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불안정해진 동아시아:
1백 년 전의 유럽을 닮아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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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백주년이 되는 해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나, 유럽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리고 제국주의 열강의 대량 살육 속에 무려 1천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오늘날 동아시아의 상황이 바로 1백년 전의 유럽과 비슷하다는 무시무시한 얘기가 많이 나온다. 놀랍게도 이런 얘기가 바로 일본 총리 아베의 입에서 나왔다. 아베는 1월 22일 다보스 세계경제 포럼에서 1914년 당시 경쟁 관계이던 영국과 독일이 지금의 중국·일본처럼 매우 강력한 교역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결국은 충돌했다며, 오늘날의 동아시아가 제1차세계대전 당시의 유럽과 “비슷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우발적인 수준에서나 부주의한 방식으로 갑자기 충돌이나 분쟁이 발생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은 비단 아베 같은 우익 정치인만의 것이 아니다. 최근 〈파이낸셜 타임스〉 수석 논설위원 마틴 울프나 전(前) 미국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 같은 서방의 저명한 친자본주의 이데올로그들도 동아시아 상황을 1백 년 전 유럽과 비교하면서 걱정했다.
비슷한 상황
동아시아의 현 상황을 보면 이런 얘기가 그저 황당한 유비(類比)로만 들리지는 않는다. 일본 아베 정권은 미국의 지지를 받으며 집단적 자위권 채택을 천명하는 등 군사대국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에 대응해 중국도 동중국해에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하는 등 맞대응에 나서고 있다.
중국이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직후인 지난해 12월 5일, 남중국해 공해상에서 중국 항공모함의 움직임을 밀착 감시하던 미국 순양함 카우펜스함을 중국 군함이 저지하려고 접근했다가 충돌 직전까지 간 사건이 일어났다. 1월 31일에는 동중국해 상공에서 실탄을 탑재한 중국 수호이 전투기 2대가 중국 방공식별구역 안에 들어온 일본 전투기를 쫓아, 양국 전투기들이 장시간 공중 대응전을 펼쳤다고 한다.
2월 4일 일본 총리 아베는 “외국의 조직적 공격을 뜻하는 ‘유사사태’에는 이르지 않는 ‘회색 지대’의 사태 때도 자위대가 출동할 수 있[도록] 구체적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회색 지대’에는 어민으로 위장한 게릴라가 섬을 점령하는 등의 상황도 포함돼 있다. 그래서 앞으로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에 중국 민간 선박이 접근하면 일본 해상보안청(한국의 해양경찰청에 해당)이 아니라 해상 자위대가 대응할 수 있게 허용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최근의 사태 전개는 미국·일본과 중국 간에 “우발적 충돌”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음을 보여 준다. 이 때문에 앞서 언급한 마틴 울프 등이 경제 대국 통치자들에게 상황을 ‘오판’하면 안 된다고 요구하는 것이다.
물론 강대국 정부 최고위층의 호전성과 ‘오판’은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이다. 그래서 미국 오바마의 ‘아시아 귀환’, 일본 아베 정권의 강경 대외 정책 표방, 중국 시진핑 정권의 등장 등이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긴장을 고조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강대국 통치자들이 내리는 호전적인 ‘오판’의 근본적 원인도 알아야 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내재적 논리가 바로 제국주의 경쟁과 충돌을 부르는 진정한 동력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1차세계대전의 비극에서 우리가 진정으로 배워야 할 점이다.
제1차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 축적을 위한 자본·국가 간 경쟁이 어떻게 끔찍한 파국을 낳는지를 보여 줬다.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은 1870~80년대 대침체를 계기로 주요 선진국 간의 영토 확장 경쟁으로 나아갔다. 영국·프랑스·독일 등 제국주의 열강은 자국 기업의 이윤을 보장하려고 앞다퉈 투자처, 연료 산지, 군사적 요충지들을 식민지로 삼았다. 전 세계를 무대로 한 제국주의 열강의 영토 확장 경쟁에서 성패는 군사력이 좌우했다. 그리고 군사력 경쟁은 거의 필연적으로 세계 곳곳에서 열강의 충돌을 낳았고, 끝내 제1차세계대전까지 일으켰다.
