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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트21〉 판매자 손해배상 소송 상고 이유서:
우리에게는 쟁취해야 할 미래가 있습니다

 2010년 5월 강남역에서 〈레프트21〉(본지의 옛 제호)을 판매하던 판매자 6인이 연행되고 ‘미신고 집회’ 혐의로 8백만 원 벌금형을 받은 바 있다. 이에 6인은 ‘〈레프트21〉 판매자 벌금형 철회와 언론 자유 수호 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를 구성하고 정식재판을 청구해 법정 투쟁을 벌여 왔다.
지난 1월 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대책위가 청구한 손해배상 항소심을 기각했다(제6민사부 판사 이은신ㆍ박지은ㆍ이현석). 법원은 신문 판매도 집회라 하며 경찰의 부당한 연행을 정당화했다.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대책위는 이 같은 법원 판결을 규탄하며 대법원에 상고했고, 본지에 상고 이유서를 보내 왔다. 아래 상고이유서 전문을 싣는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벌써 5년 전입니다. 2010년 5월 7일 저를 비롯한 〈레프트21〉(현 〈노동자 연대〉) 판매자 6명은 강남역에서 공개 판매를 하다가 느닷없이 경찰에게 강제 연행됐습니다.

2009년 창간한 격주간 〈레프트21〉은 ‘신문 등 진흥에 관한 법률’(이하 신문법)에 따라 서울특별시장에 등록한 신문(등록번호 서울특별시 다08179)입니다. 저희는 〈레프트21〉이 더 널리 읽히길 바라며 강남역, 혜화역 등 서울 주요 도심에서 정기적으로 거리 판매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이 같은 〈레프트21〉 판매 행위를 완전히 무시하고 ‘미신고 집회’를 했다며 총 8백만 원의 벌금형을 주장했습니다. 결국 형사 재판부는 저희가 집회를 했다는 검찰의 주장을 받아들였습니다. 재판부가 비록 저희 6명 중 5명에게는 무죄를 선고했지만, 저희는 신문 판매를 할 때마다 집회 신고를 하게 됐습니다. 게다가 나머지 1명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저희는 막대한 정신적 물질적 피해를 입었고, 지금도 피해는 이어지고 있습니다.

때문에 저희는 법무부장관 즉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손해배상 소송을 다룬 민사 재판 1심과 항소심 모두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다시 대법원에 상고를 합니다. 이 상고는 국가가 피해보상을 하라는 호소임과 동시에 이 사건의 진정한 정치적 의미를 밝히려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여기 상고 이유서를 통해 그것을 밝히고자 합니다.

진정한 언론의 자유를 묻습니다

민사 항소심 재판부(서울중앙지방법원 제6민사부)는 〈레프트21〉 거리 판매가 “외형상 신문 판매 행위”를 띄고 있지만, “신문의 내용에 대한 자신들의 정치적인 공동의견을 형성하여 이를 대외적으로 표출·전달하기 위한 목적 아래 다수인이 일시적으로 일정한 장소에 모인 것”이라며 “집회”라고 규정했습니다. 따라서 〈레프트21〉 거리 판매자 처벌이 정당했다는 것입니다.

재판부는 검찰과 경찰이 내놓은 주장과 증거를 근거로 이런 판단을 했습니다. 검찰과 경찰이 내놓은 세세한 문제들에 대한 판단에 앞서 근본적으로 이 쟁점을 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거 군부 독재 정부는 민주주의를 억압했습니다. 당시 언론 통제는 민주주의 억압을 위한 중요한 수단이었습니다. 전두환 정부의 보도지침은 지금도 악명이 높습니다.

