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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의 핵심 쟁점이 사상의 자유인가?

〈레프트21〉 116호에 김문성 기자는 “낮은 수준의 자유민주주의도 지키지 않는 마녀사냥을 중단하라”는 기사에서 “RO의 실체나 조작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 주장한다.

동의할 수 없다. 우선 ‘내란음모’ 여부가 중요한 쟁점이다. 김문성 기자도 지적하듯이 이른바 ‘RO’ 모임에서 강조점은 전화국과 한전시설 습격이 아니라 ‘평화운동 건설’이었다. 그런데 국정원과 검찰은 협박과 매수로 끌어들인 경찰 첩자의 증언을 빌미로, 왜곡한 녹취록을 들이대며 내란음모를 꾸몄다고 마녀사냥을 하고 있다.

우리는 이 마녀사냥이 국정원의 내란음모 ’조작‘이라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모임을 했다거나 모임 중에 총기에 대한 말이 나왔다거나 하는 사실관계는 이 광폭한 내란음모 조작에서 사소한 문제일 뿐이다. 가장 커다란 혐의, 즉 ’내란음모‘ 자체가 완전한 날조라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심지어 경찰첩자는 ’RO'라는 명칭을 다른 공안사건에서 듣고 추측했다고 증언했다. 첩자의 추측으로 통합진보당이 해산청구를 당한 것이다. 게다가 진술서도 그가 진술한 게 아니다. 국정원이 미리 작성한 것을 읽고 서명한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국정원의 진술서와 첩자의 진술이 계속 엇박자가 났다. 그러자 국정원으로부터 계속 돈을 받아왔던 첩자가 아직 ‘잔금’을 못 받아 그런 거라는 분석(?)이 나올 지경이다.

김문성 기자는 진정한 쟁점이 ‘사상의 자유’라고 본다. 그는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정부가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리고 진보당을 위헌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활동의 위법성 이전에 특정한 사상(양심)을 문제 삼는 것이다. 이 재판을 사상의 자유 자체를 위축시키려는 사상 재판으로 봐야 하는 이유다.” 단죄의 목적이 사상(양심)이라는 말로 들린다.

과연 박근혜 정권이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을 마녀사냥하는 이유가 머릿속에 있는 ‘종북’사상 때문일까? 그리고 과연 이들은 자신들의 ‘종북’사상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투쟁해서 일궈낸 성과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원의 반민주적인 정치개입으로 곤경에 처했다. 박근혜 정권은 이 국면을 정면돌파하기로 했다. ‘안보를 위해 종북세력을 척결해야 한다. 이를 위한 국정원, 검찰, 경찰, 군대의 정치개입은 정당하다!’ 이것이 통진당에 대한 마녀사냥과 마녀재판을 통해 전하는 박근혜 정권의 외침이다. “저들이 침투파괴 공작을 해서라도 단죄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는 대선 TV토론에서 박정희를 다카끼 마사오라고 부르는 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 ‘1% 특권층이 가진 정치권력을 99%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김일성주의자의 발언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울려 퍼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김종훈 같이 CIA에서도 일한 인재를 공격하는 세력이 없어야 한다. 저들의 의도는 특권 지배계급의 권력에 도전하는 자들이 다시는 이토록 세력을 키우지 못하게 확실하게 짓밟겠다는 것이다.

지지도 없고 세력도 없는 ‘종북’주의자들이라면 조작과 왜곡이라는 무리수를 써가며 ‘내란음모’를 운운하며 이토록 가혹하게 짓밟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치적 반대파, 그것도 노동자 계급 운동에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는 세력에 대한 단죄가 이 마녀사상의 본질이다. 그래서 이 마녀사냥의 칼끝은 또한 조직노동자 운동을 겨냥하고 있다. 공무원노조에 대한 탄압, 전교조에 대한 탄압이 뒤따랐다. 새누리당은 ‘이적’시민단체도 해산하겠다고 한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은 국정원 정치공작 폭로에 대응하는 광기 어린 일련의 ‘종북’몰이 공안탄압과 연결된 것이다. 하나의 개별적 독립적 사건이 아니다. 저들은 이제 박창신 신부를 국가보안법으로 고발하고 JTBC 뉴스를 징계하겠다고 한다. ‘종북’신부고 ‘종북’세력을 옹호했다고 말이다. 그러면 박창신 신부와 JTBC 뉴스 징계 건도 사상의 자유가 ‘진정한’ 쟁점인가?

통합진보당에 대한 탄압의 핵심 쟁점이 사상의 자유라는 주장은 무엇보다 우리의 대응을 굼뜨게 한다. 이 탄압은 정권의 반대자들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전술이다. 회색의 민주당은 통진당에 대한 탄압이 강화될수록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정의당 류의 개량주의자들은 탄압이 있을 때마다 재빨리 헌법을 운운하며 자신들은 종북이 아니라고 선긋기에 나섰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마녀사냥은 반대파와 좌파를 분열시키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응은 무엇이어야 할까? 당연히 마녀사냥에 반대하고 통합진보당을 방어하며 정권의 공격에 맞서 함께 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김문성 기자의 글에서 함께 투쟁하겠다는 연대의 목소리가 없다. 그는 나란히 배치된 연결 기사 “국가보안법은 친북사상뿐 아니라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사상도 공격하는 무기다”에서 결론 삼아 이렇게 주장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 될 것이다. 아울러, 급진적 좌파가 노동계급 운동 속에 뿌리내리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음험한 탄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책일 것이다.”

이 주장 자체가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과제가 빠졌다. 노동자들과 좌파가 통합진보당의 마녀사냥과 종북공안탄압에 맞서 함께 어깨 걸고 투쟁해야 한다는 주장이 없다.

