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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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아무런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수많은 학교가 휴업하고, 거리에 다니는 차들이 줄고, 사람들이 병원에 가지 않는다. 비상사태다.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메르스 때문만일까?
중동 국가 이외의 다른 나라들을 보면 메르스 환자는 많아야 3~4명이다. 그런데 6월 5일 한국의 메르스 환자는 벌써 41명을 넘었고 사망자도 4명이다. 환자 수로만 보면 3위로 한국은 이제 무슨 중동의 나라가 된 듯하다.
정부는 초동 대응을 잘못했다고 시인했다. 문형표 보건복지부 장관은 “미흡한 초동 대응으로 국민 여러분께 …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하고 말했다. 그러나 미흡하다는 말로는 그야말로 너무 미흡하다.
정부가 초동 대응 조치로 한 일은 메르스가 발생한 평택성모병원 8층 병실 하나의 환자들과 가족들만 격리한 것이었다. 물론 그것도 제대로 못 했다. 그 가족 중 한 명이 홍콩을 거쳐 중국까지 갔다.
정부가 나머지 환자들을 방치한 후, 평택성모병원의 8층 병동이 소개, 즉 비워졌다.(누가 소개시켰는지 정확한 정보는 정부가 알리지 않고 있다.) 입원한 환자들은 당연히 다른 층의 병동이나, 지역의 다른 병원으로, 그리고 좀 더 먼 병원으로 옮겨 갔다. 그 결과가 지금 우리가 보는, 2차 감염자들이 병원을 옮겨 다니며 3차 감염자들을 만들고 있는 현실이다. 정부가 환자들을 지역에, 아니 전국에 흩어 놓은 꼴이다. 이게 정부가 한 일이다.
사실, 평택에서 일어난 일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이른바 최초 환자는 병이 잘 낫지 않자 동네 의원, 동네 병원, 용하다는 서울의 의원을 다 들렀다. 그리고도 잘 낫지 않자 우리 나라의 가장 큰 병원으로 갔다. 누구라도 그러지 않는가? 또 평택 시민들은 언제나처럼 똑같은 생활을 했을 뿐이다. 아, 옆 병실 사람이 무슨 이상한 병에 걸려서 병실을 폐쇄했으니 우리는 다른 층이나 다른 병원으로 옮기면 되는 모양이구나. 그리고 다른 데로 가라니 다른 데로 갔다. 평소처럼. 똑같이.
다만 이번에는 운이 지독히 없었을 뿐이다. 내가, 옆 병실에 입원한 사람이, 위층 병실에 입원한 사람이 하필 메르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병에 걸린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정말 운이 없었을 뿐인가? 메르스(2015년)는, 그리고 사스(2002~3년)는, 신종플루(2009년)는, 또 에볼라는 세계화된 시대에는 언제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병일 뿐이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나날이 지내는 일상 아래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심연이 있다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만일 평택성모병원이 ‘평택시립병원’이었다고, 그리고 그 병원에 격리 시설과 격리 병동이 있었다고 가정해 보자. 8층의 나머지 병동 환자들은 아마 격리 병동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또 최소한 평택 지역에 있는 병원 6곳 중 하나만이라도 ‘평택시립병원’이었다고 가정해 보자. 환자를 성모병원에서 내보낸다 해도, 최소한의 안전성을 담보하기 위해 평택시립병원으로 옮겨서 격리 병실에서 보호하지 않았을까?
평택에는 병원이 6곳 있다. 그러나 공립병원은 하나도 없다. 안성이나 화성까지 가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밖에. 우리 나라 국공립병원은 대학병원까지 다 합쳐 봐야 병원 수의 6퍼센트 즉 20곳 중에 1곳밖에 안 된다. 병원 10곳 중 공립병원이 7~8곳이라는 OECD 평균은 넘어 가자. 공공의료가 밑바닥이라는 미국이나 일본도 국공립병원은 10곳 중에 3곳은 된다. 엉망진창이라는 미국의 의료조차 최소한 3~4곳 중에 1곳은 공립병원이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미국보다 못한 한국은 도대체 뭔가? 사립병원들이 돈도 안 되는 음압 격리 병실을 충분히 가지고 있을 리 없고 설사 몇 개 가지고 있다 해도, 이상한 병이 돈다고 병실이나 병동을 선뜻 내줄 리도 없다. 환자들은 알아서 제 살길을 찾아야 하고 혼자 큰 병원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들은 이런 현실이 일상이려니 하고 그렇게 살아 왔다.
