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숙제”를 남긴 SK브로드밴드·LG유플러스 비정규직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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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연대노조 SK브로드밴드 비정규직지부가 임단협 조인식을 하고 LG유플러스 비정규직지부가 임단협 잠정합의를 했다. 고공농성 80일, LG유플러스지부 파업 1백61일, SK브로드밴드지부 파업 1백58일 만이다(4월 26일 기준).
이번 합의된 임단협에 따라 그동안 개인도급자나 '근로자영자' 형태로 일해 왔던 노동자들은 협력업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 노동자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내년부터 다단계 하도급 구조도 개선하기로 했다. 통신업계에 만연한 다단계 하도급 문제를 개선하기로 한 것은 이번 임단협의 중요한 성과다.
또, '건당 수수료'만 받던 노동자들에게 기본급이 생겼다. 사측은 과거에 노동법 위반 사항들과 관련해 노동자들에게 '면책 합의금'을 지급하고, 임금에서 불법적으로 퇴직금을 공제한 경우 이를 반환하기로 했다. 이외에도 복지 확대, 노조 활동 보장 등이 단협에 명시됐다.
SK브로드밴드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합의안을 71.4퍼센트(투표율 92.71퍼센트), LG유플러스 노동자들은 72.74퍼센트(투표율 82.4퍼센트)로 가결했다.
"아쉬움이 있지만 1년차 된 노조 치고는 잘 싸웠다고 생각해요. 개통 기사 [센터] 정규직 전환이 이번 임단협의 가장 큰 성과예요."
그러나 아쉬움도 있다. 특히 노동자들은 임금과 ‘면책 합의금’이 기대보다 낮고, 정규직으로 전환할 때 근속이 인정되지 않는 것을 큰 아쉬움으로 꼽았다.
"임금 부분에서 아쉬움이 커요. 편차가 있지만 기존에 괜찮게 벌던 사람[개통 기사]들은 임금이 깎이고 대체로 임금 인상 효과가 미미해요. 그래서 더 싸우자고 했는데, 장기 파업으로 다들 많이 지쳤죠. 빚도 너무 많고요. 일단은 올해 기본급 체계가 잡혔으니 내년부터 또 싸워야죠."
투쟁 돌아보기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지난해 3월 노조를 결성했다. 노조가 결성되자 사측은 온갖 회유와 탄압(일감 뺏기, 조합원 해고, 친사측 복수노조 설립 등)을 했지만 노조는 오히려 전국으로 뻗어 나갔다. 그동안 간접고용 굴레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견뎌 왔던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선 것이다. 최근 몇 년간 인상적으로 펼쳐진 서비스 간접고용 노동자 투쟁의 바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중순, 다단계하도급 근절, 생활임금(고정급 체계의 임금 인상), 현안문제 해결(일감 뺏기 중단, 체불임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무기한 전면 파업에 나섰다.
“대한민국 재계 서열 4위라는 LG가 우리에게 어떻게 했습니까? 우리는 고용안정, 생활임금 등 아주 기본적이고 상식적인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노동자의 무기는 단결과 파업입니다. 이제 진짜 사장에게 책임을 물읍시다.”
그러나 4개월간의 장기 파업에도 사측은 대체인력을 투입하며 강경하게 버텼다. 그동안 정부 특혜를 받아가며 급성장해 온 거대 통신 기업 LG유플러스와 SK브로드밴드는 인건비를 줄이려고 그들이 대거 양산한 간접고용의 문제를 결코 책임지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통신업계 경쟁 격화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 앓는 소리를 해댔다. 사측은 노동자들에게 양보했다가 상대적으로 잘나가는 무선 부문으로 투쟁이 번질 것도 우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지난 파업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잠재력을 보여 줬다. 노조를 결성한 지 1년이 채 안 되고, 정규직 노조의 연대가 많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노동자들은 정부와 사측에 맞서 대오를 굳건히 유지하며 헌신적으로 투쟁했다.
지난 1월 6일에는 SK브로드밴드 노동자 수백 명이 SK본사 건물을 점거했다. 놀란 원청은 처음으로 노조와의 대화에 나와 '비정규직 문제에 대해 빠른 결단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SK그룹 회장 최태원의 가석방 논의로 원청이 여론을 크게 신경쓰고 있다는 점을 잘 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흔히 그렇듯이 SK 사측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노조 지도부가 원청의 약속을 믿고 세 시간 만에 점거를 푼 것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했다.
"서린빌딩[SK그룹 본사]을 점거하고 세 시간 만에 나왔을 때 아쉬움을 토로하는 조합원들이 많았어요. 그때 정말 사기가 좋았거든요.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면 거기 눌러앉을 겁니다."
또, 일부 조합원들은 노조 지도부가 사측과의 '교섭 타결'에 중점을 두며 계속 요구를 낮춰 제출하고, 사측이 양보 제스처를 조금 보이면 계획했던 투쟁 일정을 뒤로 미루기도 했던 것에 비판적이기도 하다.
