 분리다. 정치는 선거에서 이기고 법안을 통과시키는 문제로 한정된다. 노동자들이 경제적 개선을 위해 벌이는 투쟁은 제한적이나마 합법적으로 보장되지만 정치와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정경 분리는 개혁주의 정당과 노조 상근간부층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파업과 임금인상 등 경제적 쟁점은 노조 지도자가 다루고 주로 선거로 여겨지는 정치적 쟁점들은 사민주의 의원들이 다루는 식이다. 과거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도 이런 식의 가정을 바탕에 두고 있었다.
반면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지배계급에 대항해 하나의 계급으로서 행동하며 외부에서 압력을 가해 지배계급을 굴복시키려 하는 운동은 모두 정치 운동”이라며 정치와 경제의 결합을 주장했다.
한편, 사민주의는 역사적으로 변해 왔다. 초기 사민주의 정당들의 고전적 개혁주의는 여러 개혁을 성취하면서 사회를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점진적으로 변혁하길 지향했다.
1950~60년대에는 또 달랐다. 이제는 자본주의를 변혁하지 않고도 케인스주의 정책을 통해 경제 성장과 부의 재분배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 구상은 경제 호황 때는 언뜻 보아 합리적인 듯했다.
그러나 1970년대 경제 위기가 부활하자 사정이 달라졌다. 노동자들은 분노하고 기업주들은 두려워한 이 시기에 매우 많은 사민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그런데 이때 집권한 사민주의 정부들은 경제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기존의 성과들을 공격하는 방법을 택했다.
대표적으로 1981년 프랑스 사회당의 미테랑 정부는 광범한 은행 대기업 국유화 같은 좌파 강령을 내세웠다. 자본가들은 자본을 해외로 대량 유출하고 투자를 보류하는 등 엄청난 압력을 넣는 것으로 응징했다. 그 결과 미테랑은 1982년 진로를 바꿔 사실상 신자유주의를 수용했다.
여러 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수용했다. 영국 노동당을 이끌었던 토니 블레어는 이런 변절을 ‘제3의 길’이라고 포장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 강령에 “사회민주주의 한계 극복”을 넣은 것도 이런 서구 사민주의 정당의 전철을 밟지 말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민주의를 “유럽의 많은 나라에서 확고한 성공 사례로 자리 잡은”(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 사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제3의 길
최근 경제 위기와 양극화, 정치 위기가 계속되며 한국의 사민주의 논의도 혼란을 겪고 있다. 무엇보다 사민주의 정당의 정치적 기반인 노동조합운동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혼란의 큰 배경일 것이다. 물론 노동조합운동의 위기에는 진보정당들의 위기와 분열도 다시 영향을 미쳤다.
과거 민주노동당은 고전적 개혁주의를 지향하는 좌파 사민주의 정당의 성격이 있었다. 부유세, 무상급식, 무상의료 등을 앞세우며 부르주아 정당과는 다른 진보적 의제들을 제시했다. 강령에서도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말했다.
그러나 최근 진보정당들의 행보와 논의는 민주노동당 시절보다 후퇴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무원칙한 ‘묻지마 야권연대’를 우선시하느라 많은 진보적 의제들이 민주통합당 수준으로 용해되기도 했고 일부에서는 ‘민주당 왼쪽 방’으로 들어가자는 주장까지 나왔다.
대선 이후,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이 ‘근본주의적 요구가 아닌 실현 가능한 정책과 생활 밀착형 정치’를 강조하며 대중 투쟁과 거리를 두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우려스럽다. 진보정의당 지도부가 박근혜에게 전략적 동맹을 제안했던 것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이 이런 방향으로 계속 나간다면 민주당과의 차별성이 흐려져서 안철수 같은 세력에게 기회를 뺏기기만 할 수 있다.
지금 박근혜는 위기를 겪고 있고 민주당은 이럴 때조차도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은 이런 정치적 모순과 위기를 파고들어야 한다. 위기의 중심에 있는 거대 정당과는 다른 급진적인 의제와 대안을 제시해야 하고 진보정당의 기반인 노동운동의 단결과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방향을 제시하며 진보정당들의 진로 논의에 개입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