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편지
법정 최후 진술:
노동자 탄압에 항의한 내 행동은 무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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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틀 전이었던 지난해 2월 23일 나는 민주노총 노동자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채증 카메라에 찍혀 재판을 받게 됐다. 6월 20일 1심 재판에서 최후진술을 했다.
검사는 당시 상황을 녹화한 경찰의 캠코더 영상을 틀며, 경찰이 대오를 향해 3회 이상 해산명령을 내렸으므로 내가 경찰의 집회 해산 명령을 거부한 죄가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피의자 심문에서는 "불법 집회에 따른 시민들의 교통 불편은 생각해 보지 않았느냐", "주최 측 스스로 2개 차로로만 행진하겠다고 집회 신고를 내놓고서 그것을 어긴 것 아니냐" 하는, 유치한 공격으로 내 정당성을 무너뜨리려 했다.
이에 나는 "1991년 광주지방법원 판례에 따르면 시위 행진은 그 자체가 도로 통행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도로교통을 방해했다고 볼 수 없다. 그리고 행진 참가자가 1만 명을 넘을 정도로 매우 많았기 때문에 오른쪽 2개 차로로만 행진하라고 하는 것은 집시법의 과도한 적용으로 집회와 시위의 정당한 권리를 제약하는 처사이다" 하고 반박했다. 변호인 역시 "집회 주최 측이 4개 차로로 행진 신고를 내고 싶어도 경찰 측에서 2개 차로밖에 허가하지 않는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며 검사의 주장을 반박했다.
검사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채 피의자 심문을 서둘러 마무리하면서도, 내가 불법 행진으로 시민들에게 막대한 불편을 끼치고도 그것이 아무 문제 없다는 듯이 말하고 있다며 벌금 5백만 원을 구형했다.
그래서 나는 박근혜가 당선된 이후 일주일 동안 4명의 노동자와 1명의 사회단체 활동가가 목숨을 잃었다는 점을 밝히며, 그 분들은 “이전 정권의 노동 탄압 정책을 그대로 계승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 후보가 당선돼 좌절감 속에서 목숨을 잃어 갔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박근혜 인수위는 노동계의 대화 요구를 철저하게 묵살했고, 이에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틀 전인 2013년 2월 23일 노동계는 전국 규모의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던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단지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재판을 받고 범법자 취급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다. 내 행동은 전적으로 정당했다. 만약 이 법정이 정의롭다면 내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져야 할 것이다.”
다음은 내가 이 날 법정에서 낭독한 최후진술문 전문이다.
감사하게도 검사님께서 아까 제게 발언 기회를 조금 허락해 주신 덕분에 진술 시간을 조금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2013년 2월 23일 민주노총 노동자대회 행진 당시 상황에 대해 진술하겠습니다.
제가 채증당할 당시 행진 대열은 미리 신고한 대로 서울역에서 출발해 명동 앞을 거쳐 을지로입구 사거리로 진입하던 도중이었으므로, 신고된 행진 경로를 현저히 벗어났다고 볼 수 없습니다.
당시 행진에 참여한 인원 수가 1만 명이 넘는 매우 많은 인원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오른쪽 1개 차로를 벗어나 차로를 넓게 이용해서 행진한 것을 문제 삼는 것은 집시법을 과도하게 해석해 집회 시위의 권리를 제약하는 처사입니다.
행진 대열이 양방향 전 차로를 점거하고 도로상에 앉을 것이라는 점은 사전에 관할 경찰서장에게 알려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행진 방식이 사전에 예측할 수 없었던 방식으로 진행됐다고 볼 수 없습니다.
행진 대열이 차도상에 앉았을 때 경찰은 차단벽 등 중장비를 동원해 행진 대열의 합법적인 진로를 완전히 가로막았고, 이에 따라 대열은 신고된 정리집회 장소인 시청 앞 광장으로 진입할 수 없게 됐습니다. 이 상태로 1시간가량 대치가 지속된 후에 행진 대열은 자진해산을 위해 약식 정리집회를 가졌던 것입니다. 만약 이 정리집회가 신고된 장소인 시청 앞 광장에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집회 장소 이탈이라고 한다면, 그 주된 책임은 경찰에게 돌아가야 합니다.