"교섭은 교섭대로 하고, 투쟁은 투쟁대로 해야 합니다. 교섭단의 판단을 존중해야 하지만, 교섭을 하고 와서 계획된 투쟁을 미루는 일이 많아서 논쟁도 있었어요."
힘든 간접고용 투쟁에서 노조를 인정받기 어려운 조건 탓에 타협이 강요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노조 인정과 교섭 성사에 지나친 강조를 두다 보면, 투쟁이 안정적 교섭을 방해한다고 여겨 효과적 투쟁 전술을 사용하는 데 제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협상을 위해 노동자들의 조건 개선 요구를 삭감하는 것이 노조 강화에 도리어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점, ‘블라인드 교섭’에 따른 노조 민주주의의 훼손이 노조의 활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점을 곱씹어 봐야 한다.
투쟁이 길어지자 조합원들의 생계 어려움은 커졌고 결국 3월 초 파업을 중단하고 현장으로 복귀했다. 최근의 교섭 결과는 이런 조건에서 도출된 것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첫 술에 배부를 수 없다며 아쉬움을 딛고 계속 싸울 의지를 다지고 있다. 이번 투쟁으로 의식과 조직을 성장시킨 것이다.
“예전에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번 투쟁으로 확실히 알게 됐습니다. 지난 1월 6일 2백22명이 유치장에 연행됐을 때, 나는 내 직업란에 ‘노동자’라고 적었습니다. 영원히 내가 노동자라는 것을 인식하며 싸울 것입니다.”(SK브로드밴드 이경재 지부장)
"저녁에 일찍 들어가 가족과 쉬고 싶고, 점심에 남들처럼 점심밥을 먹고 싶어서 노동조합을 시작했습니다. 수많은 탄압과 해고가 있었습니다. 싸우는 과정에서 제가 비정규직이고 간접고용 노동자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10년 동안 몰랐습니다."(고공농성자 장연의)
"우리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파업을 하면서 돈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것, 삶은 더불어 함께 할 때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두 활동가가 돼서 진보적인 가치들을 전파합시다. 그렇게 내 편을 만듭시다. 내 편이 많아지면 우리가 원하는 좋은 세상이 빨리 올 것입니다."(고공농성자 강세웅)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이번 투쟁의 “절반의 승리와 절반의 숙제”를 디딤돌 삼아 앞으로 더 전진하기를 기대한다.
계속되는 간접고용 투쟁의 전진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간접고용 투쟁이 또 한 발 전진한 것을 의미한다.
IMF 위기 이후, 재벌 기업들은 인건비를 줄이고 경기에 따라 손쉽게 인력을 조정하려고 하도급, 외주화를 광범하게 사용했다. 통신 대기업도 마찬가지였다. 'IMF 위기' 이후 정부의 기업 특혜와 규제 완화 속에서 통신업계 기업들은 대규모 인수합병을 진행했다. 그 결과 통신업계는 현재의 KT, LG유플러스, SKT 3대 통신사로 재편됐다.
2000년부터 통신 대기업은 인수합병으로 인한 중복 인력 발생과 유선방송 시장의 과다 경쟁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전가하기 시작했다. 희망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을 대규모 강제 퇴출하고, 기존 정규직 인력을 외주화, 도급화 했다. 가정통신서비스의 핵심 업무인 개통(설치), 장애처리, 창구영업 등이 전부 외주화됐다.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다.
도급화, 외주화는 기업주들이 노동자들을 쉽게 통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면 하청업체를 폐업해 해고하고, 파업하면 원청이 법적 제약 없이 대체인력을 투입할 수 있다. 사실상 노동3권을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조건 속에서도 간접고용 노동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투쟁해 스스로 노동조건을 개선해 왔다. 최근 몇 년간 대학 청소, 인천공항, 삼성전자서비스, 씨앤앰과 티브로드, SK브로드밴드와 LG유플러스 등 서비스 부문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과 투쟁이 이를 보여 준다.
또, 간접고용 투쟁은 '바지 사장'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사장'을 드러내고 책임을 묻는 투쟁이었다. 정부와 기업주들은 원청 사용자성을 회피하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대학 청소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이 대학 당국이고, 재벌 기업 협력업체 노동자들의 ‘진짜 사장’이 재벌 기업주들인 것을 안다. 청소 노동자들, 티브로드와 씨앤앰 같은 통신 노동자들은 원청을 교섭에 끌어내 일부 책임을 묻는 일보 전진을 이루기도 했다.
지금 박근혜 정부는 간접고용에 대한 문제제기 확산에도 불구하고, '고령자와 전문직에 대한 파견 허용', '사내하도급 근로자 파견 도급 구별 기준 마련' 등 규제를 풀어 간접고용을 더 늘리려고 한다(비정규직종합대책(안)). 이런 시도는 계속 끈질긴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