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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지윤은 기회주의적 처신을 중단해야 한다

민중주의에 관해 설명했던 원래 내 글은 공개 논쟁을 유도할 목적으로 쓴 게 아니고, 특히 전지윤을 주로 겨냥한 것도 아닌데, 그가 제 발이 저렸는지 몰라도 공격하는 바람에 그와 논쟁을 해야 했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제정 러시아에서 레닌이 민중주의자들(나로드니키)과 논쟁해야 했고, 남아공 사회주의자들이 지금까지도 민중주의자들인 아프리카민족회의-공산당-코사투노조관료 삼각동맹과 논쟁을 해야 하는 상황이 이해가 간다.

대체로 우리 단체는 엔간해서는 종파주의자들과 논쟁하지 않는다. 종파는 ― 소종파든 좀 덜 소규모인 종파든 ― 그 정의상 있으나 마나 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파는 흔히 기회주의적이기도 해서, 매우 중요한 몇몇 이슈들에서 때로 개혁주의자들의 입지를 강화해 주기도 한다. 가령 조직 노동자 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으므로 미조직 노동자와 더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아야 ‘고립’을 면할 수 있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민중주의자들의 개혁주의적 주장과 일치한다. 특히, 그의 ‘민중총궐기 평가와 2016년 전망’이라는 글에서 이 주장이 잘 드러난다:

“그런데 이런 개악[노동개악]을 막아낼 힘을 가진 조직 노동운동은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었다. 조직된 노동자와 나머지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를 만들어 온 지배자들이 이제 그것을 이용해 노동자들을 이간질했다. 조직된 노동운동의 현장 동력은 그동안 이런 공격을 저지하기에 충분치 못한 상황이었다. …

“정부의 탄압은 크게 두 가지를 노렸다. 먼저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이 고립을 넘어서 더 넓은 외연 확장을 이루지 못하도록 차단하려 했다. 더불어 기층 민중운동 단체들 사이에 다시 틈을 벌려서 분열을 일으키고 단결을 가로막으려 했다. ‘불법·폭력·종북’을 부각하며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이 민중진영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

“민중총궐기의 성과를 이어서 세월호 진실 규명, 교과서 국정화 반대, 일본군 ‘위안부’ 합의 폐기, 백남기 쾌유 기원과 책임자 처벌 등을 위한 투쟁들을 서로 연결, 결합시키고 힘을 모아서 더 큰 투쟁을 건설하려는 노력도 계속돼야 한다. …

“민중총궐기의 경험과 성과와 이번에 구성된 투쟁과 연대의 네트워크가 이어져야 한다. 진보진영이 공동의 요구를 중심으로 단결하며, 기층에서 주장하고 토론하며 더 광범한 대중을 견인하면서 투쟁을 건설해나간다는 방향을 중심축으로 삼고, 이에 따라 다양한 투쟁과 총선 등이 배치돼야지 그 역이 돼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이 단단히 유지되고 기층과 지역으로 더 깊숙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그러면서 노동자 민중 운동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키워 나가야 한다.”

그 글에서 노동계급과 특히 조직 노동계급의 역할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다. 그리고 노동자 연대보다 민중 연대가 선차적일뿐더러 더 중요하다.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도 꽤 중요한 세력으로 취급된다.

민중 연대는 단순한 전망이 아니라 전략으로 제시되고 있다. 전망과 달리 전략은 선택이고 계획이다. 전지윤은 민중총궐기를 둘러싼 제(諸) 민중단체 연석회의에서 혁명가들의 민주노총 총파업 주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는 불가피하지 않았으므로 선택이었고, 자민통계의 대안을 지지했으므로 혁명가들의 계획을 대신하는 계획이었다.

이에 전지윤은 내가 비판하는 그의 입장이 “[자신이] 그동안 써 온 글과 … 정반대의 태도”라며 마치 내가 허수아비 때리기를 했다는 듯이 주장한다. 그러나 그가 연석회의 석상에서 총파업 촉구를 거부한 것은 그 자신이 블로그 등에서 한 주장과 모순되기는커녕 오히려 그 논리적 귀결이다. 위 인용문(특히 그 앞부분)만 해도 노동자들의 파업 잠재력에 대한 그의 불신을 보여 준다. 또한 첫 민중총궐기 두 달 전부터 “민주노총 1,2차 파업은 … 동력의 아쉬움을 확인하는 과정”(2015.9.15)이라고 야박하게 또 일면적으로 평가했다. 무엇보다도 “파업 선언이나 노조 지도부에 대한 압박만으로는 파업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2016.2.4)고 쓴 것은 그가 총파업 촉구를 지지하지 않은 나름의 이유를 든 것이다.