내재적 논리
비록 과거와 달리 지금 식민지 확보 경쟁은 없지만,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주요 열강이 갈등을 빚는 동역학은 제1차세계대전 때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20세기 초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세계경제의 불균등 발전과 모순을 강조했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동성 자체가 이러한 불균등성의 분포를 바꿔 국가 간 힘의 균형을 끊임없이 바꿔 놓는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자본주의 열강 간의 안정적 질서를 구축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제1차세계대전이 일어난 레닌 시대에 최강의 자본주의 국가인 영국이 독일과 미국의 부상에 직면했다면, 오늘날 국가 간 세력균형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미국의 상대적 쇠퇴와 중국의 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식민지를 거느리지 않은 제국주의 국가이지만, 강력한 공업과 금융 경쟁력을 바탕으로 세계경제를 주물러 왔다. 그리고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 우위와 전 세계에 걸친 해외 군사 기지 네트워크로 유라시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주요 해상교통로를 지배하는 것은 경제적 패권을 유지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한편, 중국 경제는 지난 30년 동안 폭발적으로 성장한 결과 지금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며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자 세계 1위의 수출 대국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중요한 지정학적 변화를 낳았다. 중국 지배자들은 경제력의 증대를 바탕으로 군사력을 급격히 증강하기 시작했다. 특히, 중국은 해군력 증강에 노력을 기울여 왔는데, 이것은 중국 지배계급의 처지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왜냐하면 엄청난 양의 원유를 빨아들이는 중국 경제에 안전한 원유 수송로 확보가 필수적이고, 대외 무역이 많은 중국 경제에 해상교통로 확보도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중국 지배자들은 인도양과 말라카 해협을 거쳐 남중국해를 지나 중국 본토로 이어지는 해상교통로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중국은 원유 수입의 80퍼센트와 대외 무역의 90퍼센트를 이 길에 의존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 종전 이후 줄곧 인도양과 태평양을 지배하는 상황을 불만스럽게 여겼고, 중국 근해에서 미군을 태평양의 훨씬 동쪽으로 밀어내고 싶어 한다. 이것이 바로 “태평양은 두 대국[미국과 중국]을 포용할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중국 국가 주석 시진핑의 발언에 담긴 진정한 속내다.
반대로 중국의 해양 팽창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한테 커다란 도전으로 보인다. 오늘날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부분인 동아시아에서 중국에 밀리는 것은 미국 지배자들한테는 정말 상상하기도 싫은 끔찍한 시나리오다.
이것이 오바마가 “아시아 귀환”을 천명하며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군사력을 늘리고, 이 지역의 동맹들을 다잡기 시작한 까닭이다. 미국과 일본 지배자들이 요즘 부쩍 동아시아에서 무력에 의한 “현상 변경”을 반대한다고 외치곤 하는데, 이는 자신들이 주도해 온 역내 질서를 중국에 밀리지 않고 앞으로도 공고히 유지해 나가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전면전?
그렇다면 동아시아에서 1백 년 전의 유럽처럼 강대국 간 전면전이 일어날 수 있을까?
단기적으로 봤을 때 이 가능성은 여전히 낮다. 아직 세계경제의 상태와 강대국 간 갈등의 정도가 강대국 간의 전면전을 일으킬 정도로 악화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1차세계대전 때는 경쟁 관계인 영국과 독일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서로 엇비슷했다. 반면, 오늘날 동아시아에서는 여전히 초강대국 미국이 경쟁국인 중국에 비해 군사와 경제에서 상당한 우위에 있다. 예컨대 미국은 항공모함이 무려 11척인 데 반해, 중국은 이제 겨우 1척을 운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은 일본·남한·호주 등 지역 동맹들을 끌어들이고, 중국과 다른 나라들을 이간질하는 능력을 보여 왔다.
즉, 아직은 중국이 미국에 군사적으로 도전장을 내밀 처지가 못 된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미국·일본과 중국 사이에 전면전 가능성은 아직은 상당히 억제돼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일부 논평가들처럼 강대국 간의 대규모 충돌은 이제 과거지사라는 섣부른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장기적으로 볼 때, 미국 헤게모니 아래서 경쟁 제국주의 국가 간 지정학적·경제적 경쟁이 점차 치열해져 왔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일본과 중국의 지정학적 경쟁은 어느새 상당히 위험한 수준으로까지 발전해 버렸다.
진행형인 경제 위기는 이 모든 갈등을 한층 높은 단계로 밀어올려 버릴 수 있다. 경제 위기는 잉여가치를 둘러싼 자본 간 경쟁을 더 첨예하게 만들고, 이것이 국가 간 지정학적 경쟁을 격화시킬 공산이 큰 것이다.
우리는 제1차세계대전이 하나의 거대한 과정이 낳은 파국적 결론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보불전쟁 후 1914년 제1차세계대전 개전 전까지 서유럽은 44년 동안 주요 국가 간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를 누렸다(소위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 그런데 이 시기는 단지 평화롭기만 한 때가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축적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엄청난 군사력을 경쟁적으로 키우고 있었다.
지금의 동아시아도 장기적으로 제국주의 국가 간 갈등과 긴장이 축적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경쟁의 수준은 빈국이거나 한때 빈국이었던 “불량국가”를 열강이 응징해 자신의 힘을 과시하는 것을 넘어섰다. 경쟁 제국주의 국가와 공공연하게 대립하는 상태로 나아간 것이다.
