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민중주의 vs 계급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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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운동에서 전통적으로 강력한 민중주의는 “각계·각층”의 동맹을 중시하고, 노동자들이 계급 고유의 이해관계를 내세우는 것을 그런 동맹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자연히 노동계급 투쟁의 결정적 중요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은 노동계급이 약화됐고 따라서 예전 같은 방식으로 싸울 수 없다고 여기는, 매우 다양한 경향들과 잘 맞물린다. ‘민주노총은 조직률이 매우 낮아 계급 대표성이 없는 데다 대공장·공공부문 조합원이 다수이므로, 조합원들의 요구를 앞세웠다가는 지배자들의 귀족노조 고립 프레임에 말려든다’는 주장도 그중 하나다. 박근혜 정부를 “독재 회귀” 심지어 “파시즘”이라고 보는 것도 계급을 가로지르는 동맹을 정당화하는 근거다.
이런 민중주의가 2015년 투쟁에 미친 좋지 않은 영향을 잘 보여 준 대표적 사례가 공무원연금 개악에 대한 태도였다. 노동운동 안에는 공무원연금 방어를 꺼리는 견해가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민주노총이 그런 걸 방어해서 지지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노동자연대를 비롯한 일부 좌파들의 주장으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4·24 총파업의 주요 요구로 포함됐지만, 많은 단체와 활동가들은 그것을 ‘공적연금 강화’로 대체하거나, ‘최저임금 1만 원’ 같은 요구를 제기하는 데 강조점을 뒀다. 이것은 자기 조합원들의 조건보다 미조직 노동자들과 전국민의 조건을 더 배려함으로써 국민적(또는 민중의) 지지를 얻겠다는 민중주의적 발상이었다.
물론 ‘공적연금 강화’나 ‘최저임금 1만 원’은 중요한 요구다. 노동자연대는 이 요구들을 지지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노동자들에게 고통 전가하기’ 공격의 최전선으로 삼고 있었고, 이를 지렛대로 노동시장 구조 개악 같은 더 광범한 공격을 추진하려는 상황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문제를 사실상 회피하는 태도는 2015년 노동자 투쟁에서 심각한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공무원노조 이충재 집행부와 연금행동 정용건 집행위원장 등의 ‘공적연금 강화’론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사실상 용인하는 배신으로 나타났고, 이는 상반기 노동자 투쟁이 하락세로 돌아서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당시에 그들은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국민연금 강화에 사용한다는 것은 의미 있는 합의라며 정당화했는데, 국민연금 강화는 공수표에 불과하다는 우리의 경고가 결국 옳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매일노동뉴스〉는 “공무원연금 삭감분을 공적연금 강화에 사용하겠다는 전제로 ‘더 내고 덜 받는’ 공무원연금법 개정안을 얻어 낸 정부는 이후 모르쇠로 일관했다”며 정부의 태도를 “먹튀”라고 요약하고 2015년 노동뉴스 16위로 뽑았다.
민중주의의 논리는 공공부문 정상화나 노동시장 구조 개악 반대 운동에도 적용됐다. 공공부문 노동조합 운동 안에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경제적 요구를 내세워서는 안 되고 ‘공공적’, 즉 국민적 요구에 헌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노선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인 철도노조 김영훈 위원장은 청년 일자리 창출이라는 명분으로 사실상 임금피크제를 수용했다. 5월 말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상반기 노동자 투쟁의 상승세가 꺾였다면, 주요 공공기관들의 임금피크제 협상과 수용은 9~10월 공공부문 투쟁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노동시장 구조 개악 문제에서는 사실상 비정규직 관련 쟁점만 부각하고자 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노동운동의 다수 지도자들이 이 쟁점으로는 국민적 공감을 얻을 수 있고 그래서 더민주당 등 주류 야당과도 협력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정규직·조직 노동자들에게 해당하는 쟁점은 지키고자 아등바등할수록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또는 노동계급의 분절화를 악화시켜 노동운동에 부메랑으로 돌아올 뿐’이라는 생각도 널리 퍼져 있다. 가령, ‘쉬운 해고? 비정규직은 이미 손쉽게 해고되고 있다. 통상임금 정상화? 비정규직에겐 그림의 떡일 뿐이다’는 식의 주장들을 흔히 듣다 보면, 조건 악화에 맞선 싸움이 정당한지 헛갈릴 지경이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들이 쌓아 온 임금과 고용조건 지키기에 연연하는 ‘반대 투쟁, 저지 투쟁’을 할수록 고립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은 노동운동 우파부터 좌파까지 공유하고 있다.
민중의 호민관
어떤 사람들은 이런 주장에 ‘민중의 호민관’, ‘조직 노동자만이 아닌 계급 전체를 위한 투쟁’이라는 긍정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정서는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선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나타나는 효과는 투쟁에 나설 잠재력이 있는 조직 노동자들의 동원을 회피하는 것임을 날카롭게 직시해야 한다.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투적으로 벌이면서 다른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고무해야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중주의자들은 조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조건 방어를 위해 나서는 것 자체를 해롭다고 보기 때문에, 사실상 민주노총의 총파업 성사에 큰 열의가 없었다. 그들은 그 대신에 ‘민주노총이 제대로 되지도 않는 총파업을 하기보다 전략 변화를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 자신의 투쟁과 이를 통한 의식과 조직의 성장 대신 ‘위로부터의’ 개혁을 제안하는 셈이다.