오늘날 그런 군부 독재식의 폭압적인 언론 통제가 이뤄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적어도 그 시절보다는 훨씬 더 자유롭게 사람들이 듣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공개적인 신문 판매를 집회로 규정해 처벌할 수 있다는, 정말이지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 사건은 민주주의 문제를 단순히 과거지사로 치부할 수 없게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가장 중요한 기본권일 것입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하는데 제약이 있다면 어찌 민주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 민주주의는 1987년 대항쟁의 성과물입니다. 그래서 1987년 개정된 헌법은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가진다”고 규정했습니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헌법에서 구체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가 단지 표현할 자유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표현의 자유에는 견해를 알리고 지지자를 모을 수 있는 권리도 포함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의 경우에는 더욱 명확합니다. 언론 자체가 특정한 세계관, 특정 쟁점에 대한 견해 등을 타인에게 알리기 위한 체계적인 실천입니다. 그러므로 독자가 기사를 읽는 단계까지 보장되어야 진정 언론의 자유가 구현된다고 할 것입니다.

〈레프트21〉은 노동자들과 억압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진실을 말하겠다는 창간 취지에 따라 일체의 기업 광고와 정부 후원 없이 독자의 구독료와 후원금으로만 발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다른 신문들처럼 지국이나 편의점 등 고액이 드는 거대 유통망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주로 판매자들이 직장이나 대학 그리고 거리 등에서 직접 판매해 신문을 알리고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영세함에서만 비롯한 방식은 아닙니다. 〈레프트21〉은 주장을 독자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독자들의 견해도 경청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런 소통을 통해 독자들의 목소리를 신문에 반영하고 올바른 주장을 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 언론의 기능을 제대로 구현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고무돼야 마땅합니다.

따라서 〈레프트21〉 거리 판매 방식을 문제 삼아 처벌하려는 검찰과 경찰의 시도는 표현과 언론의 자유라는 민주주의의 기본권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입니다. 또 모든 언론사가 동등하게 기본권을 보장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레프트21〉만 차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문 판매를 집회라고 규정한 형사 재판부와 헌법재판소 그리고 항소심까지의 민사 재판부는 이런 민주주의 기본권 침해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표현의 수단

이제 검찰과 경찰이 제시하는 주장과 증거들을 살펴 봐야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그것을 일일이 하나하나 해명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큰 그림 속에서 살펴 봐야 맥락을 이해하고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민사 재판부는 검찰과 경찰이 제시하는 것을 근거로 저희가 집회를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몸피켓”과 “피켓”, 저희가 연행 당일 “구호를 수회 제창하고 … ‘레프트21’ 발행 명의의 신문 형식의 유인물들을” 나눠 주었다는 검찰의 주장입니다.

일단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아야겠습니다. 저희가 당일 몸피켓과 피켓을 이용해 〈레프트21〉의 기사 내용을 표현한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다 같이 외친다’는 뜻의 제창과 〈레프트21〉 발행 명의의 유인물을 나눠 주는 행위는 한 적이 없습니다. 저희는 〈레프트21〉 제호의 유료 신문을 나눠준 것이 아니라 판매했으며, 핵심 기사 내용을 추려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소개했습니다. 저희로서는 이렇게 사실관계를 왜곡하면서까지 저희가 통상적인 집회 형식을 진행했다고 몰아가려는 검찰의 의도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검찰과 경찰이 제시한 수단과 행위는 판매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몸피켓이나 피켓은 주요 기사를 알리거나 신문 구입을 호소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희가 외친 내용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것이 처벌 대상이라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일보〉 광고 전광판이나 몸피켓, 피켓, 구호 등을 이용한 온갖 판촉 행사는 어찌 봐야 하는 것입니까? 이런 것들은 놔두면서 〈레프트21〉만 문제 삼는 것은 이중잣대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 번 양보해 검찰 말대로 저희가 유인물을 나눠주고 구호를 제창했다고 해도 그것이 저희를 처벌할 근거가 되어야 하는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검찰이 말하는 몸피켓, 피켓, 구호 제창, 유인물은 모두 견해를 알리기 위한 것으로 표현의 자유로 보장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입니다.

