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주의 논쟁(Ⅰ):
마르크스주의 핵심 원칙, 꿰어 맞추기와 절충으로 누더기가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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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에서 나는 ‘민중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썼다: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이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은 이렇게 주장한다:
“‘공무원연금 개악 등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줄어든 동력, 사회적 고립, 정파적 사분오열, 산업과 기업에 따른 부문주의는 거듭 드러났다. ‘노조 지도부가 국회 일정에 매달리며 계속 파업을 미루면서 동력이 사라졌다’는 좌파의 전통적 비판도 한상균 지도부의 1, 2차 선제파업을 거치면서 근거가 희미해졌다. … 파업의 동력이 충분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계속 회피하며 그것을 사그라들게 만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 민주노총의 부족한 동력과 사회적 고립을 볼 때 이 투쟁[민주노총 총파업]은 처음부터 승산이 높지 않았다.’
“오히려 민중총궐기로 ‘저들[지배자들]이 결코 ‘진보당’으로 상징되는 저항운동의 뿌리를 제거하지 못했고, 여전히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2차 민중총궐기를 위한 토론에서도 민중주의자들은 ‘살인 진압 규탄과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해 민주세력을 모아 내는 외연 확대를 기조로 범국민대회로 열자’고 주장했다. 그들은 특히 ‘노동개혁’ 반대를 부각시키면 시민단체와 종교계 등의 참가가 어렵다며 민주노총에 기조 변경을 강력히(그러나 헛되이) 요구했다.
“[중략]
“〈노동자 연대〉 신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민중주의의 일정한 진보성을 인정하면서도, 위에서 인용한 논평가처럼 기회주의적으로 그에 끌리지 말고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좌파적인 전망에 헌신해야 할 것이다.”
위 인용문에서 재인용된 논평가(이하 전지윤)가 필자와 노동자연대 단체 자체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위 인용문을 쓰던 때 내가 그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한때 같은 단체에 있었던 사람들끼리 언쟁한다는 인상을 독자들에게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쓰라린 심정이 묻어나는 볼멘소리까지 하면서 실명 인용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을 했으므로(링크) 실명 토론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전지윤은 2년 전 우리 단체를 탈퇴하던 때부터 견지해 오던 정세 인식을 본질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논쟁 때 내가 그에게 제기했던 문제들도 고스란히 그대로다. 그 문제들은 전지윤이 과거와 현재의 한국 노동운동을 이렇게 대조할 때 잘 드러난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한 절정이었던 97년 노동법 개악 반대 파업은 사실 안기부법 개악 반대 파업이기도 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는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를 통해서 노동계급의 눈귀를 막고 손발을 묶어서 밥그릇을 빼앗으려 했다. 당시 조직 노동운동은 전체 노동계급을 위해 이런 공격에 맞설 자신감과 투쟁력을 보여 줬다.
“하지만 지금 조직 노동운동은 노동개악 법안을 가까스로 막고 있는 처지이며, 테러방지법 통과는 막지 못한 상황이다. 굴복으로 마무리될 게 뻔한 민주당의 ‘무제한 토론’을 쳐다보는 우리의 가슴은 갑갑하기만 했다.
“조직 노동자들의 경제적 조건과 요구가 중요하고 우선이라는 협소한 관점을 넘어서야 한다. 이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든 모순과 부조리, 불의에 맞서서 부문을 넘어선 전체 노동계급이 ‘무제한 투쟁’을 벌이는 미래를 향한 우리의 꿈은 꺾일 수 없을 것이다.”
위 인용문과 관련해서만도 적어도 다섯 가지 쟁점이 제기될 수 있다. 첫째, 1996~97년 민주노총 전면파업에 참가한 노조 지도자들과 평조합원들이 정말로 진지하게 안기부법 개악도 반대했다면 내가 그때나 지금이나 민중주의 문제를 갖고 고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 나라 노동자들은 머리 왼쪽으로는 전투적 노동조합 운동 사상을 갖고 있고, 머리 오른쪽으로는 민중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나는 이게 극복 불가능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서구 노동자들도 머리 왼쪽은 먹고 사는 문제들에 관한 생각으로 차 있고, 오른쪽은 사회민주주의(요즘은 좌파적 사회민주주의) 정치인들의 사회개혁 이슈들로 차 있다. 내 생각에 정치와 경제의 분리로 불리는 이 현상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관련 있는 듯하다.
둘째, 한국 노동자들의 민중주의 정치가 서구 노동자들의 사회민주주의 정치보다 좀 더 좌파적이고 투쟁적이라는 점이다. 전지윤은 이 나라의 노동계급과 그 운동의 상황에 맞지도 않는 일부 신(新)마르크스주의 이론들을 절충해,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계급을 조직 노동계급으로 환원하는 문제점을 지녔다는 둥 노동계급을 생산 과정에 현재 포함된 부분만으로 보았다는 둥 하는 주장을 한다. 이 글은 그런 ‘최신’ 유행을 놓고 토론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지금 여기’의 경험들에 관해 내가 아래에서 논술하는 바만으로도 전지윤의 주장이 현실과 실천 모두에 부합하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는 위 인용문의 전지윤 주장과 달리 20년 전의 한국 노동자들에 비해 지금의 한국 노동자들이 약화됐다거나 “사회적 고립”에 직면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전지윤의 관찰은 단순한 인상에 불과하다. 백보 양보해 이 인상이 정확한 것이라손 쳐도, 영국 전교조(NUT) 조합원이자 사회주의노동자당(이하 SWP) 중앙위원이었던 고(故) 던컨 핼러스가 종파주의를 경계하며 한 말이 적절한 충고일 것이다. “작업장 투쟁이 아주 침체된 퇴조기에조차 노동조합에 전혀 개입하지 않고 수수방관하는 것은 종파적 태도이다. 투쟁이 가장 침체된 시점에서도 노동조합은 계급투쟁과 미약하나마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점에서 [개혁주의 정당들]은 그 상대도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해당 노조 지도자들이 온건하다 못해 보수 수구적이라 할지라도 이것은 여전히 참말이다.
