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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생애와 유산

오늘날 체 게바라의 모습은 어디서나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신화 속의 인물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무엇이 체 게바라를 정치적으로 만들었는가? 그의 생각은 어떻게 바뀌었는가? 짧은 생애를 산 그가 어떻게 전 세계적인 인물이 됐으며, 왜 그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는가?

지난 몇 년 동안 체 게바라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것은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의 폭발이 초래한 급진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에서 유럽의 노동조합원들에 이르기까지 게바라는 반란과 반제국주의의 불멸의 상징이 됐다. 게바라의 저작이 다시 출간되고 있다. 심지어 영화도 있다.

최근 개봉된 〈모터싸이클 다이어리〉는 게바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그의 라틴아메리카 여행을 묘사하고 있다.

아르헨티나 중간계급 출신의 이 신출내기 의사 청년은 이런 여행을 통해 정치화했고 헌신적인 혁명가가 됐으며 결국 그 이름이 쿠바와 동의어가 됐다.

게바라는 타고난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다. 사실, 게바라가 처음으로 정치적 각성을 하게 된 것은 모터싸이클을 타고 라틴아메리카를 여행하면서였다.

그가 만난 원주민들은 궁색하고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그 경험은 게바라의 인도주의 정신과 동정심을 자극했다.

그러나 그의 삶의 경로를 영원히 바꿔놓은 것은 그가 의사 자격증을 취득한 직후에 떠난 여행이었다.

1954년 게바라가 과테말라에 이르렀을 때, 미국 소유의 식료품 회사들을 과감하게 국유화한 개량주의 정부가 미국의 후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로 전복됐다. 이런 사건들 때문에 급진화한 많은 청년들 가운데 한 명이 게바라였다.

그 쿠데타 때문에 게바라는 멕시코에 망명중이던 다른 사람들과 만나게 됐고, 거기서 한 쿠바 청년 활동가를 만났다. 그 혁명가의 이름은 물론 피델 카스트로였다.

점차 정치화하고 있던 게바라는 이 만남을 계기로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

이 청년들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이 미국의 거대 기업들의 이익에 맞게 운영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스스로 반제국주의자라고 여겼다.

얼마 뒤 게바라 자신을 포함한 소수는 냉전에서 소련을 편들며 스스로 공산주의자라고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소련은 결코 사회주의 사회의 모델이 아니라 전체주의 국가였다.

이 집단이 구체화한 사상과 정치 전략이 그 뒤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지역의 많은 투쟁들에서 출발점이 됐다.

게바라는 이런 사상과 전략을 요약해 《게릴라전》이라는 소책자를 썼다. 그는 게릴라 군대를 동원해 지배계급을 군사적으로 공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게바라는 농촌이 주요 전쟁터라고 주장했고, 게릴라들의 용기와 의지로 객관적 조건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혁명을 시작할 수 있을 때까지 조건이 무르익기를 기다릴 필요 없다. 왜냐하면 반란을 일으킨 게릴라 집단이 그런 조건을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하고 썼다.

그는 또 이 엘리트 집단이 대중을 대리해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믿으며 이렇게 말했다. “게릴라 전사는 일종의 수호천사로서, 항상 빈민들을 도와주고 전쟁의 초기 국면에서는 되도록 부자들을 괴롭히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의 투쟁관을 지배한 것은 남성 위주의 엘리트 집단을 조직해 그들을 군사적으로 ― 흔히 야만적인 규율로 ―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멕시코시티를 가로지르는 인수르헨테스 대로(大路)를 따라 17마일[약 27킬로미터]을 걷는 장거리 행군과 산악 등반 등이 그런 훈련의 일부였다.

게바라는 해발 고도가 높은 멕시코시티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늘 천식에 시달린 그는 죽을 때까지 계속 호흡용 마스크를 달고 살았기 때문이다.

그 집단은 이제 구체적인 목표를 갖게 됐다. 그것은 쿠바에서 증오의 대상이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1950년대에 쿠바는 부유한 미국인들의 놀이터나 다름없었다. 카지노와 매음굴은 넘쳐난 반면, 평범한 쿠바인들은 대부분 가난하게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바티스타 정권을 타도하자는 운동은 거의 재앙으로 끝났다.

