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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도 근속승진제 폐지를 2단계 ‘정상화’ 저지 성과로 포장해선 안 되는 이유

정부가 5월 말 국회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처리를 밀어붙이기로 가닥을 잡으면서 공공부문 2차 ‘정상화’ 공격도 본격화될 예정이다. 5월 20일 최경환은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임금피크제 시행을 “공공부문이 적극 선도하도록 할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임금피크제 시행을 청년고용과 연계해 마치 이것이 일자리 창출 방안인 양 주장하지만 완전한 위선이다. 20~30대 비정규직 비율이 민간부문보다 공공부문에서 더 높다는 점을 봐도 정부가 양질의 청년 고용 증대를 가로막아 온 주범임을 보여 준다. 또 앞으로 추진하려는 ‘기능조정’은 사실상의 민영화로 공공기관 일자리를 오히려 줄일 공산이 크다.

정부의 공공기관 임금피크제 권고안에 따르면, 신규 채용될 1명의 임금은 고령 노동자 1명의 임금 삭감분으로 충당돼야 한다. 즉, 고령 노동자 1인당 연간 약 3천만 원가량의 임금을 깎으라는 주문이다. 정부는 노동자들이 고용 기간이 연장되는 ‘혜택’을 얻었으니 임금 좀 깎는 게 뭐 대수냐는 식이지만, 노동자들의 생애 임금은 늘리지 않겠다는 도둑놈 심보다.

또 정부의 계획대로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등이 도입되면 공공부문의 노동조건 전반이 대폭 악화되고 결국 신규 채용된 노동자들의 조건도 함께 악화될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공공부문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공격한 후 이를 발판 삼아 전체 노동자들의 조건을 악화시키려 한다는 점도 봐야 한다.

정부의 공격에 맞서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조건을 지키는 것은 전체 노동자들의 조건 악화를 막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

철도 근속승진제 폐지가 낳은 효과

정부는 워낙 사악하고 집요하게 공격을 하는데다, 청년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통에 빠뜨려 놓고는 그 책임을 공공부문 정규직에 떠넘기며 이간질하고 있다. 이 속에서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나서면 고립되고 결국 패배할 수 있다는 우려가 꽤나 광범하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조 지도자들은 특히 압박을 크게 받고, 그 결과 아예 싸워 보지도 않고 배신적 타협이나 양보를 하는 데로 이끌리기도 한다. 예컨대 최근 철도노조 김영훈 집행부가 근속승진제 폐지를 합의해 준 것이 그 사례다. 김영훈 집행부는 어차피 싸워도 조건을 지킬 수 없으니 협상을 통해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본다.

김영훈 위원장은 이 양보가 “성과연봉제, 퇴출제, 임금피크제 도입에 철저히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근속승진제 폐지를 수용해 단협을 체결하면 “적어도 단협 기간 내에는 제도 변경이 불가능”하므로 정부와 사측의 추가적인 공격을 막는 데 더 유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난해 철도공사는 단협 시한이 만료되지 않았는데도 노조에 기업복지 삭감을 위한 단협 개악을 추진했다. 그리고 당시 노조 집행부는 이를 거부하지 않고 합의해 줬다.

무엇보다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는 철도 노동자들의 사기를 심각하게 꺾는 효과를 내, 향후 공격에 맞서기 훨씬 어려운 상황을 초래했다.

노동자들은 근속승진제가 폐지돼 평가에 기초한 승진 제도가 도입되면 사측의 현장통제 강화를 불러와 조직력을 약화시킬 것이라고 강력하게 우려하고 반대했다. 그런데도 노조 집행부가 근속승진제 폐지를 합의하자 조합원들 사이에 적잖은 체념과 실망이 퍼졌고, 그 결과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안이 가결될 수 있었다.

게다가 단협이 체결되자마자 사측 관리자들은 기가 살아 노동조건과 관련된 현장 지부와의 약속을 파기하고, 심지어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안에 반대표가 많이 나온 지부에 대해 보복 조처도 운운하고 있다고 한다.