넷째, 나는 안기부법에 반대하는 것은 정치적이고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것은 “경제적 조건과 요구”를 둘러싼 투쟁(경제투쟁 또는 산업투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노동개혁을 강요하는 것이 정부라는 점에서도, 또 노동자들이 싸워야 하는 대상이 정부와 집권 여당과 의회 기구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리고 이 저항이 성공하려면 노동자들이 계급 전체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개혁 반대 투쟁은 정치투쟁이다.
다섯째, 전지윤의 꿈인 “부문을 넘어선 전체 노동계급이 ‘무제한 투쟁’을 벌이는 미래”는 우리의 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은 혁명적이거나 어느 정도 혁명적인 상황이다. 그런 상황이 시작되는 것은 노동계급의 일부분이나 다른 천대받는 사람들의 일부분에서다. 이를 건너뛰고 통속적 의미의 ‘정치적’ 요구와 ‘정치투쟁’을 물신화하는 것은 초좌파적 선전종파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한국 노동계급의 상태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전망
이런 물음들을 염두에 두고 전지윤의 정세관을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박근혜 정부의 ‘종북’ 마녀사냥과 진보당 탄압 때문에 노동계급은 자력으로는 전진할 수 없다. 특히 조직 노동자들은 “사회적 고립”을 면치 못하고 있다.(그는 “조직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고립돼 있다”고 여러 글에서 강조한다.) 그런데도 우리 단체는 “노동계급의 귀환”을 “10년 가까이”[i] 마치 메시아 기다리듯이 헛되이 학수고대해 왔다고 한다. 전지윤은 이 상황을 돌파하려면 서로 연계된 두 가지 운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노동자뿐 아니라 광범한 민중이 대중적 민주주의 운동을 일으켜야 하고, 다른 하나는 민중연합당을 엄호해 진보정당을 재건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주도력(헤게모니)을 말하는 건 비현실적이다. 특히 이 지점에서 그가 “민중주의에 끌리”게 된다.
먼저,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와 근래 20년간의 사회운동 속에서 농민이 상당한 구실을 하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 자체가 우리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농민에 대한 자민통계의 민중주의적 개념은 그 조류 출신자인 민경우 씨가 날카롭게 비판한 바 있다.) 빈민도 한국 사회 계급 구조 속에서 소수이고, 그나마 그들의 적지 않은 부분은 노동계급에 속하거나 이와 뒤섞인다. 아무튼 지난호 기사에서 나는 노동계급이 중간계급을 적대해선 안 되지만, 계급간 구분을 흐려 버려서는 안 되고, 그들의 모호한 민중주의 정치에 이끌려서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전지윤은 지배계급의 일부와 동맹하는 것만 민중주의이지, 중간계급(들)과 동맹하는 건 민중주의가 아닌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민중주의의 핵심은 도시와 농촌의 중간계급(과의 동맹)이다.
노동계급은 실은 이미 귀환했다. 도대체 박근혜 취임 이래 지난 3년간 가장 치열하게 싸운 게 민중 가운데 누군가? 농민인가, 빈민인가? 물론 2013년 중엽에는 청·장년들도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에 항의하며 싸웠고, 2014년과 2015년의 중엽에는 청년·학생들도 세월호 참사에 항의했다. 하지만 박근혜의 공격이 집중됐고, 가시적 성과 면에서는 방어에 실패했지만 줄곧 치열하게 저항한 건 노동계급, 특히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었다: 전교조, 철도, 케이블통신, 삼성전자서비스, 택배, 건설, 조선, 공무원, 공공, 보건, 홈플러스 등등.
무엇보다 민중총궐기는 본질적으로는 노동자 투쟁이었다. 여기서 잠깐 내 기사를 인용하고자 한다. 전지윤이 내가 민중주의와 민중총궐기를 평가절하한 것으로 오해하는 듯해서다. 아래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는 민중총궐기를 노동자들의 자신감이 부분 회복되는 징후로 보았다.
“[민중주의는] 노동계급 의식 발전의 초보적 국면을 나타낸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지난 몇 달 새 벌어진 민중총궐기는 박근혜 하에서 노동계급과 민중이 자신감 수준을 회복하기 시작했다는 좋은 징조로 볼 수 있다. 아직은 그 수준이 파업 투쟁으로 자본주의 이윤 자체를 공격할 의지 수준으로는 상승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동시에,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소심함 때문에 파업 투쟁의 대용품으로 가두 항의가 활용됐다는 한계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이 모순을 봐야 한다. 전자를 보지 못하고 후자만 본다면 노동운동이 침체하고 있다는 그릇된 인상을 얻을 것이다. 후자를 보지 못하고 전자만 본다면 민중주의(그리고 그 계급 협력주의의 논리적 귀결인 개혁주의)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놓일 것이다.”
민중총궐기의 압도적 주력부대가 노동자였다. 사회적 구성 면에서 민중총궐기는 노동자 운동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주노총이 조직했다. 매년 11월 13일 직전에 열리는 전국노동자대회를 민중총궐기 형식으로 치러 약간의 농민과 빈민이 좀 더 붙은 것이다. 청년·학생과 진보·좌파 단체 회원 등은 언제나 노동자 집회에 동참해 왔다. 2차, 3차, 4차 민중총궐기의 구성도 압도적으로 조직 노동자들이었고, 이 점에서 이 운동들도 사실상 노동조합이 동원한 것이다. 총궐기의 요구들을 보아도 대부분(전부는 아니다) 노동계급의 요구로, 이 점에서도 궐기는 노동계급적이었다.
민중총궐기들은 또한 노동자들의 앞선 활동과 무관하지 않았다. 산업 현장에서의 선동과 썩 흡족하지는 못했어도 크고 작은 여러 노조들의 파업들이 누적돼 온 결과가 노동자대회를 계기로 거리 항의로 나타났다고 봐야 한다. 노조 지도자들이 파업 소명에는 부담을 느꼈어도 거리 항의로 소명하는 데는 그래도 용기를 보였는데, 이에 조합원들도 파업보다는 좀 덜 부담감을 느끼며 응답한 것으로 봐야 한다.