1956년 말 게바라와 그 동료들을 태운 배는 예정보다 늦게 쿠바 해안에 상륙했고, 바티스타 정권은 이미 알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배에서 내린 82명 가운데 19명만이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게바라는 쿠바의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병사의 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그는 자기와 함께 싸운 사람들에게 충성심과 공포심을 심어 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였다.

그 집단은 모두 심각한 신체적 고통에 시달렸는데, 특히 게바라는 끊임없는 천식 때문에 괴로워했다.

형편없는 무기로 무장한 이 오합지졸 게릴라 병사들이 1959년 1월 아바나에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바티스타 정권이 붕괴 일보직전이었고 내부에서부터 무너졌기 때문이다.

바티스타 정권의 패배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에서 미국의 패권에 대한 커다란 타격이었다. 미국은 쿠바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으로 보복했고, 그 봉쇄는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쿠바혁명의 승리는 전 세계 혁명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게릴라전 전략의 정당성이 입증된 듯했다. 그것은 정치적·경제적 배후조종에 익숙한 미국을 물리쳤다. 그 뒤 몇 년 동안 라틴아메리카 전역의 다른 많은 사람들이 그 전략을 모방했다.

게바라는 쿠바의 진정한 변화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런 기대는 실현될 수 없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혁명이 처음부터 근본적 약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점은 민주주의, 즉 노동자 통제가 실제로 확대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그저 구경꾼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없었다.

오히려 새 정부는 생산을 증대하고 경제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계속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희생을 요구했고, 더 열심히 일할 것과 주말에도 자발적으로 일할 것 등을 요구했다.

모범을 보이기 위해 게바라는 늘 자기 사무실에서 늦게까지 일한 뒤에도 주말에는 육체 노동을 했다.

쿠바혁명의 공식 사진사가 된 유명한 사진사 오스발도 살라스의 책에 나오는 많은 사진들 가운데 하나는 게바라가 건설 현장에서 “자발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이런 규율과 자기 절제 덕분에 게바라는 평범한 쿠바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자기 희생과 규율만으로는 부족했다. 그것만으로는 미국의 봉쇄가 초래한 결과를 극복할 수 없었고 대중 민주주의 ― 모든 사회주의 혁명의 근본적 특징 ― 의 부재, 대중의 사회 조직 참여 부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었다.

선거도 없었다. 새 정부는 단지 스스로 임명할 뿐이었다.

사실, 피델 카스트로는 쿠바혁명과 새 국가를 사회주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훨씬 나중에 소련 편에 붙은 뒤에야 그렇게 했을 뿐이다.

게바라와 그의 동료들이 집권 뒤 맞닥뜨린 딜레마는 중요했다. 그들이 미국에 반대한 것은 옳았지만, 그들의 잘못된 정치 전략 때문에 오늘날의 쿠바는 사회주의를 자처하면서도 시민적 자유나 민주적 절차도 부정하는 끔찍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게바라 자신은 더 많은 것을 원했다. 그는 쿠바가 점차 소련에 의존하는 것에 실망하고 좌절했다.

그는 혁명의 확산을 원했다. 그는 쿠바 혼자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결국 말 그대로 자본주의라는 바다 위의 섬일 뿐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의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고, “베트남이 하나, 둘, 셋, 아니 훨씬 더 많아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략에 사로잡혀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생애의 비극적 모순이었다.

그는 세계를 변혁하기를 원했지만, 그가 의존한 정치 전략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혁명을 확산시키려는 그의 방법은 여전히 게릴라전이었다.

그는 결국 쿠바에서 모든 관직을 사퇴하고 콩고로 가서 투쟁했다. 그 투쟁은 대실패로 끝났지만, 다행히 그는 살아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볼리비아로 가서 또 다른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그는 볼리비아 군대에 쫓겨다니다가 붙잡혀 미국의 군사 “고문단”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당했다.

짧은 생애 동안에 게바라는 이미 전 세계에서 혁명과 반제국주의를 대표하는 인물이 돼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저항의 상징으로 여긴다.

아마도 일부 사람들은 게바라에 대한 정치적 비판이 불쾌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게바라의 약점과 강점을 모두 살펴보는 것과 이 비범한 인물을 깎아내리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이런 고찰을 통해 우리는 게바라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투쟁에 기여한 바를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