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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에게 임금이란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자유라고들 한다. 온갖 것이 모두 돈으로 사고 파는 상품으로 거래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원하는 물건을 가지거나 서비스를 누리려면, 그것을 살 수 있는 돈이 있어야 한다. ‘부자 되세요!’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큰 덕담이 되는 이유다.

문제는 돈이 땅 파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라는 데에 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기적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는 누구나 무언가를 내다 팔아 돈을 벌어야 한다.

그런데 자본주의에는 생활수단도, 판매할 물건을 만들어 낼 생산수단도 소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것이 바로 노동자 계급이다. 노동력 말고는 팔 것이 없는 노동자들은 고용돼서 임금을 받지 않으면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다.(그래서 직업, 소득, 신분 따위로 계급을 구분하거나, 노동계급이 분할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에서나 논리에서나 근거가 없다.)

이런 노동자들을 기다리는 것은 자본가들이다. 그들은 노동자들과 달리 ‘상품’을 만들 수 있는 생산수단과 먹고 살 생활수단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공장과 원료를 구비해놓고 있어도 인구의 소수로서 물리적 신체 활동으로 기계를 돌리고 원료를 가공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사람을 따로 고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나 삼성전자의 대공장을 이건희나 정몽구의 가족들이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받는 돈이 바로 ‘임금’이다. 그래서 자본주의에서 임금노동자와 자본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이다. 그러나 이 상호의존적 거래(노동력과 임금의 교환)가 가능한 이유는 생산수단을 어느 한쪽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근본적 불평등이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또 다른 본질이다. 즉 임금노동―자본 관계는 의존적이면서도 적대적이다. 그래서 모순적이다.

생산관계를 둘러싼 불평등과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모순은 다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우선, 임금노동자와 자본가의 고용계약은 매우 새로운 불평등을 낳는다. 첫째, 자본가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넘겨 받게 된다. 둘째, 노동자의 생산물은 모두 고용주 자본가에게 귀속된다. 이 둘은 임금노동 착취를 위한 조건이 된다.

그러나 적대적이면서도 상호의존적이라는 모순 때문에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에서 이전 시대의 피착취자들이 갖지 못한 힘을 갖는다. 바로 파업의 힘이다. 노동자들은 노동력 제공을 거부함으로써 자본가들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 당연하게도 파업의 규모와 결집력이 크고 강할수록 그 힘은 강력해진다. 자본가들이 온갖 방법으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려 하는 이유다.

한편, 생계를 위해 노동력을 파는 노동자에게 노동의 목적은 임금이다. 그것으로만 삶을 꾸릴 생활수단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에게 임금은 정말 ‘임금님’ 같은 것이다.

노동자에게 노동시간은 임금을 위해 고용주의 ‘독재’ 아래서 개성과 활력을 희생하는 순간이다. 그럼에도 고용이 돼야만 임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고용’과 ‘임금’은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그래서 노동계급에게는 성별, 인종, 종교, 사상, 성적취향보다 ‘계급’ 정체성이 근본적이다. 아울러 이상의 논의에서 특수고용노동자들의 노동자성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임금노동을 구매한 목적은 노동력 그 자체가 아니다. 자본가들에게는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을 정해진 시간 내에 최대한 굴려서 이윤을 최대한 뽑아내는 것이 목적이다. 그래야 그는 다른 자본가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을 살펴 보자. 임금노동의 계약과 실제 노동력 지출은 동시적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노동자는 불평등하기 그지없는 임금노동 계약을 먼저 맺고 나중에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자본가들은 자신이 통제권을 확보한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임금몫보다 더 많은 일을 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야 한다. 이제 새로운 생산물은 그 가치대로만 팔려도 ‘이윤’을 남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노동자의 임금으로)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바로 새로운 가치, 즉 이윤이다. 임금노동이 이윤의 원천인 것이다.

이는 노동자들이 애초에 임금과 교환한 노동시간이 임금몫을 뽑아내는 노동시간(임금)과 지불되지 않은 잉여노동시간(잉여가치)으로 구분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 둘의 비율이 바로 칼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율이다. 착취가 없으면 이윤도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괴팍한 사장의 채찍질만이 아니라 정상적인 임금노동―자본 관계가 모두 착취 관계인 것이다. 이 ‘비밀’이 칼 마르크스가 생산과정을 일러 자본가들이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고 이름 붙인 공간이라 부른 이유다.

이것은 임금, 노동시간, 노동강도를 둘러싼 임금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갈등이 화해할 수 없는 적대 관계라는 것을 보여 준다. 총노동시간 안에서 노동자의 임금과 이윤은 서로 반비례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업과정에서 노동생산성을 높이려는 시도는 총노동시간 가운데 잉여노동 시간의 비중(착취율)을 늘리려는 시도다. 따라서 노동부가 매뉴얼에서 연공급제가 생산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난한 것은 수익성 위기에 직면해 착취율을 올리고 싶은 기업주들을 대변한 것이다.