마치 우리 단체가 이 일련의 민중총궐기들을 평가절하하기라도 한 양 오해한 채, 전지윤은 민중총궐기야말로 박근혜의 ‘노동개혁’ 공세를 막고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당연한 말이다. 기본적으로 ‘민중’이 아니라 노동자들(특히 조직된)의 운동이었던 덕분이다. 하지만 그랬기에 2차 궐기부터는 급속히 규모가 줄었다. 정부의 탄압도 한몫하긴 했지만, 그보다는 ‘노동개혁’ 법안들이 총선 전 국회에서 통과되기 어려울 것 같다는 관측 때문이었다. 그리고 총선을 의식한 여야 정치인들의 몸 사림도 고려해야 하고, 공천을 둘러싸고 육두문자가 오가는 집권당의 분열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한편, 전지윤이 자민통계가 다 조직한 것처럼 착각하는 총궐기 운동이 왜 테러방지법은 막지 못했을까? 특히 자민통계가 우려할 만한 쟁점인데도 말이다.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노동개악에 집중됐기에 테러방지법은 안타깝게도 결국 통과됐던 것이다. 그리고 훨씬 더 폭넓고 대규모로 민중의 지지를 받았던 세월호 참사 항의가 당면 목표 성취에 미달하며 좌절을 겪어 온 이유도 비슷하다. 곧, 한국 같은 제3세계 출신 신흥국의 조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이슈가 아닌 경우에는 흔히 민중주의자들이 지도하도록 맡겨 놓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난호 기사에서 이 점을 지적했는데, 이것이 내가 민중주의에 관해 그 기사를 쓴 이유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뉴욕 타임스〉 같은 세계 유수의 자본가 언론들의 보도를 보아도 시사적이다. 그들은 1차 민중총궐기가 크게 일어났을 때 “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시위”라며 우려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한편, 세월호 참사에 관해서는 항의 운동보다는 참사 자체와 정부의 구조 난맥상과 실책들에 초점을 맞추어 보도했다.
민중총궐기 얘기가 나온 김에 집회 준비 과정에서 전지윤이 보인 실천 자체를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사회주의자인 우리는 노동자들의 가두 항의 운동인 민중총궐기를 지지하면서 그것이 자본가들의 이윤에 타격을 가하는 파업이라는 투쟁 형태와 결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에 따른 시너지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우리는 노동자들의 거리 항의를 당연히 지지하는 한편, 그것이 대중 파업과 결합되기를 염원했다. 이게 애써 반대 받을 일인가? 역사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Street’(가두 시위)와 ‘Strike’(파업)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사 후자의 가능성이 크지 않은 상황에서도 혁명가라면 파업 찬반 논쟁에서 애써 반대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지 않을진대, 당시는 노동개악 반대를 위해 파업할 태세가 돼 있다고 노조 지도자들이 각종 집회 연단에서 공언을 한 상황이었다.
‘변혁’주의자를 자처함에도 어처구니없게 전지윤은 노조 지도자들에게 파업 촉구하는 것을 아예 반대했다. 조직 노동운동이 “사회적 고립”을 겪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소위 “[조직 노동자 운동의] 사회적 고립” 명제는 전지윤의 여러 글에서 되풀이되는 주제이지만, 그 자신이 참석한 총궐기 준비 회의에서 벌어진 논쟁 속에서, 특히 2차 총궐기 기조와 개최 방식을 두고 벌어졌던 논쟁 속에서 그 수동적·추수적(追隨: 꽁무니 좇기) 본질이 가장 잘 드러났다. 일부 자민통계 참석자들은 2차 총궐기의 명칭과 기조를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총궐기라는 명칭 대신에 범국민대회나 백남기 농민 살인진압으로 명칭을 바꿔 민주주의적 쟁점을 부각시키자는 것이었고, 그에 따라 대회 기조도 변경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에 노동자연대 측은 집회 명칭을 변경해야 할 불가피성을 인정한다 해도 집회 기조에 노동개악 문제가 핵심적으로 포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핵심 주최 측인 민주노총이 12월 5일로 2차 민중총궐기를 잡은 것도 그때쯤 노동개악 법안의 국회 통과와 그에 반대한 파업을 염두에 둔 계획이므로 사회단체들은 그것을 지지하고 엄호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전지윤은 시민들이 폭넓게 참가할 수 있도록 집회의 명칭을 변경하고 노동 문제보다는 민주주의 문제를 부각시켜 집회 기조를 톤다운 시키자는 일부 자민통계의 주장에 동의했다. 노동자 요구와 투쟁을 앞세우는 것이 별 도움이 안 되고 어차피 민주노총 총파업은 가능하지도 않다고도 덧붙였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이 계획돼 있고 노동개악이 본궤도에 오를 수도 있는 상황에서 내놓은 이런 제안이 민중주의적이 아니면 무엇인가?
민주노총 측은 노동개악 문제를 부차화하자는 일부 자민통계의 주장을 선뜻 지지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논쟁에 끼어들지도 않았다. 결국 논쟁이 이어지면서 결론이 나지 않자 추후 공동집행위원장 회의에서 다시 논의하자고 했다. 이후 열린 공동집행위원장 회의에서 자민통계는 대다수 참석자들에게 용인될 만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1부 집회 총궐기대회, 2부 집회 범국민대회’라는 안이었다.