공무원노조는 진보정당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압수수색을 당하고 철도노조의 가장 강력한 현장조직 가운데 하나인 ‘한길노동자회’가 통합진보당과의 연관을 문제로 조사를 받는 상황에서 “기죽지 말고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하며 좌파는 열심히 노동자 운동 속에 뿌리내리자”라는 주장만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통합진보당은 지금 정권의 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다. 좌파는 이들과 함께 투쟁해야 한다. 이 모든 허위와 거짓, 조작과 왜곡을 통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공격에 지금 당장 좌파여 “응답하라 2013!!”

최용찬 동지의 비판에 답하며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김문성

최용찬 동지는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방어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내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종북’사상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투쟁해서 일궈낸 성과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부당하게 대립시키는 최용찬 동지의 주장은 놀랍다.

그러나 최용찬 동지의 주장과 달리 사상의 자유야말로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가 중요한 핵심 이유다. 그래야 노동계급이 자기 해방 사상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이에 따라 조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투쟁이 진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확대해 온 역사였다.

나는 “국정원이 한국 민주주의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는 [해외 한국학] 학자들의 성명”을 최용찬 동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 성명은 공안탄압을 비판하며 “한국이 …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연설·사상·정치 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행위로 옮겨지지도 않은 “내란음모 여부”, ‘RO’의 실체 여부가 그토록 쟁점이 되겠는가. 최용찬 동지는 왜 “내란음모”가 ‘조작’이라는 데 매달릴까.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이 “평화운동 건설”이라는 사상 토론만 했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아닌가. 반대로 지배자들은 바로 그 사상 토론을 “내란음모”의 증거로 만들려 하기 때문 아닌가.

따라서 최용찬 동지 스스로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의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며 논지를 전개하는 핵심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진보당 탄압에 맞선 투쟁에서 사상의 자유 문제가 핵심이라고 규정하면 그 사상을 지지하는지 비판하는지도 언급해야 하는데, 그게 싫은 것이다. 그러니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 탄압받는 민주주의 문제’라고 규정해, ‘닥치고 방어’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최용찬 동지는 “‘RO’의 실체나 조작 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는 내 주장을 진보당에 대한 종파적 비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진보당을 무비판적으로 방어해야 진정한 방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목이 “마녀사냥 중단하라”이며, 굵은 고딕체로 강조하면서까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구속자들이 즉각 석방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내 글을 “함께 투쟁하겠다는 연대의 목소리가 없다”고 매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도

그러나 사상 탄압에 맞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론은 단순히 저들의 탄압이 “조작”이라는 주장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지배자들이 그어 놓은 선, 즉 ‘현재의 헌정 체제, 즉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상은 법적 단죄의 대상’이라는 대전제(합헌·애국 프레임)에 도전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좌파들을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지배자들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둘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볼 때, 사실 진보당 활동가들이 어떤 토론을 했건 사상과 토론의 자유이므로 법적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만큼 명쾌하고 강력한 반박이 어디 있겠는가. 방어에도 더 효과적이다. 진보당 지도부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함께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은 진보당 활동가들을 방어하면서도 논리 자체는 독립적(비판적)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무조건적 그러나 비판적인 지지·방어” 정신이다. 노동계급 대중은 자본주의를 변혁하고 해방의 주체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흔히 자본주의 지배질서에 근본으로 도전하지 않는 이런저런 개혁주의 사상들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한다. 따라서 노동계급 운동 일부인 동지들과 한편에 서지만(무조건적인 지지·방어), 노동계급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되거나 그 잠재력을 훼손하는 사상이나 전술을 향해서는 독립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당의 해명, 활동, 사상에 무비판적이어야 제대로 방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연대”를 설득하는 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진보당의 초기 말 바꾸기 실수 때문에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또한 조작 여부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확실히 사실이 규명될 때까지 방어를 유보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내 글의 핵심 취지는 박근혜의 공세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인 좌파의 전술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최용찬 동지는 박근혜의 최근 공세에서 진보당 탄압이 차지하는 비중을 과장해서 본다. 곤경에 처한 박근혜 정권이 진보당을 해산 위기로 몰자,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위축돼 싸우기 힘들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박근혜 정부도 촛불 지켜보니까 ‘별거 아니네’ 하면서 정면돌파로 나오[면서] ... 약한 고리를 공격한 것"이라는 서강대 이호중 교수의 진단이 더 일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마녀사냥에]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라는 내 주장이 “한참 부족하다”는 비판을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11월의 양대 노총 노동자대회나 최근 전교조 총투표, 학비 노동자 파업, 인천공항 노동자 파업 그리고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 준비 상황, 12월 7일 시국대회에서 드러난 분위기를 보면 그것은 기우인 듯하다. 나는 이런 노동자 투쟁이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용찬 동지가 나를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전술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파업을 앞둔 철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면서 말을 걸고, 투쟁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 전술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동시에, 박근혜 정권의 진보당 탄압에 맞서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자는 것인가? 이것은 이미 〈레프트21〉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철도 노동자들에게 왜 진보당을 방어해야 하는지를 주장하면서 말을 걸고, 진보당을 방어하지 않으면 ‘종북’으로 몰려 위축되고 분열해 투쟁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자는 것인가?

최용찬 동지의 주장이 후자라면, 현실적이기보다는 도식적이다. 엘리트 활동가들의 ‘정치투쟁’ 도식에 현실을 꿰맞추려는 태도는 노동자들이 투쟁 경험을 통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이야말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종파적 태도 아닐까.

끝으로 나는 ‘RO’ 모임의 강조가 ‘평화운동 건설’이었다고 말한 바가 없다. 나는 진보당 차원의 공식적 강조점에 관해 말한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런 진술이 이들을 방어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토론했든 사상의 자유를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