이 집회와 관련해서 경찰과 검찰은 저를 비롯해서 집회의 일반 참가자 수백 명에게 소환장과 공소장을 남발했습니다. 이것은 권위적인 정권의 이해에 영합해 진보 운동, 특히 노동운동에 대한 청년·학생 등 시민 사회의 광범위한 연대와 지지를 탄압해 위축시키려는 검찰의 기소권 남용이며 지극히 정치적인 처사입니다.
둘째, 제가 참가한 당일 집회의 취지와 정당성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2012년 12월 19일은 박근혜의 대통령 당선이 확정된 날입니다. 바로 다음 날인 20일 한진중공업 노동자 최강서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튿날인 21일에는 현대중공업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던 이운남 씨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5일에는 대학노조 한국외대지부에서 일하던 노동자 한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같은 날 민권연대 활동가 한 분도 목숨을 끊었습니다. 26일에는 전날 돌아가신 한국외대 노동자의 빈소를 지키던 또다른 노동자 한 분이 급성 심근경색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박근혜가 당선된 이후 정확히 일주일 동안 전국에서 4명의 노동자와 1명의 사회단체 활동가가 돌아가신 겁니다.
이때 돌아가신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노조 탄압으로 악명 높은 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로서, 이전 정권의 노동 탄압 정책을 그대로 계승할 것이 뻔히 예상되는 후보가 당선되자 좌절감 속에서 목숨을 잃어 갔던 것입니다. 이들이 느꼈던 좌절감과 위기 의식은 몇몇 특수한 처지에 놓인 노동자들만 느낀 것이 아니라 전체 노동계가 보편적으로 공감했던 것이었기에, 노동계는 이후 두 달 동안 당시 박근혜 인수위를 향해서 5대 노동현안과 10대 노동과제를 제시하며 대화를 촉구했습니다. 당시 박근혜 인수위는 노동계의 대화 요구를 철저하게 묵살했고, 이에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틀 전인 2013년 2월 23일 노동계는 전국 규모의 노동자대회를 개최했던 것입니다. 요컨대 이 노동자대회 개최에 따른 불편과 소란이 있었다면, 그 근본적인 책임은 당시 인수위를 계승한 현 박근혜 정부에 물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와 관련된 노동자 서민의 죽음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난해 10월부터 이 진술문을 준비한 걸로 기억하는데, 그동안에 노동자분들이 너무 많이 돌아가셔서 진술문이 너무 길어질 뻔했습니다. 시간 관계상 짧게 나열해 보겠습니다. 2013년 4월 4일 24명의 쌍용차 정리해고 희생자 영정을 모셨던 대한문 앞 쌍용차 분향소가 경찰에 의해 강제 철거됐습니다. 2013년 10월 31일에는 삼성전자서비스 노동자 최종범 씨가 노조 탄압과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13년 12월 2일에는 밀양 송전탑 건설에 반대하던 주민 유한숙 씨가 음독 자살했습니다. 2014년 4월 3일에는, 지난해 말 철도파업에 대한 보복 성격이자 철도 물류 자회사 분할 민영화의 준비 작업이기도 한 철도공사의 노동자 강제전출이 원인이 돼 철도노동자 조상만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014년 4월 16일에는 안산공단 지역 노동자 자녀들이 대거 탑승한 여객선이 진도 앞바다에서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해경과 언딘의 유착, 그리고 정부의 아주 ‘체계적으로 무능하고 무책임한’ 대응이 원인이 되어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끔찍한 참사로 확대됐습니다. 2014년 4월 23일에는 25번째 쌍용차 해고 노동자가 스트레스성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습니다.
이 숱한 죽음들의 나열을 통해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정권이 어떤 정책 결정을 내리면 그것은 노동자와 서민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서 때로는 죽음에 이르게까지 합니다. 그런데 반대로 노동자와 서민이, 자신들의 생존권과 생명에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는 문제에 관해서 정권을 향해 목소리를 내고 요구를 하면, 왜 그것은 ‘정치 파업’이니 ‘불법 시위’니 하는 것이 돼야 합니까? 왜 저는 단지 “더 이상 죽이지 말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여기 불려 나와서 재판을 받고 범법자 취급을 당해야 합니까? 그래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무죄이며, 제 행동은 전적으로 정당했습니다. 만약 이 법정이 정의롭다면 제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