1차 민중총궐기 후인 2015년 11월 27일 전지윤은 그의 블로그에서 이렇게 논평했다:
“1차 총궐기는 오랜 분열과 갈등을 넘어서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주요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을 성공시켰고, 이를 바탕으로 외연 확장의 가능성까지 보여 줬다. 이것이 계속 확대·발전한다면 박근혜 정부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은 분명하다. … 그래서 집요하게 ‘불법·폭력·종북’을 부각하며 시민사회 진영과 중간층이 민중진영과 거리를 두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다.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먼저 노동·농민·빈민 대중조직과 사회운동단체들의 결집이 단단히 유지되고 기층과 지역으로 더 깊숙이 뻗어나가는 것이다. … 민중운동 진영을 시민사회 진영, 중간층과 분리·고립시키려는 노림수를 잊지 말아야 한다. … 이런 방향[민중의 단결]을 가장 효과적으로 실현한다는 틀 속에서 ‘2차 총궐기의 기조로 평화집회를 내세울 것이냐 말 것이냐, 민중총궐기인가 시민대행진인가’가 고민돼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의 노동자 파업 촉구를 지지하기를 냉담하게 거절할 만큼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불신하는 전지윤의 정세 인식에서는 자연히 계급이 해체되고 계급 동맹인 ‘민중’이 매우 중요해진다. 특히, 민중총궐기 전후로 보여 준 그의 실천이 민중주의가 아니면 뭔가.
‘무슨 무슨 주의’라는 말을 남발하지 말라고 그가 내게 또 쏘아붙이겠지만 그에게 반문하고 싶다. 전지윤은 사람들이 그를 아무리 자주 ‘마르크스주의자’, ‘(개혁주의자가 아닌) 변혁주의자’라고 불러도 반발하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문재인을 자유주의자라고 불러도 그에게 이의 제기를 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예는 무수히 많을 것이다. 즉, ‘무슨 무슨 주의’ 하지 말라고 할 때는 실은 라벨 붙이기 자체보다는 자기가 느끼기에 부정적 어감을 지닌 특정 라벨이 동의하기 어렵게 붙여지는 것에 반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라는 말 좀 하지 말라고 요구하기보다 그 용어가 특정 대상에게 정확하게 적용된 것인지를 따지는 게 토론에 도움이 된다. 가령 전지윤은 자기가 “결코 ‘공무원연금 개악을 수용하고, 민주노총 총파업에 반대하며, 민주당과 전략적 야권연대 등 계급협력을 추진하자’는 입장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그는 순도 백 퍼센트 민중주의자가 아니다. 그래서 위 인용문에서 보듯이, 나는 그를 조심스럽게 “이들[민주노총 내 민중주의자들]의 생각을 잘 대변한 한 민중주의적 논평”을 한 사람, 또 “기회주의적으로 그[민중주의]에 끌리”고 있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특히 문맥과 맥락을 고려해 읽어 보면, 2차 민중총궐기를 앞두고 벌어진 민주노총 총파업 가능성/필요성 논쟁에서 그가 일부 자민통계(특히 민중연합당계)와 공조했던 사실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진보정당들에 대한 차별화된 편견
전지윤은 우리가 정의당에는 우호적인 데 반해 민중연합당에는 별로 우호적이지 않다고 비판한다. 또한 내가 노동자 운동이 우리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투쟁 수위를 보여 주지 못하는 원인을 자민통계의 민중주의 탓으로 돌린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나는 자민통계만이 민중주의적이라고 하지 않았고, 자민통계만이 민주노총에 파업 촉구하기를 거절했다고 하지 않았다:
“한국 민중주의의 대표적 사례는 ‘자민통’ 계열(이하 자민통계), 참여연대 등 진보적 NGO들 그리고 정의당 등이다. … 민주노총 내 국민파·전국회의·중앙파 등도 민중주의적 경향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민중주의적 경향을 띤다. … 자민통계뿐 아니라 국민파, 중앙파 간부들도 이제 ‘사회적 고립 자초할 총파업 얘기 그만하고 국민적 지지를 받을’ 싸움을 하자며 민중총궐기를 강력히 제안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우리는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모두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제공하는 입장이다. 둘 다 개혁주의 전략을 추구하고 있지만,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핵심 기반으로 삼는 진보·좌파 정당들이기 때문이다. 물론 둘은 사회적 기반이 조금 다르다. 정의당은 추가적으로 진보·좌파 지식인 기반도 있다.
한편 민중연합당은 장차 중소 자본가 계급 소수의 지지와 북한 관료의 (미온적) 지지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으로선 자민통계가 국가 탄압을 받고 있으므로 그 계파들은 대부분 중소 자본가 계급 일부의 지지를 얻기 어려울 것이다. 자민통계가 또한 지금 단일 정당을 건설하지 못했으므로, 민중연합당은 북한 관료의 확실한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 국가가 존속하고 자민통계의 역사적 전통이 폐기되지 않는 한, 자민통계가 북한 통치자들의 지지를 받길 원한다는 점과 남한 자본가 계급 일부와 동맹한다는 전략을 추구한다는 점에는 변함이 있을 수 없다. 전통은 그것이 확립된 역사적 조건이 크게 바뀌지 않는 한 쉽게 폐기되지 않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공공연한 동성애자에게 주교 서품을 주는 것으로 전통이 바뀌려면 아마 기존 사회의 전면 변혁이 요구될 것이다.
전지윤은 자민통계가 혹심한 탄압을 받고 있는데 무슨 계급 연합이냐고 반문한다. 하지만 민중전선(민중주의의 최고 형태)은 공산당이 ‘부르주아’(드러내놓고 자본주의를 수호하는) 정당과 전략적 동맹을 하는 것으로, 해당 부르주아 정당이 실제로 부르주아지에 기반을 뒀느냐는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또, 공산당이 정식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하느냐 여부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1936년 스페인 민중전선 정부의 등장 과정에서 공산당이 급진당(당명과 달리 자유주의적 친자본주의 정당이었다)과 동맹 맺은 것을 비판하면서 트로츠키는 급진당이 “스페인 부르주아지의 그림자”라고 표현했다. 스페인 부르주아지가 당시 스페인 사회에선 중간계급이었던 데다 매우 약체인 계급이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 공산당은 프랑스 민중전선 정부에 정식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민중전선 정부와 그 구성 정당들에 의해 동참 세력으로 대우받았고, 자신도 그렇게 처신해야 했다.