동아시아 주요 열강은 경쟁적으로 군사력을 증대시키고 있다. 미국은 비록 경제 위기 때문에 군사비를 대폭 줄여야 할 처지이지만,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투입될 군사력만은 절대 줄이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최근 미국은 일본 요코스카 기지에 배치된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신형 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로 교체했고, 또 다른 항공모함 시어도어 로즈벨트호도 태평양으로 이동 배치했다. 그리고 싱가포르에 배치한 미국의 신형 연안전투함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남중국해 일대에서 순찰 활동을 시작했다.
일본도 해병대 구실을 할 수륙기동전단을 최대 3천 명 규모로 창설하기로 하는 등 군사력 증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원래 일본은 평화헌법에 따라 해병대 같은 공격 부대는 보유하면 안 되는데도 말이다.
이에 뒤질세라 중국도 꾸준히 군비를 늘려서, 중국의 국방예산은 어느새 영국·독일·프랑스의 국방예산을 합친 것을 능가할 정도로 커져 있다.
볼드모트
최근 동아시아 주요 국가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보면, 의례적인 외교적 췌사는 어디로 갔나 싶을 정도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영국에서 벌어진 “볼드모트 논쟁”일 것이다. 볼드모트는 《해리 포터》 시리즈 속에 악의 마법사를 말한다. 해리의 부모를 죽인 악당이자 해리의 숙적이다. 지난 1월 영국 주재 중국 대사와 일본 대사가 상대국을 “볼드모트”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하는 글들을 현지 신문 〈데일리 텔러그래프〉에서 주고받으며 유례 없는 지면 논쟁을 벌인 것이다. 그만큼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과 이에 맞대응하는 중국 사이에 적대감이 상당한 것이다.
미국·일본과 중국 사이에 갈등과 긴장이 커지면서, 동아시아에서 주요 강대국 간의 ‘파국’을 막아 왔던 기존의 합의나 질서도 흔들리고 있다. 그래서 1972년 중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댜오위다오(센카쿠) 영유권 문제에 대해 기존의 상태를 유지하기로 한 중국과 일본의 밀약은 2010년 이후 사실상 백지화된 상태다. 일본이 올해 ‘집단적 자위권’을 채택해 미국의 대중국 견제 파트너로서 더 많은 역할을 맡게 되고 더 나아가 평화헌법 개헌 논의를 본격화한다면, 이 지역은 더한층 불안정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따라서 동아시아에서 당장 제국주의 간 전면전이 터지지는 않겠지만, 앞으로 한동안 동아시아에서는 제국주의 열강 간의 긴장과 일시적 이완이 갈마들 가능성이 커 보인다. 그리고 이 와중에 소규모 우발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갈등 속에 한반도도 안심할 수 없다. 대중국 견제를 위한 미국의 대북 압박 때문에 한반도도 북한 핵·로켓 문제나 서해상의 우발적 충돌 등 온갖 변수가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좀 더 길게 봤을 때도 동아시아에서 제국주의 간 전면전이라는 비극을 피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으리라 장담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앞에는 매우 우울한 미래만 존재하는 것일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제1차세계대전은 노동계급의 혁명적 저항으로 종전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유럽의 동부전선 전쟁을 끝내 버렸고, 1918년 독일 혁명은 서부전선에서 포성을 멈추게 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는 노동계급이 거대한 규모로 존재하며, 경제 위기 속에서 남한에서는 노동계급이 투쟁의 잠재력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우리는 중국 노동계급의 저항을 주목해야 한다. 중국의 경기가 둔화하고 있는 가운데 노동계급의 파업과 저항은 꾸준히 성장하며 중국 노동자들은 의식과 조직을 키우고 있다.
이런 사태 전개는 중국 자본주의의 위기와 지배자들의 분열 등과 맞물려 엄청난 변화를 낳을 수도 있다. 최근 중화권 언론 보도를 보면, 중국 고위 관료들이 모인 베이다이허 회의에서 시진핑은 “중국이 당면한 내우외환의 상황이 1948년 국민당이 직면한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며 언제든 중국판 “재스민 혁명”이 일어날 수 있다고 걱정했다고 한다.
따라서 제국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필연적 산물임을 이해하는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경제 위기 속에서 노동 현장에서 시작되는 노동계급의 투쟁이 성장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동아시아에서 근본적 사회변혁의 가능성이 보일 때 이 가능성을 현실화할 수 있는 조직을 지금부터 건설해 나가야 한다.
추천 소책자
마르크스주의 관점으로 본 오늘의 동아시아 불안정과 한반도
김하영, 김영익, 이현주 지음 / 128쪽 / 4,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