일상이 메르스를 만나 그 민낯을 드러냈다. 한국은 OECD 평균보다 병상이 2배나 되는 병원 과잉의 나라다. 그런데도 정작 감염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격리 병상은 없다. 어느 정도 없나. 지금 고위험 감염병 환자가 40명이 겨우 넘었을 뿐인데 서울의 국가중앙병원급 격리병실부터 채우기 시작해 전국으로 환자들이 퍼져 있고 의심 환자들은 들어갈 병실을 찾아, 입원하려는 병원에 연락도 안 하고 쳐들어가고 있다. 이미 더 이상 환자 받을 여력이 있는 국가 지정 격리병상이 있는 병원을 찾기 힘들다. 환자 40명 때문에 ‘국가 재난’이 되고, 사람들이 다 집으로 숨어야 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였다. 다만 우리가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볼드모트 병원
요즘 한국에서는 병원 이름을 알아도 그 병원 이름을 못 부른다. 홍길동의 비애랄까.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 부르는.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새로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은 6곳이라는 정도다. 이 병원들을 따져 보자. 이 병원 6곳 중 확진 환자가 가장 많은 평택성모병원은 휴원을 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메르스에 걸린 의원 2곳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평택에서 서울까지 거리만큼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한 도시의 병원 2 곳은 각각 병원 격리 또는 병동 격리 상태다. 메르스 환자가 발생한 병원 6곳 중 5곳이 격리됐다. 그런데 최근 며칠째 가장 많은 새로운 3차 감염자가 나오는 병원인데도 격리되지 않은 병원이 있다.
나 홀로 격리되지 않은 이 병원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하나이고 우리 나라 1위 재벌이 운영하는 병원이다. 이름을 말하지 못하는 병원. 말하자면 해리포터 시리즈에서 “이름을 말해서는 안 되는 자”에 해당하므로 이 글에서는 이를 빌어 “볼드모트” 병원으로 부르기로 하자.
문형표 장관은 6월 2일 긴급관계장관회의를 브리핑 하면서 “국가적 보건 역량을 총동원 해 메르스 확산을 방지하는 대책”으로 “감염이 발생한 병원이나 병동 전체를 격리”시키기로 했다. 그런데 6월 3일 메르스로 확진된 의료진이 나왔고, 6월 4일 또 환자 중 감염자가 나왔는데도 이 병원은 여전히 격리가 안 되고 있다. 이 볼드모트 병원은 국가에서 제외된 것일까?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 없는” 이 재벌은 진정 “어둠의 마왕”(내 표현이 아니라 해리 포터 시리즈의 표현이다)이어서 ‘X파일’ 사건이나, 반도체 백혈병 사건, 태안 기름 유출 사건 등 그 수많은 사건과 사태에서 특권을 누리고 법 위에 군림하더니, 이제는 국민의 생명이 직접 걸려 있는 메르스 사태에서조차 특권을 누리는 것일까? 건강과 생명의 문제에서만은 자본주의 사회라도 예외적으로 원칙이 지켜질 것이라고? 천만에. 재벌 병원은 메르스에서조차 예외다. 이것이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이다.
노동자
재벌 병원은 메르스에서도 열외지만 노동자는 이 와중에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불안에 떨면서도, 지하철 속에서 노동자 동료들과 ‘밀접 접촉’을 하면서, 서로의 침과 콧물과 숨길을 나누면서 공장에 나가야 하고 사무실로 출근을 해야 한다.
또 감염 위험의 최전선에서 온몸으로 부딪치는 것도 병원 노동자들이다. 그 몇 곳 안 되는 국가지정 격리 병실에서 일하는 간호사 등의 노동자들이 지금 이 사회의 마지막 숨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 노동자들은 감염의 위험에서 제대로 보호나 받을까? 서울대병원 노동조합은 국가지정 격리 병실이 있는 이른바 국가중앙병원에서조차 제대로 된 장비로 보호받지 못하는 현실을 고발한다. 방호복이 모자라 국립의료원(여기도 물론 보건의료노조 소속 노동자들이 일하는 병원이다)과 서울대병원이 이를 나누어 가지고 있단다.
그런데 메르스 발생이 13일이 지나 처음 연 청와대 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그날까지의 환자 수도 제대로 말하지 못했다. 이날 박 대통령은 “메르스와 같은 신종 감염병은 초기 대응이 매우 중요한데 … 미흡한 점이 있었다” 하고 또 한 번의 ‘유체이탈’도 선보였다. 1천 개가 넘는 학교가 휴업을 하는 상황까지 온 이 마당에 누가 대처를 못 했다는 건가. 노동자가? 아니면 박 대통령과 정부가? 이 자본주의 국가가 국민들을 보호하지 못하는 사이에, 노동자들이 온몸으로 전염병을 막고 있다. 앰뷸런스 노동자들이 방호복도 없이 환자를 급하게 병원에 옮기고 봤더니 그 환자가 메르스 환자였다는 ‘기막힌’ 사실은 너무나 자주 벌어진 일이라서 사실 기가 막히지도 않는다. 이 ‘비상사태’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와 서민을 지키는 것은 저들 자본가들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자와 서민이라는 것을 보고 있다.
메르스는 국가의 ‘비상사태’가 됐다. 그러나 이 ‘비상사태’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빌자면 “예외가 아니라 상례다.”(역사철학테제 8번째. 1940). 우리는 언제나 비상사태를 살아왔다. 단지 우리가 이를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우리의 ‘일상’이라는 이름 아래 숨어 있는 것은, 언제라도 우리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자본주의라는 심연이다. 메르스라는 ‘비상사태’는, 이 자본주의 국가가 자본가들의 이윤에만 관심이 있을 뿐 노동자와 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데는 아무런 관심도 없음을 ‘살짝’ 보여 준다. 한국 자본주의의 민낯 말이다.
저들의 국가는 노동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켜 주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스스로와 민중을 지켜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