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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행동으로 이어지다

유가족들은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원칙적으로 싸우며 투쟁의 구심을 형성해 왔다.

5월 8일 유가족들은 KBS를 항의방문 했다. “총력 구조” 운운하며 박근혜 정권의 입맛에 맞는 보도를 해 온 ‘기레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한 것이다.

항의 시위는 KBS 노동자들의 양심을 건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KBS 노동자들은 “더는 정권의 하수인으로 살지 않겠다”며 파업에 나섰다.

유가족들은 청와대로 발걸음을 옮겨 농성을 시작했다. 참사 책임의 핵심에 박근혜 정부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지목한 셈이다.

5월 10일 안산에 2만여 명이 모였다. 참사 희생자들을 향한 추모와 정부를 향한 분노가 행동으로 폭발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을 보여 준 사건이었다. 서울 도심 집회 규모도 점점 성장했고 갈수록 박근혜 정부로 모든 분노가 모아지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 내 온건파 지도자들은 박근혜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에 반대했고 ‘박근혜 퇴진’ 요구를 반대했다.

유가족들은 전국 각지를 돌며 투쟁 지지를 호소했다. 6월부터 유가족들은 국회 앞 농성에 돌입했다. 농성은 광화문으로 진출했고, 이는 운동 참가자들의 투지를 예각화하고 다시 모으는 구실을 했다. 대책회의 내 온건파들과 달리 유가족들은 박근혜 정부를 실제로 압박했다.

7·30 재보궐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이기며 운동은 일시적 어려움에 봉착하는 듯했다.

구심점

그러나 8월 ‘유민아빠’ 김영오 씨의 단식이 다시 연대의 초점을 제공했다. 48일간의 단식은 유가족들의 절박함과 정권의 냉혹함을 상징적으로 보여 줬다. 동조 단식자가 3만 명에 이를 정도로 지지가 광범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금속노조가 소속 조합원인 김영오 씨 살리기, 세월호 특별법 제정 등의 요구를 내놓고 파업을 명령했다면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도통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전 원내대표 박영선은 집회 연단에서 기소권은 요구할 수 없다고 당당히 선언하더니 두 번이나 새누리당과 야합을 했다. 진실 규명에 진지하지 않은 집단임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기, 대책회의의 일부 온건 리더들은 새정치연합의 협상을 지나치게 중시해 수사권·기소권 요구에서 후퇴하려 하는 등 심각한 약점을 보였다.

다행이게도 유가족들은 야합안을 거부하고 투쟁을 선언했다. 이런 단호한 태도는 운동의 명분과 지지자들의 자신감을 유지하는 데에 결정적인 힘이 됐다. 1차 야합 이후 광화문 농성장을 찾는 사람들은 오히려 늘어났고, 8월 15일 집회에는 5만여 명이 집결했다.

지지 여론은 여전히 광범했지만 박근혜를 물러서게 할 만큼 운동이 강력해지지는 못한 상황이었다. 조직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여전히 실종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인 9월 국무회의에서 박근혜는 사실상 ‘세월호 정국이 끝났다’며 협상에서 양보하지 말라고 못 박았다. 공교롭게 그 직후 유가족 일부의 취중 폭행 사건이 벌어져 대대적 마녀사냥이 있었다.

이런 상황들이 유가족들을 위축시킨 듯하다. 정기국회를 앞두고 유가족들은 특검 추천권 정도로 요구안을 후퇴시키는 입장을 취했다.

이제는 대책회의 일부 리더들도 특별법 국면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월호 특별법이 운동의 대의를 상징하고 단호한 투쟁이 운동 참가자들에게 투지와 자신감을 줬다는 점에 비춰 보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