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베네수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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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의 자신만만한 좌파 지도자 우고 차베스는 이번 달에 가장 큰 시험대에 서게 될 것이다.
마이크 곤살레스가 차베스의 등장 과정을 추적하고 그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을 살펴본다.
8 월 15일에 베네수엘라인들은 우고 차베스 정부에 대한 국민투표[레퍼렌덤]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평범한 국민투표가 아니다. 지금 베네수엘라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그리고 차베스 지지자들과 반대자들 사이의 분열은 단순한 정치적 견해 차이를 훨씬 능가하는 것이다.
양측의 면면과 배경을 보면 그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베네수엘라 수도인 카라카스의 우아한 교외 지역에서는 차베스의 이름을 입밖에 꺼내기만 해도 분노의 대상이 되거나 주먹다짐을 당할 지경이다.
그러나 도시 변두리의 가난한 노동계급 판자촌에서는 정부를 지지하는 목소리가 높고 거의 보편적이다.
이번 국민투표는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지배 계급들 사이에 계속된 대결의 최근 국면이다. 그 대결은 2000년 차베스의 재선을 계기로 시작됐고 2001년에 일련의 도전들을 거치며 이어지다가 2002년 중반에 차베스를 전복하기 위한 쿠데타 기도에서 절정에 달했다.
지난해 고용주들은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또 다른 기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 때 이후 차베스 반대 세력들은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 실시에 필요한 2백50만 명의 서명을 모았다.
그들이 패배하고 차베스가 다시 안정을 확보하더라도 정부 전복 노력이 계속될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노력들이 아무리 심각하고 파괴적인 위기를 조장하더라도 말이다. 판돈이 아주 크기 때문이다.
세계 석유의 약 13퍼센트가 베네수엘라에서 생산된다. 1930년대까지 베네수엘라 석유는 대부분 두 미국 기업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1950년대 말부터 석유 생산은 극적으로 증가했다. 1958년부터 1994년까지 석유를 생산·수출해 벌어들인 소득이 3천억 달러나 됐다. 그러나 그 많은 돈은 결코 베네수엘라 국민 다수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1976년에 석유는 국유화됐고 베네수엘라 국영석유회사(PDVSA)가 이를 통제했다. 그러나 이제 베네수엘라의 주요 자원을 소유하게 된 국가는 극소수의 이익을 위해 운영됐다.
1970년대와 1980년대에 베네수엘라는 부패와 정실주의의 상징이 됐다. 두 정당(민주행동당과 기독교민주당)이 권력과 이윤을 나눠가졌다.
그리고 이득을 본 것은 기업주들, 금융가들, 언론재벌들만이 아니었다. 중간 계급들과 전문직 종사자들도 석유 자금으로 매수됐으며, 석유업계의 노동자들도 고임금과 각종 혜택을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아주 소수였다.
일자리를 찾아 카라카스로 몰려든 수많은 사람들은 수도 주변 진흙투성이 언덕배기의 판자촌 말고 달리 구할 것이 없었다.
위로부터의 개혁
거기서 그들은 도심에 새로 들어선 고층 건물들과 현대식 아파트촌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석유 호황에 최대한 접근한 곳이 바로 거기까지였다. 1980년대 중반에 베네수엘라 인구의 약 36퍼센트가 극빈층이었다.
1989년에 대통령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그가 “대전환”이라고 부른 조처들을 도입했다. 그것은 시장 지향적 전환이었고 국제통화기금(IMF)이 요구한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도입한다는 결정이었다. 그것은 베네수엘라 노동자 대다수의 생활수준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페레스의 결정에 반발하는 시위와 폭동이 여러 날 계속됐고, 이는 나중에 “카라카소”―카라카스 반란―라고 불리게 됐다. 빈민과 실업자들이 도심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페레스는 군대를 동원해 대응했고 수백 명, 어쩌면 1천 명 이상이 총에 맞아 죽었다.
3년 뒤 우고 차베스가 베네수엘라 정치의 전면에 등장했다. 1992년 2월에 그는 반정부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차베스는 새로운 종류의 군 장교와 민족주의자를 대표했고 경제 발전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차베스가 주로 영향을 받은 사상은 강력한 사회 변혁 의지를 가진 진보적 군인 집단이 위로부터 경제·사회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92년의 베네수엘라 상황에서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정부는 부패했고(페레스는 1년 뒤 탄핵당했다) 억압적이었다. 대중은 주기적으로 거리로 쏟아져 나와 변화를 요구했다.
그러나 조직된 좌파는 대중의 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듯했다. 1992년에 그들은 차베스를 지지하는 어떤 의미 있는 대중도 동원하지 못했다.
차베스는 신속하게 패배당했고 투옥됐다. 베네수엘라는 급속히 위기로 빠져들었다. 비참하게 생활하는 빈곤층이 인구의 36퍼센트에서 66퍼센트로, 갑절로 늘었다.
베네수엘라의 부(富)를 지배한 자들은 국유화됐다는 석유기업의 중역들이었는데, 그들의 행동은 다른 다국적기업의 중역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석유를 판매해 벌어들인 돈을 역외 회사로 빼돌리고 외국 기업들과 거래하고 석유 산업의 일부를 매각하는 방식 등을 통해 자신들의 배를 채웠다.