트로츠키는 또한 러시아 혁명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설사 러시아에 부르주아지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해도 멘셰비키는 부르주아지를 “창조해 냈을 것”이라고 재치 있게 멘셰비키의 계급 협력주의를 비꼰 적이 있다.
우리가 정의당과 민중연합당 또는 더 일반으로 자민통계를 차별한다는 전지윤의 비판은 근거 없는 주장이다. 우리 신문 기사 가운데는 정의당의 핵심 리더들인 노회찬·심상정과 그 당의 주요 정치인들인 김종대 씨와 조성주 씨에게 매우 비판적인 글들이 포함돼 있다. 물론 정의당에 입당한 양경규 전 공공연맹 위원장 등 노동정치연대 소속 친노동운동가들에게는 우리가 더 우호적인 경향이 있는 게 사실이다. 좌파 노동단체가 정의당의 상이한 계파에 대해 이런 상대적 친화성(무비판적인 건 아니다)을 드러내는 게 무슨 문제인가?
물론 전지윤의 불만처럼, 우리가 민중연합당에 특별히 우호적이지는 않다. 자민통계가 민중연합당의 창건 문제를 놓고 의견이 첨예하게 대립했고, 따라서 민중연합당이 진보당의 후신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괜시리 나머지 자민통계 계파들에 오해나 반감을 주지 않겠다는 배려도 있다. 물론 전지윤의 관측대로 우리는 2012년 진보당 내 경선에서 당권파의 부정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전지윤은 여전히 당권파의 경선 부정은 없었다는 확증 편향을 갖고 있지만 이 문제로 그와 다시 논쟁하는 건 아무 독자에게도 도움이 될 성싶지 않다. 혹시 궁금한 사람이 있다면, 2013년 1월 초 노동변호사인 노동자연대 회원이 패널 자격으로 연단에 선 전(全) 회원 토론회에서 전지윤의 주장을 “믿음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르며 반증을 제기한 발제문을 이 신문 웹사이트에서 찾아 읽어 볼 수 있다(링크).
어쨌든 우리가 정의당보다 자민통계를 경원시한다는 전지윤의 주장은 참말이 아니다. 자민통계의 리더급 인사 J모 동지와 H모 원로는 우리가 소위 NL-PD 갈등과 정파간 갈등에 최대한 공정하려 애쓴다고 인정한 바 있다. 우리는 지난해 9월 이 신문을 통해 자민통계도 포함되는 일종의 선거용 진보·좌파 빅텐트를 공개 제안했고, 그 뒤 자민통계 리더급 인사들이 우리와의 면담을 요청해 우리측 담당자가 그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고, 그 직후 민주노총도 이와 비슷한 선거연합정당 안(案)을 진보·좌파 정치조직들에 제안했다.(아쉽게도 민주노총의 제안 시점은 다소 뒤늦은 편이어서, 이미 선거 준비에 들어간 주요 정당들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 울산 북구와 동구의 예비경선에서도 우리는 북구의 경우 자민통계 후보를, 동구의 경우에는 노동당 후보인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응원했다.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전지윤이야말로 편견(편향)을 갖고 있다. 정의당에 대해서는 비판 일변도이고, 민중연합당에 대해서는 아첨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태도 말이다. 혹시 이런 편향된 시각에서 보면 우리 단체가 정의당에는 친화적인 반면 민중연합당에는 부정적이라고 인지될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런 편향은 위에서 다룬 그의 정세 인식(진보당 재건 안 되면 노동운동의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다는)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이와 달리, 기본적으로 진보·좌파 성향 단체나 운동, 개인에 대한 우리의 판단은 다음과 같다. 첫째, 말보다는 실천이 우선 고려돼야 한다. 둘째, 사안에 따라 다르다(따라서 전술적이다). 우리를 포함해 어느 한 단체나 개인, 운동이 언제나 올바른 입장을 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종파주의를 피하기 위해서다.
공무원연금 투쟁에 대한 추상적 선전종파주의
전지윤은 공무원연금도 지켜야 했고 공적연금 강화도 지지했어야 한다고 절충적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체적 맥락 속에서 문제를 볼 줄 알아야 한다. 레닌이 좋아한 헤겔 말대로 “진리는 구체적이다.” 공적연금 강화가 집회 슬로건으로서 강요됐을 때 그에 불가피하게 타협해야 했지만, 전술은 슬로건과 다르다. 공적연금 강화로 나아가기 전에 먼저 박근혜 정부의 공무원연금 공격부터 좌절시켜야 했다. 당장에 공격이 들어오고 있는 판에 그것을 반대하고 막을 생각은 중요하지 않은 양 일축하고 둘 다 필요하고 중요하다는 식은 개혁주의 노조 지도자들로 하여금 곤경을 면하게 해 줄 뿐이다. 공무원연금 방어 문제가 이슈인 지난해 봄 상황에서 공적연금 운운한 것은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연막이었을 뿐이다. 어떻게 좌파적 공무원 조합원들이 이충재의 책략과 이충재 등 개혁주의 관료의 영향력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돕느냐가 중요했다.
공무원노조원인 전지윤 그룹 회원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초기인 2014년에 쓴 두 기사에서 공무원연금 문제를 놓고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문제와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추상적으로는 옳은 주장이었을지 몰라도, 정부가 공무원연금 개악을 통해 공적연금과 공공부문에 대한 전반적 공격으로 나아가려 하고 있으므로 당면 전술은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여야 했다. 글의 논조는 국민연금, 기초연금 문제를 결합시키지 않으면 공무원연금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당면한 공무원연금 삭감 공격을 막아야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전반에 대한 개선 논의도 훨씬 쉬워질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노동자연대가 발의했던 ‘대타협기구 탈퇴와 민주노총 총파업 일정에 동참하기’ 연서명, ‘이충재 사퇴’ 연서명 등 여러 연서명에 참가하지도, 호응해 주지도 않았다. 공무원노조 좌파에 속한 활동가들은 대체로 이 연서명에 호응했던 것에 비춰 보면, 공무원노조원으로서 그 회원이 진지하게 연금 방어와 이충재 반대를 했다고 하기는 힘들 것 같다.
