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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와 유시민

김근태 - 기회주의적 처세술로 버텨 온 ‘개혁’적 이미지

2002년 대선 때는 개혁에 대한 기대감이 노무현 지지로 표현됐다. 1년 반이 지난 지금, 노무현이 대중의 실망을 자아내자, 열우당 김근태가 개혁의 상징으로 비쳐지고 있다.

김근태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으로 활동하면서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의 악독한 고문을 폭로한 것으로 유명해졌다. 그 이후 김근태는 재야 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그는 1990년대 초까지도 “민족해방과 민주변혁의 과제”가 필요하고 “민중이 역사 발전의 주체임을 믿는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그는 1990년 3당 합당에 대해 “반민중 연합”이자 “친미파쇼연합”이라고 비난했다. 의회 전술에 대해서도 “과연 평화적 이행의 길이 있느냐”며 “대중투쟁을 증폭시키”는 목적에 한해서 용인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그는 3당 합당을 통해 군부와 타협한 김영삼 정부를 “긍정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그는 “민주대연합”을 내세워 기성 정치권의 ‘개혁’에 의존했고, 결국 그 자신이 1995년에 기성 정치권에 편입했다.

계급장

기성 정치권에 편입한 뒤, 그는 급속히 ‘타락’하기 시작했다. 1997년 대선 때 그는 김대중과 김종필의 공조를 옹호했다. 2002년 대선 후보 경선 때는 “YS가 민주 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면서 김영삼을 찾아가는가 하면, 김종필을 “서울대 학생운동의 선배”로 모셨다.

이제 그는 자신을 완전히 “시장주의자”로 규정한다. “미국 주도의 세계화”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며 철도를 “민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저항하는 노조를 “구조조정의 걸림돌”이라고 매도했다.

이런 변화에도, 그는 ‘개혁’ 이미지를 유지하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그가 “원칙과 정도(正道)에 집착”하느라 “신중함과 진솔함“을 보이고 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그의 ‘신중함’은 원칙 때문이 아니라, 양쪽의 모순된 압력을 모두 만족시키려는 기회주의적 태도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가령 그는 아파트 분양 원가 공개에 대해 노무현더러 “계급장 떼고 논쟁하자”고 했다가, 금새 ‘노무현에게 직접 요구한 것은 아니’라며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파병 문제에서 이 점이 두드러진다. 그는 작년에는 반전 집회에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정작 이라크 전쟁에 동참하는 파병 계획은 당의 원내 대표로서 앞장서서 통과시키는 수완을 발휘했다. 그 뒤 파병 철회 문제에 대해 “답변하기 어렵다”고 회피하다가, 가끔 입장을 밝힐 때는 파병 결정이 “유효하다”면서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모순된 입장을 말하곤 했다.

그리고 파병 찬성론자를 보호하기 위해, “이라크 파병 같은 정치적 소신에 관한 문제”는 “[국민]소환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못박았다.

결국 김근태가 개혁 기대를 모을 수 있는 것은 교활한 처세술로 대중을 눈속임하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히 시장주의와 파병 불가피를 주장하는 기성 정당의 주류 정치인이다.

유시민 -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

1980년대 “항소이유서” 때문에 운동권 사이에서 유명해진 유시민은 운동권 출신 다른 정치인들보다 기성 정치권에 일찍 발을 담갔다. 그는 1990년경에 이해찬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정치 경험을 쌓았고, 1991년 지자체 선거에서 평민당 후보로 출마할 뻔했다. 그러나 밀실 공천 때문에 공천에서 탈락한 후, 한동안 기성 정치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1992년 독일 유학을 떠날 즈음에 자신이 가담했던 학생 운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추상적인 구호나 주의·주장보다는 … 양보와 타협이 요구되기도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에서 개량주의적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는 1990년대 대부분을 독일에서 유학하면서, 〈한겨레〉 특파원을 했다. 특히 그는 독일에서 계급 타협을 중시하는 서유럽 사회민주주의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돌아왔다.

그는 “대량실업과 재정난 앞에서는 북유럽 복지국가도 견딜 도리가 없는 모양”이라며 독일 사민당의 신자유주의 수용을 옹호했다.

그가 다시금 남한 정치에 뛰어든 것은 1997년 대선 직전이었다. 그는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보다 더 우경화한 입장을 내놓았다. 그는 김대중보다 더 우파인 조순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점점 인물론에 사로잡혀 노무현을 추켜세우기 시작했고,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 당선 운동을 주도했다. 이 때부터 그의 우경화는 노무현의 우경화 속도에 발맞춰 더 빠르게 진행됐다.

특히 탄핵 사건 이후에는 노무현의 심정을 잘 대변하는 “리틀 노무현”답게 신경질적 어투로 노무현과 그의 우경화에 대한 비판을 매도하느라 바쁘다.

그는 김선일 씨 피랍 직후 파병 철회 여론이 높아지자 “이라크에 가 있는 자기 교민이나 국민이 납치되었다고 해서 군을 철수시킨 나라가 있습니까?” 하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의 뻔뻔스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가고 있다. 며칠 전 드러난 대표적 친노(親盧) 사이트 서프라이즈 대표 부인의 교수 임용 청탁 사건에 대해서도 “교수 임용에 지원하면서 [청탁] 전화 안 하는 사람도 있나?” 하고 두둔했다. 게다가 자신이 장복심에게 공천 명목으로 100만 원을 받은 것에 대해서도 “의원들끼리 후원금 주고받은 게 문제가 되느냐”며 ‘도덕성’조차 내팽개쳐 버렸다.

유시민의 타락은 친노의 정치적 귀결이 어디까지 갈 것인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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