한편 그는 내 반론 속의 일부 표현, 특히 민주노총에 총파업 촉구하는 것을 그가 “냉담”하게 “거절”했다는 문구를 문제 삼는다. 말꼬리 물고 늘어져 관심을 딴 데로 돌리는 속임수에도 대응해야겠다. ‘냉담’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대상에 흥미나 관심을 보이지 않음’이고, ‘거절’의 정의는 ‘요구, 제안, 선물, 부탁 따위를 받아들이지 않고 물리침’이다. 그가 민주노총 총파업에 흥미나 관심을 보였고, 사회주의자들의 민주노총 총파업 요구·제안을 받아들였나? 주어진 전략·전술 선택지 가운데 그가 한 대안적 선택, 대안적 계획이 본질적인 문제다.

전지윤이 분석의 일관성과 그에 기반한 실천을 지향한다면, 그리고 정말로 논쟁으로 생산적 결과를 얻기를 바란다면 자신이 한 말을 부인하기보다는 그 주장을 떳떳하게 밝히면서 논쟁해야 할 것이다.

전지윤이 빈말 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는 자기 지지자들의 흥분을 가라앉히고자 노동자연대의 운동 기여를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운동에 기여”한다는 것은 개입(단순한 선전·선동을 넘어선 실질적 개입을 말한다)의 능력과 개입 사실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개입 능력과 개입 사실이 모두 있는 단체의 ‘예측과 분석’이 전지윤 주장대로 틀렸다면, 그 영향은 우리 단체에 그치지 않고 노동자 운동 자체에 악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전지윤의 두 가지 말, 즉 우리 단체의 운동 기여론과 우리의 분석·예측 오류론은 서로 모순된다. 그래서 그가 가식적인 말을 하며 사람을 조종하려 한다는 불평을 그의 한때 지지자들이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지윤 자신의 ‘분석과 예측’을 살펴보자. 거리 항의가 크게 벌어지자 갑자기 자기의 ‘분석과 예측’이 옳았다는 도취감에 빠진 듯하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 거리 항의를 경원시했나? 세월호 참사 항의에 우리 단체는 관련 기구 공동집행위원장 자격으로 참가할 수 있었고, 우리 대학생 회원들도 매우 능동적이고 열성적으로 대학생 연합 시위를 공동 조직했다. 학생 회원들은 심지어 국정교과서 문제를 놓고도 ‘언론빨’을 탈 만큼 두드러졌다. 분파 활동 이래 ‘거리(street)’와 ‘파업(strike)’을 대립시킨 건 오히려 전지윤 자신이었다. 그는 철도 파업 건설에 실로 몰입을 해도 모자랄 만큼 역량과 습관(관성)과 적성이 치우쳐 있던 소속 단체의 막대기 구부리기를 방해했다. 탈퇴 이후로도 노동계급(특히 조직된)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쓰레기 분석들과 그런 상태를 장기적 추세로 성격 규정하는 해외의 쓰레기 이론들을 수집하는 데 열을 올렸다.

물론 공무원연금 투쟁은 끝났고, 패배했다. 그러나 전지윤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어떤 투쟁이 패배하면 그 투쟁에 가장 헌신적이고 열의 있게 뛰어든 좌파는 분석과 예측이 잘못됐다는 비판을 받아야 하나? 2008년 촛불 운동의 패배를 예측하지 못한 우리 단체의 분석은 잘못됐다고 비판받을 일이었던가? 2000년대 중엽 반전 운동이 노무현의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했다고 해서 반전 운동에 의욕적이었던 우리 같은 단체들은 운동이 ‘패배’했고 우리의 ‘예측’이 잘못됐다고 평가해야 했나?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은 패배했나? 그리고 우리의 분석과 예측은 어땠나?

이런 식의 물음 자체가 천박하다.(그리고 실증주의적 사고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난해에 한정해 말하자면, 좌파라면 아쉬움이 전혀 없을 수 없다. 수감중인 한상균 위원장과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조차 아쉬움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노동개혁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예측과 분석을 얘기하는 것 자체가 조금치도 사리에 맞지 않는다.

2016년 3월 22일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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