철도노조의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는 다른 공공기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철도 노동자들에게 근속승진제 폐지를 압박할 때 근거로 삼았던 ‘직급별 정원제’를 다른 공공기관들에도 들이밀며, 이를 적용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주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하위 직급 ‘통합정원제’를 운영하는 공공기관 54곳이 그 대상이 될 듯하다.

무엇보다 〈조선일보〉를 비롯한 보수 언론들은 철도 근속승진제 폐지를 발판 삼아 다른 공공기관 ‘개혁’에 속도를 내라고 주문한 바 있다. 대규모로 잘 조직된 철도노조의 양보가 정부의 공격에 날개를 달아 준 셈이다.

그뿐 아니라 6월 공공부문 총력 투쟁 전선의 핵심 부대가 사라져 공공운수노조의 6월 투쟁 계획 자체가 상당히 축소된 형국이다.

공공운수노조의 구실

이런 점에서 좌파로 불리는 공공운수노조 집행부가 산하 노조인 철도노조 김영훈 집행부의 근속승진제 폐지 합의에 한마디 비판이나 유감 표명조차 하지 않는 것은 매우 아쉽다.

우렵스럽게도 공공운수노조 집행부 내 일부는 ‘그래도 철도노조가 근속승진제를 폐지했지만, 임금피크제, 성과연봉제, 퇴출제를 저지한 것 아니냐’고 본다. 노조의 양보로 정부의 공격을 막은 것이라는 철도노조 집행부의 아전인수격 해석을 두둔하는 것이다.

이런 평가는 최근 서울대병원노조가 파업을 벌여 사측의 단협 해지와 일방적 취업규칙 개악을 저지하고 성과연봉제를 일단 저지한 것과 한 묶음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철도노조는 투쟁을 시작조차 하지 않고 양보를 해 오히려 정부가 철도노조 ‘길들이기’에 성공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반면, 서울대병원노조는 1차 ‘정상화’ 요구도 수용하지 않고 20일 동안 파업을 벌이며 맞섰지만, 다른 공공부문 노조들의 실질적인 연대는 매우 부족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병원노조도 최대치까지 투쟁을 밀어붙이진 못했고 결국 1차 ‘정상화’ 항목들인 학자금 지원 폐지, 정기휴가 폐지, 수당 삭감 등 여러 기업복지와 노동조건 후퇴를 수용한 아쉬움을 남기긴 했다.

이런 상황에서 철도노조와 서울대병원노조 사례를 보고 ‘개별 노조의 임단협 체결로 정부 공격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줬다’고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특히 철도노조 집행부의 타협은 공공기관 ‘정상화’ 저지 전선의 일각을 무너뜨리고 투쟁을 더 어렵게 만든 해악적 사례다.

사실 공공운수노조는 정부의 공격에 맞서 투쟁을 이끌며 철도와 같은 산하 노조가 양보 교섭에 나서지 않도록 압력을 가하고, 서울대병원노조처럼 정부 공격에 맞서 싸우는 노조에 실질적인 연대를 건설해 아쉬운 양보로 끝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그런데 공공운수노조 집행부는 공공기관 ‘정상화’ 저지 투쟁을 조직하기보다 노정 교섭 촉구에 힘을 쏟고 있다. 4월에는 노사정위 공공부문발전위원회 논의에 한국노총과 긴밀하게 공조하면서 정작 민주노총의 4·24 파업에는 집회 동원에 그쳤다.

게다가 ‘노사정 공동으로 인건비 재원을 마련해 신규 고용을 늘리자’는 양보론(경영평가 성과급을 반납하면 초임 3천만 원 일자리 3만 개 창출이 가능하다는 식)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런 양보론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조건을 지키기 위해 싸울 동기를 부여하지도 못하고,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도 청년 일자리 부족에 책임이 있다’는 그릇된 인식을 강화시켜 줄 위험마저 있다. 또, 어차피 양보는 불가피하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을 회피하려고 불필요한 타협과 양보를 하는 것을 정당화할 수 있다.

정부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하려면, 정부가 양보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강력한 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양보론으로는 이런 과제를 수행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