전지윤도 2014년 12월부터 2015년 5월까지, 특히 지난해 4월 24일 민주노총 파업부터 5월까지 투쟁이 한창이던 때 공무원연금 투쟁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 시기는 전교조 연가 투쟁과 이충재 공무원노조 집행부의 배신이 교차한 결정적 시기였는데도 말이다. 겨우 하나 발견할 수 있는 글로 전지윤 자신이 쓴 짧은 기사가 있다. 거기서 그는 대타협기구 탈퇴 촉구가 부질없는 짓인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노동운동 내 좌파들도 주로 ‘지도부는 협상테이블에서 나오라’는 비판에 주력했지, 다른 방향과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6월 8일에 쓴 글은 투쟁을 돌아보는 논평 글인데, 거기서 전지윤은 “현장에서 잘 싸우기 위해서도 대안과 방향이 분명해야 하고 우호적 여론과 연대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의 공적연금 지출과 사회임금 비중을 대폭 늘리기 위한 투쟁이 건설되면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가 그 투쟁의 일부가 됐다면.” 하고 아쉬워한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전지윤의 추상적 선전을 앞세운 종파주의가 잘 드러난다. 그가 다루는 상황은 진보·좌파 정당이나 급진좌파 연합이 각각 당 강령이나 행동강령 작성을 놓고 토론하는 것과 같은 상황이 아니다. 업종별이나 산업별로 조직되는 노동조합과 정치적 견해를 기초로 하는 정당은 질적으로 다르다. 노동조합, 그것도 그 한 부분이 자기에게 고유한 쟁점(공무원연금 삭감 위험)을 놓고 적들의 집중포화를 받는, 실로 눈앞에 닥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상적인 강령(공적연금과 사회임금 인상 요구와 결합되는)에 비추어 보자면 현 공무원노조 좌파 활동가들의 연금 삭감 반대는 “우호적 여론과 연대”를 얻기 어렵다’는 식의 회색주의자 같은 태도는 추상적 종파주의의 발로일 뿐이다. 종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구체적인 투쟁에는 관여하지 — 그렇게 하는 것이 아무리 어렵다 해도 — 않으면서, 이상론적이어서 추상적인 아이디어를 대안으로 제시하는 데 여념이 없다.”(던컨 핼러스) 또, 트로츠키는 이렇게 지적했다. “마르크스주의 서클로 존재하는 동안 노동자 운동에 대해 추상적으로 접근하는 습성을 몸에 익히고, 체질화한 행동반경을 시간이 지나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는 종파주의자로 고착된다. 그들은 세계를 자기가 선생으로 있는 커다란 학교로 여긴다.”
전지윤이 다양한 반(反)SWP 이론을 갖다 쓰고 있으므로 나도 전지윤과 비슷한 입장을 취한 영국 종파주의자들의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2011년 11월 2백50만 명이 참가한 사상 최대의 공공부문 파업이 벌어졌다. 그 핵심 요구는 공공부문 노동자 연금 삭감 반대였다. 그때 일부 좌파는 그 투쟁이 ‘공공부문 노동자들만의 경제주의적·부문적 요구를 내놓아, 긴축재정 전체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보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파업 건설에 거리를 뒀다. 그들의 영향력은 전무했다. 전지윤 그룹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지난해 4월 말과 5월, 전지윤측 블로그의 글들은 공무원연금 방어 투쟁 대신에 세월호 참사 문제에 집중됐다. 물론 세월호 참사 항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우리 단체 자체뿐 아니라 대다수 학생 회원들도 학업 등 만사를 제쳐 두고 그 운동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전지윤이 이 문제에 견줘 공무원 투쟁의 비중을 낮춰 잡은 건 그가 전술 문제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뿐 아니라 조직 노동자 투쟁에는 큰 의욕을 보이지 않는 것의 반영인 듯하다. 심지어 패배가 뻔할 것 같은 투쟁이라고 해도 거기에 뛰어들어 동료들과 전투를 함께 하는 것이 노동운동의 전략에 도움이 되는 경우가 꽤 있다.(전술과 전략의 관계는 기계적이지 않다.) 치열한 전투는 곁에 비켜서서 구경한 후, 나중에 논평이나 하는 태도는 수동성과 대중 추수의 표현일 뿐이다.
전지윤은 나 또는 우리 단체가 최저임금 문제를 무시한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데, 김하영 동지가 그의 글에서 분명히 밝힌 바대로 우리는 그 요구를 분명히 지지했(한)다. 이 경우에도 문제는 구체적 맥락이다. 지난해 내내 민주노총 내 민중주의자들은 ‘공무원연금 지키는 문제보다 최저임금 1만 원이 광범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다’, ‘최저임금 인상 문제로 연석회의를 여니 순식간에 시민사회단체 2백여 곳이 서명을 했다’, ‘노동개악 반대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부각시켜야 “대중적” 지지를 얻는다’ 등등의 민중주의적 주장을 공공연히 펴고 있었다.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을 비롯한 민주노총 좌파들도 이런 생각을 공유하거나 아니면 그에 타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압도적이고 주된 부문들이 공공과 민간의 대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일진대, 이들이 당장 자신들을 겨눈 박근혜와 사용자들의 칼날에 저항해야, 이들보다 빈약하게 조직됐거나 아예 조직되지 못한 노동자들도 그 저항에 고무돼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런 현 시기 계급 의식의 불균등성을 고려하지 않고 전지윤처럼 하나마나 한 소리, 곧 “단결 투쟁을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 모두의 조건을 개선하자”는 것은 비정규직 폐지 투쟁 또는 비정규직 차별 폐지 투쟁들의 전술 목표이지, 그 전술 목표 달성을 위한 수단은 아닌 것이다.