헌법재판소는 1993년 “언론·출판의 자유의 내용 중 의사표현·전파의 자유에 있어서 의사표현 또는 전파의 매개체는 어떠한 형태이건 가능하며 그 제한이 없다”고 결정한 바 있습니다. 또 1996년에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사상과 전파의 자유를 포함할 뿐 아니라 전파할 매개체를 선택할 자유도 포함한다고 인정했던 것입니다.

1991년 서울지법은 노동조합의 유인물 배포도 언론의 자유로 보호되어야 한다고 판결한 바 있습니다. 검찰이 말하는 ‘유인물 건네 주기’ 행위도 처벌의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하물며 〈레프트21〉은 정기간행물로 등록한 유료 신문입니다. 따라서 〈레프트21〉은 판매와 배포를 국가에 의해 방해 받지 않을 권리가 있습니다.

이렇듯 검찰과 경찰이 ‘증거’라고 내세우는 것들은 민주주의의 기본권으로 보장받아야 할 표현 수단들이지 처벌의 근거가 아닙니다. 혹자는 ‘그런 것들이 다 집회에서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현행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시위를 “여러 사람이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도로, 광장, 공원 등 일반인이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는 장소를 행진하거나 위력 또는 기세를 보여, 불특정한 여러 사람의 의견에 영향을 주거나 제압을 가하는 행위”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레프트21〉 판매를 하면서 비슷한 수단을 일부 사용했지만 행위 형태와 목적이 집회와는 완전히 달랐던 것입니다. 비슷한 수단을 사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통상적인 집회로 보고 처벌하는 것은 과도한 법 적용이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키는 일입니다.

사법부에게 묻습니다

나아가 민사 재판부는 사건 당일 경찰이 저희를 ‘추격’해 한 시간 넘게 강남역 한 복판에서 분명한 이유를 대지 못한 채 감금하고 강제 연행한 것이 정당했다고 인정했습니다.

“[경찰이]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 범죄를 실행 중이거나 실행 직후인 자는 현행 범인으로, 누구임을 물음에 대하여 도망하려 하는 자는 준현행범인으로 각 체포할 수 있[다.] … 필요한 경우에는 대상자를 추적할 수도 있다.”

저는 이 판결문을 보며 참으로 참담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신문 판매를 “범죄”로 보는 ‘합리적 판단’이란 도대체 어떤 점에서 ‘합리적’입니까? 순식간에 신문 판매자를 “현행범” 혹은 “준현행범”으로 몰아 “추적”하고 “체포”할 수 있는 경찰의 ‘판단력’은 절대적인가요?

또한 민사 재판부는 경찰의 증언을 전적으로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재판부에게 묻고 싶습니다. 왜 사건 당일 연행에 앞장 섰던 이종순 경위가 저희에게 했던 “한국에는 국가보안법이 있다. 사상 검증을 해야 한다”는 협박을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깁니까? 왜 검찰과 경찰의 말은 죄다 믿으면서 저희가 제시한 증언과 증거들은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전부 외면만 합니까?

이런 질문들을 떠올리면서 저는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법부는 과연 ‘공정’한가?

검찰과 경찰은 평범한 사람들을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이 있고 법정에 세우고 처벌을 받도록 만들어 사람들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진정한 권력 기관이라 할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저희가 갖고 있는 힘이라고 해봐야 무엇이 있겠습니까? 물론 저희에게는 진보에 대한 신념, 그리고 그 신념을 이루기 위한 실천이라는 원동력과 사회적 지지와 연대라는 검찰과 경찰이 결코 가질 수 없는 ‘힘’이 있기는 합니다.