이처럼 임금노동자를 고용해 그 잉여노동을 착취해 끊임없이 자기증식(생산의 확대)을 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들’ 간의 경쟁적 축적을 향한 압력 때문에 자본‘들’은 착취 과정에서 무자비할 수밖에 없다.

한편, 자본가가 다른 자본가들에게 지불하는 지대, 이자, 세금 등이 모두 이 잉여가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다수의 자본가에게 집합적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착취 과정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단결한다. 물론 착취 몫을 놓고는 서로 분열해 다투지만 말이다. 착취가 개별적 관계가 아니라 집단적 관계인 이유다. 이 집단적 적대 관계가 바로 ‘계급’인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도 집단적으로 이런 적대적 관계에 대처해야 한다. 고용과 임금을 지키려는 노동자들은 임금노동―자본 관계의 불평등성을 최소한이라도 만회할 수단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그것이다. 노동자들이 불평등한 조건에서도 파업으로 자본가들을 위협할 수 있는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노동조합은 대개 이런 단결의 기초를 놓는 수단이 된다. 노동조합이 노동자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수적인 수단인 이유다.

지금까지의 논의에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는 말은 틀렸다. 이미 해 버린 노동은 판매할 수 없다. 노동을 판매하려면, 오직 그 결과물인 생산품만을 팔 수 있는데, 임금노동자를 고용할 때 모든 생산물이 자본가에게 귀속된다는 것은 이미 전제된 것이다. 따라서 임금이 노동의 대가라면 자본가는 자기 소유물을 산다는 말이 된다. 애초에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임금이 노동의 대가가 되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고용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새로운 가치(이윤)가 모두 노동자들에게 귀속돼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무노동무임금 논리의 허점이 드러난다. 실제로는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이므로 파업과 관계없이 자본가들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본가들은 생산물에 대한 통제권을 내놓고 생산 현장에서 퇴장해야 할 것이다.

임금이 노동력의 대가라는 것은 자본가들의 회계 장부를 봐도 알 수 있는데, 그들에게 임금(인건비) 자체는 투자 비용에 속한다. 임금은 생산의 결과에 대한 배분(노동의 대가)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노동자 파업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때의 명목도 ‘투자 대비 손실’이다.

지난해 현대차는 노동자들 수천 명이 4~5월 주말특근을 거부해 손실이 1조 6천억 원 났다고 발표했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 3만 명의 ‘1년치 임금’보다 많은 액수다. 이처럼 노동의 결과물은 (감가상각비와 제반 비용을 빼고도) 노동자들의 임금보다 훨씬 더 크다. 이것이 착취의 간접증거다.

파업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액이 큰 이유는 뒤집어 말해 그만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잉여노동의 양)이 크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생산에 차질을 주는, 그래서 이윤에 타격을 입히는 파업을 자본가들이 얼마나 두려워하는가(혐오하는가)를 보여 주는 사례다. 이런 예들은 노동자들의 진정한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매우 역설적 방식으로 우리에게 일러 준다.

한편, 총잉여가치 안에서 노동과 자본의 몫은 언제나 서로 대립적이라는 것은, 첫째 자본주의가 상시적인 계급투쟁의 체제라는 뜻이다. 임금노동―자본 관계에 바탕한 생산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보편적이면서 핵심이므로 계급투쟁은 자본주의의 본질적 현상이다. 사회는 분열해 있다. 계급분단선은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국민 통합’은 자본주의에서 불가능하다. 둘째 임금 인상이 자동으로 가격 인상(물가인상)을 낳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인상이 무용하다는 노동운동 일부의 주장은 근거 없다.

셋째 임금 수준에는 단순히 경제상황이나 생산성의 결과만이 아니라 (노동력의 가치가 기준이 되겠지만) 계급세력균형과 연관된 문화·역사적 요인들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즉, 임노동과 자본의 힘 대결에 의해서 임금의 평균 수준을 올릴 수 있다는 뜻이다. 임금 인상은 생산성 협력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강화할 때 이룰 수 있다. 노동조합과 함께 이런 단결투쟁을 강화할 독립적 노동계급의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노동과 자본의 몫이 반비례 관계일지라도 총이윤이 늘어날 때는 두 몫의 절대적 규모도 함께 늘어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경제 호황기에 노사 타협주의와 개혁주의가 자라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경제불황기에는 이런 타협이 안정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지금 박근혜가 전반적인 임금 수준을 공격하려는 이유이자, 기존 체제 안에서 상호 타협을 목표로 하는 노동운동의 개혁주의가 위기를 겪는 이유다. 오직 근본적 사회변혁의 정치만이 이런 적대적 모순을 직시하며 일관된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다. 개혁주의는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 대중 다수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변혁 정치는 노동계급의 일상적 투쟁 속에서 조직으로 건설돼야 한다.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생산단위들 규모가 커졌으므로 소유의 분산이 아니라 생산수단들의 대규모 사회적 소유가 가능할 뿐이다. 이 사회적 소유가 민주적으로 통제된다면,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종속되는 임금노동을 더는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