전지윤이 잘못된 양자택일을 피하려 하는 점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노력이 변증법에 못 미치면 중도(中道)를 걷는 것으로 끝나게 될 것이다. 개혁과 혁명이 둘 다 필요하다는 당연한 주장은 개혁주의자와 날카롭게 논쟁할 때엔 쓸모없는 공문구가 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란 그 정의상 혁명의 가능성 그리고/또는 필요성을 부정하는 사상이기 때문이다. 1890년대에 이런 사상의 유명한 대변자 베른슈타인과 논쟁한 로자 룩셈부르크는 ‘개혁이냐 혁명이냐’ 하고 첨예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와 비슷하게도, 혁명적 상황에서 아래로부터 노동자 권력이 생성되고 있을 경우, 총선이나 새 의회 같은 개혁 조처들이 때로 혁명적 세력을 고립시키기 위한 지배자들의 책략으로 제안될 수도 있다. 이때 둘 다 의미 있다는 식은 중간주의적 두길보기일 뿐이다.
관조적·추수적 ‘분석과 예측’
전지윤은 지도부든 현장조합원이든, 어느 연맹 위원장이든 아무도 투쟁성을 발휘하지 않았는데, 왜 특히 자주파와 한상균 지도부 탓을 하냐고 우리에게 반문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다. 우리는 온건한 지도자들을 더 비판했고, 한상균 지도부에 대해 종종 다룬 것은 전지윤과 달리 우리가 한상균 지도부를 함께 배출한 다른 민주노총 좌파들과 토론했기 때문이다. 그들과 나눈 대화들이 신문 지면의 주요 소재였다. 왜 좌파들의 정치가 쟁점이었나? 대체로 민주노총 좌파들은 민중주의자들이 개혁주의적 노조 지도자들의 파업 회피를 비호하는 문제를 회피했다. 좀 더 급진적인 좌파들도 노조 지도자들을 압박하는 문제를 회피한 채(쓸데없는 일이라고 보아), ‘아래로부터의 총파업’ 촉발 시도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타깝게도 좌파는 정치적 경쟁자들의 핵심적 약점을 극복할 수 없었다. 경쟁자들이 민중주의적 논리를 앞세워 부담스런 파업 투쟁 방식을 극구 회피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도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트로츠키가 1930년대 초 히틀러의 집권 위험이 넘실거리던 독일에서 사회민주당과 공산당 가운데 공산당에 호소해야 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는 나치의 등장을 막으려면 공산당이 초좌파적 종파주의 노선을 버리고 공동전선 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럴 가망성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의 당시 글을 읽다 보면 그의 탄식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그럼에도 그는 설득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당시 트로츠키가 독일 공산당에 개입하면서 했던 것처럼 정세 인식은 관조적인 자세로 해서는 안 된다. “이론은 회색이지만, 생명나무는 늘 푸른색”인 것이다.
혁명가들에게 낙관이란 난관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난관을 직시하면서도, 그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한 가닥 가능성과 기회를 볼 줄 아는 것을 뜻한다. 아예 가능성과 기회가 없다면, 그람시가 무솔리니의 감옥에서 곱씹은 로맹 롤랑의 말, “지성의 비관론과 의지의 낙관론”이 우리에게도 좌우명이 돼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비관적 정세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노동계급만 싸울 자신이 없어야 하는지 설명이 안 된다. 특히,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파업을 소명할 자신은 없어도 거리 항의를 소명할 자신은 있다.
그리고 자발성은 “기계적 자발성”이 아니다. 이 말을 한 그람시는 인간 행위주체가 작용(활동)함으로써 자발성이 작용한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정세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는 객관적 조건도 실제로는 어느 정도 인간적인 객관성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백보 양보해 조직 노동계급의 현재 사기와 투쟁할 자신이 설사 많지 않다고 해도 진정한 혁명가라면 그의 능동적·변혁적 세계관에 따라, 그저 조직 노동자 운동 바깥에서 단지 이데올로기 투쟁(선전·선동)만 할 게 아니라 그 운동 안에서 조직하고 논쟁해야 한다. 그리고 그 초기 결과를 객관적 조건들에 포함시켜 분석의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
이렇게 보면, 존 몰리뉴가 ‘마르크스주의는 결정론적인가?’라는 훌륭한 논문(《인터내셔널 소셜리즘》 68호, 1995년 가을)에서 말한 아래 구절 가운데 내가 굵은 글자체로 처리한 부분에 특별히 주목해야 한다: “어느 한도 안에서 개별 사회주의자 투사든 혁명적 당이든 계급투쟁의 수위를 주어진 것으로, 즉 그 개인이나 그 당의 의지와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결정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노동계급의 조직 상태와 의식 수준을 분석할 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그 조직의 역할을 처음에 고려하지 않고 시작하는 것은 어느 한도 안에서이다! 이 “어느 한도”는 매우 작은 부분으로, 실제로 해 봐야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노동운동의 상황을 비교적 정확하게 측정하려면 혁명가들의 일상적 운동 관여와 그 효과의 일상적 측정이 필수적이다. 실험과 실험 결과의 평가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전지윤의 분석에는 이 실험이 빠져 있다. 물론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일에 매달리려 한다면 그저 의지만 앞세운다는 비판을 받아도 쌀 것이다. 그러나 1차 민중총궐기 10개월 남짓 전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직선으로 한상균을 뽑은 것은 조합원 다수가 싸울 의지를 보여 준 것으로 두루 풀이되는 일이었다. 4월 말 파업이 예정대로 벌어진 직후 민주노총 좌파 활동가들은 그럭저럭 만족을 나타냈다. 첫술에 배부르랴 하는 현실감각을 모두 공유했던 평가였다. 7월 파업은 그 전에 공무원연금 방어에 실패하면서 동력이 없어 흐지부지됐다. 하지만 총궐기 두 달 전쯤 열린 민주노총 단위노조 대표자회의에서는 그 직전 이뤄진 노사정 합의에 반발한 대표자 다수가 즉각적인 파업안에 찬동할 태세였다. 결국 회의 끝 무렵 대표자들은 파업 일정을 확정했다. 그래서 실제로 9월 23일 파업이 벌어졌다. 이런 정서들이 투쟁 의지가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고차원의 기준에 비춰 우리의 ‘분석과 예측’이 너무 낙관적이었다는 것인가?