이런 저희가 5년을 끈질기게 검찰과 경찰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정말 사법부가 독립적인 기구로서 이 사건을 파악한다면 검찰과 경찰의 말만 들을 것이 아니라 이 힘 없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끈질기게 싸우고 있는지, 진실은 무엇인지 들여다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사법부가 저희에게 보여준 모습은 국가 권력 기구의 하나로서 검찰과 경찰의 한편에 섰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모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며 특별히 저희에게만 일어난 일도 아닙니다. 얼마 전 법원은 국가기관 대선 개입 수사 은폐를 지시한 전 경찰청장 김용판에게는 증거가 넘쳐나는데도 무죄를 선고하더니만 이석기 의원 등 마녀사냥의 희생자들에게는 부실하기 짝이 없는 증거만 갖고도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여기서도 공정성을 말하는 사법부가 실제로는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지 볼 수 있습니다.

검찰과 경찰이 〈레프트21〉 신문 판매를 처벌하려 했고 사법부가 정당성을 부여한 상황, 그렇다면 저는 더 나아간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습니다. 국가는 왜 〈레프트21〉 판매를 처벌하려 했는가?

언론 통제

지금까지의 재판부가 전적으로 받아 들인 검찰의 공소사실은 〈레프트21〉 판매 행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습니다.

“피고인들은 관할 경찰서장에게 신고서를 제출하지 아니한 채 … “MB정부는 전교조, 공무원 탄압을 중단하라”는 내용이 기재된 속칭 ‘몸피켓’을 착용한 상태로 위 탁자 주위에 서서 “이명박 호전적 세력의 장사포가 우리를 겨누고 있다. 안보위기는 사기다”, “안보위기는 사기다. 이명박 정부는 군비증강이 아니라 복지를 늘려라”, “IMF 긴축에 맞선 그리스 반란, 한국에서도 저항이 필요하다”라고 기재된 피켓 3개를 든 채, “천안함 사건이 터졌는데 이는 이명박 정부가 안보위기를 조장하는 것이다. 그리스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경제문제가 심각하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가 더욱 나빠졌고 일자리도 부족하다”라는 내용의 구호를 수회 제창하고, “안보 위기는 사기다”라는 제목의 ‘레프트21’ 발행 명의의 신문 형식의 유인물들을 그 곳을 통행하는 사람들에게 건네주었다.”

공소사실 내용의 대부분이 그 날 저희가 판매를 하면서 표현했던 주장들입니다. 당시 〈레프트21〉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논평과 함께 이명박 정부가 펼치고 있던 반노동자 정책을 비판했고 그리스에서 벌어지던 긴축에 맞선 노동자 운동을 소개했습니다.

신문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신문 판매점에서 1면에 강조하고자 하는 기사나 주장이 실린 신문들을 보게 됩니다. 거기에는 정부를 옹호하는 주장이 실리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정부 비판이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다른 언론들이 판매대에서 자신들의 주장이 드러나 있는 신문을 진열하는 것과 〈레프트21〉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드러내면서 판매한 것 사이에서 어떤 근본적인 차이가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도 검찰이 이처럼 공소사실에 〈레프트21〉의 주장 내용을 나열한 것은 어떤 의도가 읽혀집니다. 그것은 사실상 〈레프트21〉의 주장 내용을 문제 삼은 것입니다.

물론 공소사실에서는 딱 부러지게 주장 내용이 문제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추측하건대 검찰은 어느 정도 민주적 권리가 인정되기 시작한 한국의 현실에서 노골적으로 진보적 주장을 문제 삼아 신문 판매를 공격하기는 쉽지 않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이명박 정부가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법 위반이라며 무상급식 서명운동을 가로 막은 것을 봐도 이런 ‘꼼수 부리기’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이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진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미신고 집회는 명분일 뿐 실제로는 〈레프트21〉의 주장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그런 주장이 널리 퍼지는 것을 막으려 한 것입니다. 검찰이 제시한 〈레프트21〉의 주장들만 봐도 당시 이명박 정부가 추진하던 일들을 정면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더구나 그리스 노동자 운동을 소개해 국내 노동자들에게 힘을 주는 기사도 특별히 언급할 정도로 거슬렸을 것입니다. 실제로 형사 재판정에서 검사는 〈레프트21〉의 내용을 인용하며 ‘이런 주장을 하는데도 판매라고 볼 수 있느냐’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미신고 집회라는 규정이 단지 ‘명분’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레프트21〉 거리 판매를 통제하겠다는 ‘실리’도 노린 것입니다.