그들은 또, 자신들의 부패에 공범으로 연루된 국가로부터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심지어 석유노조 지도자들조차 외국 은행에 계좌를 갖고 거액의 봉급을 받는 등 똑같은 부패 집단의 일부였다.
한편, 베네수엘라의 언론 매체는 엄청나게 부유한 네 사람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그들도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해 있었다.
자연히 대중의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조율되거나 조직되지 않았다. 대중의 분노가 폭발할 때마다 탄압이 뒤따랐다. 우고 차베스는 그런 정치적 공백을 비집고 들어가 그가 “볼리바르주의” 철학이라고 부른 것을 운동에 제공했다.
19세기의 라틴아메리카 해방 투사 시몬 볼리바르의 이름을 딴 그 이데올로기는 민족주의적이고 포퓰리즘적이었으며 다수의 빈곤을 대가로 부를 축적한 소수 엘리트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경제적 사보타주
1994년에 차베스는 석방됐다. 그가 마침내 1998년 선거를 통해 집권했을 때 도시 주변의 쓰러질 듯한 “오두막집들”에서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차베스는 남부럽잖은 교육, 사회 개혁, 석유 산업에 대한 통제, 토지 없는 사람들에 대한 토지 재분배를 약속했다.
2000년에 차베스는 재선출됐다. 그 전 해에 통과된 차베스의 새 헌법은 차베스와 국가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시켰기 때문에 자본가 계급의 증오를 샀다.
차베스가 재선출되자마자 차베스 정권을 무너뜨리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주요 투자가들은 투자를 회수했다. 언론은 공황과 위기 분위기를 조장하기 시작했다.
국영 석유회사 중역들은 석유노조의 부패한 지도자들과 결탁해 베네수엘라 경제를 사보타주할 준비를 했다.
그것은 모두 2001년 12월 “기업주 파업”을 위한 준비였다. 고용주들은 가정용 가스 공급을 차단했고, 석유 생산을 사실상 중단했다.
몇 주가 지나자 긴장은 더 고조됐다. 그러나 차베스는 지배 엘리트에 맞서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러자 2002년 4월 11일 우파는 쿠데타를 감행해 차베스를 체포하고 외딴 섬에 감금했다.
그 뒤 이틀 동안 일어난 일은 당시 대통령궁 안에서 촬영 중이던 아일랜드 TV 방송국 취재팀에 의해 카메라에 포착됐다.
베네수엘라 상공회의소 지도자 페드로 카르모나가 새로 재단한 대통령 어깨띠를 두른 채 이제 자신이 베네수엘라 대통령이라고 선포했다. 그를 에워싼 기업주들과 정치인들은 그의 승리를 축하하며 건배하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대통령궁의 창문을 통해 촬영하던 카메라에는 수백, 나중에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천천히, 조용히 대통령궁으로 몰려드는 장면이 찍혔다.
그들은 잠도 안 자고 기다리며 차베스의 복귀를 요구했다. 첫째 날 밤새 내내 군중이 계속 불어나자 쿠데타를 지지한 군인들은 당황했다. 그리고 보통의 사병들은 자신감을 얻기 시작했다.
이틀 뒤 차베스는 의기양양하게 복귀했다. 그는 대중에게 감사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했다.
2003년에 일어난 두번째 “기업주 파업”은 노동계급의 저항에 부딪혀 패배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차베스 지지는 여전히 강력하지만, 차베스 자신은 브라질·에콰도르·아르헨티나의 새 “개혁” 정부들과의 동맹을 신뢰하는 듯했다.
이들 각국에서는 IMF와 국제 자본이 생존의 조건을 좌우하고 있음이 분명해지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볼리비아 같은 나라들에서는 대중의 저항이 신자유주의 정책들을 성공적으로 좌절시키고 있었다.
두번째 기업주 파업 패배 뒤에 [대통령 소환]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캠페인이 시작됐다. 헌법에 따르면, 차베스가 집권할 때 얻은 59퍼센트보다 더 많은 표가 나와야 국민투표를 통해 그를 권좌에서 몰아낼 수 있다.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위기에 처한 지배계급이 그들 자신의 민주주의 법규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국민투표가 끝나면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이용해 차베스를 끌어내리려는 캠페인이 다시 시작될 것이다.
진정한 문제는 8월 15일 이후 권력 투쟁이 심화할 때 볼리바르주의 혁명이 약속한 경제·정치 권력의 변화를 어떻게 관철시킬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권력이 실제로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차베스 자신은 그 문제에 대해 혼란스런 답변을 내놓고 있다. 5월 16일에 그는 사람들에게 무장하라고 호소했다. 5월 30일에는 선거 과정을 존중하라고 호소했다.
대중이 더 잘 조직될수록, 주도력이 차베스 자신한테서 대중 운동으로 더 많이 넘어갈수록, 지배계급이 성공할 가능성은 그만큼 더 낮아진다.
그러나 칠레는 핵심 교훈을 잘 보여 준다. 1973년에 진보적 지도자 살바도르 아옌데는 민주주의 법규를 고수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유혈낭자한 쿠데타로 전복됐고 그 이후 피노체트 장군이 이끄는 억압 정권이 들어섰다.
우리 편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존중한다 해도 부르주아지는 그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전복할 것이다.
미래를 좌우하는 것은 이런저런 국민투표 결과가 아니다. 노동계급이 그 자신의 조직들을 이용해 독자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 베네수엘라 혁명의 미래를 좌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