계급 정치를 일관되게 추구하지 않은 다른 대표적 사례는 총파업을 민중총궐기로 대체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민중총궐기가 중요한 전진이긴 했지만 그보다 더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민통 계열은 2015년 초부터 11월 민중대회를 적극 추진했고, 이를 세력 회복과 총선으로 가는 디딤돌로 자리매김하려 했다. 한상균 집행부도 7월 이후 민주노총 내에서 총파업 회의론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민중총궐기에 의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2015년 초 민주노총 임원 선거 직후에는 한상균 위원장을 비롯한 신임 임원진이 ‘총파업 투쟁’을 가장 주되게 표방했기 때문에 조합원들의 지지를 얻고 당선했다는 점을 자타가 인정했다. 그래서 선거에서 ‘준비된 투쟁’을 주장했던 상대편(국민파-중앙파-전국회의 연합선본)도 초기 몇 달 동안은 총파업을 공공연히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다 공무원연금 개악 이후, 4·24 총파업을 전후해 상승하던 기세가 꺾이고 7·15 파업이 급조돼 미미한 수준에 그치자, 총파업이 효과 없고 소모적이라는 종래의 주장이 확산됐다.
총파업 할 역량이 안 된다거나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주장의 근저에는 총파업 같은 전통적 투쟁 방법이 이제 낡았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다. 가령 민주노총 정책연구원 김태현 연구위원은 민주노총이 총파업을 외쳤지만 위력적이지는 않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민주노총의 투쟁 형태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전투적 투쟁이 비정규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을 끌어올리는 선도차 역할을 담당했던 … 그 시절의 향수에 기반하고 있다. … 그러나 시대는 바뀌었다. 자본이 초국적화되고 고용이 분절되며 파편화된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전투적 투쟁이 쉽게 전면화되기는 어렵다.” 민주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총파업 투쟁을 외치기보다 비정규직 조직화와 비정규직 투쟁의 근거지 구실을 전략적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직력 약화, 법제도적 제약, 비정규직 노조의 취약성 등으로 파업이 가능한 조직들이 제한돼 있다는 것도 총파업이 불가능한 이유로 언급되는 요인들이다.
사회적 연대
그러면서 흔히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 하나는 범국민적 또는 ‘사회적 연대’ 투쟁이다. 1~2년 전부터 사용되는 “국민파업”이라는 용어도 비슷한 맥락에서 등장했다. 이런 투쟁은 ‘파업이 가능한 노동자+파업이 불가능한 비정규·미조직 노동자+농민+빈민+자영업자+학생+여성 등등’이 모두 광범하게 연대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지만, 계급의 경계와 파업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든다는 문제점도 동시에 안고 있다. 노동계급의 결정적 중요성은 자본주의 경제의 핵심인 공장, 병원, 학교, 교통·통신 체계 등을 멈출 수 있는 집단적 힘을 가졌다는 데 있다. 자영업자나 학생 몇만 명이 일을 안 하거나 수업에 안 들어간다고 해서 이런 효과를 내지는 못하며, 또한 노동자들 역시 집단적으로 행동하지 않고는 이런 효과를 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투쟁이 “정치” 투쟁(반박근혜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경제” 투쟁보다 우월하고, 노동자 일부가 아니라 전체, 더 나아가 민중까지 포괄하는 투쟁이므로 민주노총만의 총파업보다 우월하다고 여긴다. 지난해 있었던 세 차례의 총파업보다 11월 14일 총궐기가 훨씬 더 위력적이지 않았느냐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난해 초부터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선 투쟁의 시동을 걸고, 노사정 야합에 항의한 9·23 총파업 같은 투쟁들이 있었기에 11월 14일까지 분위기가 뜨면서 총궐기가 비교적 성공적으로 조직됐던 것이다. 오히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총궐기에서 얻은 자신감을 바탕으로 총파업으로 나아가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않고, 그 뒤에도 가두 시위에만 힘을 실은 결과 노동자 투쟁은 더 이룰 수도 있었던 전진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전진해야 박근혜의 ‘노동개혁’을 막을 수 있을 텐데 말이다.
민중총궐기와 직결시켜 총파업을 조직했다면 어땠을까? 노동계급이 경제적·집단적인 힘을 사용해 실질적인 파업에 돌입했다면, 이윤을 위협하는 위력을 발휘하면서 박근혜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 추진에 확실한 제동을 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박근혜를 한 방 먹이고 싶은 더 광범한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수 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노동자들 자신이 계급투쟁의 역량을 십분 발휘했을 때 연대도 확대되고 중간계급들의 지지도 확보할 수 있다.국민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수준으로 노동자들이 투쟁 수위를 낮춰야 연대가 확대되는 게 아니다. 일부 사람들은 “2013년 철도 파업 당시 ‘필공’ 파업을 해 국민에게 불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철도파업이 지지를 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당시 철도 노동자들이 굳건히 장기간의 파업을 이어갔기 때문에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필공이 아닌 전면 파업을 했더라면 승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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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저자가 지난해 노동자 운동을 돌아보며 올해 초 노동자연대 대의원협의회에 제출한 장문의 보고서의 적은 일부분이므로 서론과 결론이 없음을 독자는 감안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