〈레프트21〉 거리 판매를 집회라고 규정하면 저희는 매번 거리 판매를 할 때마다 경찰에게 신고를 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사건 이후 〈레프트21〉 측은 불가피하게 매번 집회 신고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습니다. 신고하지 않으면 또 다시 처벌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큰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헌법재판소에서 저희 사건을 다룬 절반에 가까운 재판관들(9명 중 4명)도 우려를 했습니다.

“[집회 신고 의무 이행을] 형사처벌을 통하여 해결하려는 것은 법치국가원리에 반하는 행정편의적 발상으로서 그 헌법적 정당성이 인정될 수 없다. 법치국가원리는 … 불필요하거나 과도한 형벌의 위협으로부터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전신고’를 예외 없이 관철시키기 위하여 형벌의 제재로 신고의무의 이행을 강제하는 것은 … 신고제도의 본래적 취지에 반하여 허가제에 준하는 운용을 가능하게 한다.”

안타깝게도 이런 우려는 현실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집회 신고제가 사실상 허가제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경찰이 온갖 이유로 집회를 ‘불허’했다는 뉴스를 계속 접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경찰이 자의적인 판단으로 얼마든지 〈레프트21〉 거리 판매를 ‘불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찰은 〈레프트21〉 판매가 ‘적절’한지 ‘판단’할 것이고 그 때 〈레프트21〉의 ‘내용’도 ‘심사’할 것입니다.

그야말로 신종 언론 검열이자 언론 통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우가 아닙니다. 2010년 11월 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서초경찰서는 강남역 〈레프트21〉 판매를 위해 냈던 집회 신고를 ‘불허’했습니다. 서초경찰서는 ‘G20 정상회의 경호안전을 위한 특별법’을 이유로 댔지만, 신문 판매가 경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설명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경찰은 정상회의 장소에서 가까운 강남역에서 〈레프트21〉이 판매되는 상황이 달갑지 않았을 것입니다. 〈레프트21〉이 G20 정상회의가 경제 위기의 고통을 평범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전가하는 회의라고 비판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언론 검열이자 언론 통제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검열은 서구에서 인쇄술의 등장과 함께 비판의 목소리가 공공연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고안됐습니다. 비판할 자유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조차 힘듭니다. 검열의 기원 자체가 민주주의와 대립되는 것입니다. 역사를 돌아 봤을 때 독재 정부들이 각종 검열 제도를 이용한 사례는 부지기수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한국의 헌법은 검열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은 인정되지 아니한다.”

그러나 국가 스스로 헌법이 정한 민주주의적 규칙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우리의 희망

최근 몇 개월 사이에 형사 대법원부터 민사 항소심과 헌법재판소까지 줄줄이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들은 하나 같이 〈레프트21〉 거리 판매를 집회로 보고 처벌이 정당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왜 최근에 연이어 이런 판결들이 나왔을까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단순히 사법부의 행정 절차상 우연의 일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사법부가 단순할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이 사건에 대한 판결들만 봐도 사법부가 단순히 정치가 배제된 행정기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최근의 정치 상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판결들이 나온 지난해 말부터 올해 초까지의 상황을 한 마디로 다 정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두드러진 특징 한 가지는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노동자 운동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입니다.

지난해 겨울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것은 단연 철도노동자들의 파업이었습니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한 철도 파업은 전 국민적 지지를 받았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민주노총을 침탈하는 무리수를 뒀지만 오히려 민주노총의 사회적 인지도는 급상승했습니다. 그리고 철도 파업은 다른 노동자들의 자신감에도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무노조 신화를 깨고 일어난 삼성전자서비스노동자들이 최초로 전국적 파업을 벌이며 새해를 연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사장들에게는 각종 혜택을 주는 반면, 노동자들에게는 복지 먹튀, 각종 민영화, 통상임금 공격, 시간제 일자리 확대 같은 고통 전가 정책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노동자 운동의 전진은 희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레프트21〉은 이런 상황이 더욱 발전해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이 진정한 대안을 쟁취하길 바랍니다. 〈레프트21〉이 정부와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노동자 운동의 연대와 단결 그리고 승리를 위한 주장을 지속적으로 내고 있는 이유입니다.

박근혜 정부와 사법부는 노동자 운동의 분위기가 점점 살아나는 국면에서 〈레프트21〉과 같은 신문이 위축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더 많은 노동자와 청년·학생들에게 〈레프트21〉이 전달되고 읽히는 상황을 막고자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판결 때문에 위축되어 판매를 소홀히 할 수는 없습니다. 〈레프트21〉 판매에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중요한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레프트21〉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분이라면 이렇게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소규모 진보 언론이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그러느냐?’ 맞습니다. 〈레프트21〉은 거대 언론들에 비하면 독자 수가 적고 인지도도 낮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그런 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가치가 〈레프트21〉에게 있습니다.

〈레프트21〉은 여느 신문들과 달리 가식적 중립을 거부하고 편향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 편향이란 바로 노동자와 억압받는 사람들의 편에 일관되게 서 있는 것입니다. 또 〈레프트21〉은 매우 실천적입니다. 단지 세상을 논평만 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에게 실천적 과제를 제시하고 함께 하자고 호소합니다.

그래서 평소 〈레프트21〉의 독자는 소수일 수밖에 없습니다. 〈레프트21〉의 급진적 주장과 실천적 제시가 많은 사람들에게 썩 동의가 안 되거나 심지어 불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늘 소수의 〈레프트21〉 애독자들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 독자들은 대체로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 보며 더 나은 세계를 위한 실천을 하고 있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입니다.

〈레프트21〉 판매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모으는 과정입니다. 〈레프트21〉은 그런 사람들에게 세계의 진실을 알려주고 대안과 실천 방향을 제시합니다. 또 〈레프트21〉은 현실의 뜨거운 쟁점을 다각도로 다뤄 투쟁하는 노동자와 실천가들이 부딪히는 문제들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방적이지 않습니다. 독자들은 〈레프트21〉에 자신들의 경험을 기고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레프트21〉을 통해 지역과 부문의 장벽을 뛰어 넘어 서로 배울 수 있습니다. 또 〈레프트21〉에서 특정 쟁점을 가지고 토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꾸준히 지속되면 〈레프트21〉은 독자들과 정치적이고 실천적인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레프트21〉을 매개로 한 독자들 사이의 네트워크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레프트21〉은 그런 네트워크를 통한 운동의 전진을 이루고자 합니다. 운동의 전진이야말로 평소 온갖 보수적 압력과 현실에 둘러 싸여 고통 받는 노동자들에게 경쟁보다 연대와 단결을 더 중요한 가치로 받아 들이게 하고, 자신의 처지를 좀 더 나은 처지로 바꾸고 나아가 세계 자체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상상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집단적 실천으로만 변화를 쟁취할 수 있는 노동자들에게는 그런 자신감의 변화가 실천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노동조합이나 각종 노동자 정당 등과 같은 조직 건설도 그런 실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그런 자신감과 실천이 극도로 발전했을 때 노동자들이 불의한 세계가 아니라 진정 정의로운 세계를 건설할 잠재력이 있음을 거듭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레프트21〉 판매 목적은 수익을 중심에 두는 기성 언론과 판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지금 사법부가 그토록 제한하려는 자유 민주주의의 제한적 권리보다 더욱 원대한 희망에서 출발합니다. 노동자들이 스스로 일어나 쟁취할 진정한 자유, 노동자 민주주의라고 불리며 인류가 잠시 도달한 적이 있는, 바로 그것이 우리가 〈레프트21〉 판매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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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읽는 〈노동자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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