지난해 여름 우리는, 1996년 연말 파업을 상기시키며 노조 지도자들의 소명 없이도 극소수인 자기들만의 노력으로 현장에서 파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하던 일부 좌파들의 계획이야말로 지나치게 낙관적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우리는 관조적이지 않았다. 지나친 낙관론의 문제를 부각시키기보다는 지도자들에게 아래로부터 압박을 가할 필요성을 강조하며 그들과 토론했던 것이다.
레닌이 좋아한 나폴레옹 말처럼 “길고 짧은 건 대어 보아야 안다.” 분석과 예측 문제로 환원될 일이 아니라 가능성이라는 틈새를 보고 몸을 던져야 하는 문제였다. 미디어 논평가·평론가·분석가 등처럼 파업의 확률이나 따지면서 회색빛 ‘분석’과 ‘예측’이나 내놓고 있을 때가 아니다. 도박을 걸어야 한다. 때로는 확률론적 기대값이 낮은 일에도 기꺼이 뛰어들 수 있어야 한다. 실로 변혁적 따라서 능동적 세계관을 가진 사회주의 신문 편집자라면 작더라도 없지는 않은 파업 가능성을 앞두고 1면 헤드라인을 달 때, 관조적으로 ‘민주노총, 과연 파업할까?’ 하는 식으로 달지 않을 것이다. ‘민주노총은 파업에 돌입하라!’ 하고 달 것이다.
전지윤은 우리가 ‘다른 많은 노조 좌파들처럼 좌파적 노조 지도자들에게 기대를 걸었다가 좌절되자 한상균을 포함한 그들(과 자주파)에게 비난을 퍼부으며 부정직하게 자신의 그릇된 분석과 예측을 가리고 시선을 딴 데로 돌리려 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기회주의자가 아닌 우리는 노조 관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갖고 있다. 기회주의적으로 그들 탓을 하며 도마뱀 꼬리 자르기를 하는 게 아니다. 노조 지도자들도 자신의 조직을 지키고 지도자로서의 전망을 유지하려면 그들도 싸워야 한다는 객관적 필요성을 갖고 있다. 이 필요성 때문에 사회주의들이 좌파적 노조 지도자와 제휴할 수 있다. 전지윤은 시종일관 결과론적 논증을 펴며 우리의 분석과 예측이 잘못됐다고 주장한다. 그는 그가 분파주의적 분파 조직화 활동으로 단체의 개입 능력을 떨어뜨리던 때 일어난 철도 파업에 대해서도 당시에 이런 주장을 폈다. 한마디로 철도 파업은 우리의 기대대로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노동자 파업이 흔히 승승장구하면 무엇 때문에 룩셈부르크는 노동자 혁명이 계속되는 패배 끝에 마침내 찾아오는 최종 승리라는 지나치게 단순한 일반화를 했고, 또 무엇 때문에 그람시는 진지전을 제1차세계대전을 표상한 (피 말리는 인내를 요구하는) 참호전에 빗댔을까?
맺으며
전지윤은 “[최일붕의] 글쓰기 스타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고 싶다”며 이렇게 꼬집었다. “구체적 논거와 인용은 부족한 반면, 자신의 박학다식과 역사적 사례들을 과시적으로 나열하며 어려운 용어와 온갖 ‘~주의’를 남발하는 것이 읽기는 힘들면서 알찬 토론에는 별 도움 안 되는 것 같다.”
먼저, 나는 박학다식하지 않다. 따라서 내가 박학다식을 과시했다면 그것은 젠체하기에 불과한 것일 게다. 이 점에 유의하겠다. 충고 고맙다.
역사적 사례들 얘기는 조금 다른 얘기다. 전지윤이나 나나 마르크스주의에 찬동한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주요 방법인 역사유물론을 받아들인다는 뜻일 게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례는 많이 알고 많이 들수록 좋다. 오히려 역사에 대해서도 나는 박학다식하지 못해 아쉽다. 트로츠키가 혁명적 당을 “노동계급의 기억”이라고 했거늘 거의 2백 년에 가까운 그 역사(게다가 전 세계적이다!)로부터 더 많이 배웠어야 했을 텐데 말이다. 회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주의’ 문제는 위에서 언급했지만, 여기서도 매우 간단히 언급할 게 있다. 아마 내가 전지윤의 분파 투쟁 때 진보당 당권파의 경선부정 사실을 부정한 그를 ‘확증편향’, ‘음모론’, ‘실증주의’ 등으로 비판한 게 마음에 많이 남은 것 같다. 이번에 그가 근래 쓴 글들을 보니 변한 게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ii]
전지윤은 왜 탈퇴했나? 그가 집단 탈퇴를 정당화할 때마다 그에게 반문하고 싶은 게 있다. 도대체 40여 명의 중앙 상근·시간제 활동가, 특히 그 가운데 전지윤 자신이 몇 년간 이끈 18명의 신문사 기자·사진기자·편집디자이너·프로그래머 가운데 왜 단 한 명도 전지윤을 지지하지 않았는가? 게다가 그를 따라 탈퇴한 사람들 대부분은 몇 개월 뒤 그와 또 결별했다. 아마도 그의 분파는 세계 최단명 조직이었을 것이다.
이에 전지윤은 맨날 하는 상투적인 변명밖에 늘어놓을 게 없다. “2014년에 내가 노동자연대에서 이탈하기 직전에 있었던 것은 토론으로 보기 힘들었다. 일방적으로 징계를 당한 상황에서, 예컨대 한 토론회에서 나를 비판하는 29명의 발언 속에 지지 발언 1명이 허용되는 식이었[다.]”
이런 식의 주장이 그의 특기다. 반쯤의 진실 말하기. 두 달 동안 그가 패널로 연단에서 발제를 할 수 있었던 전(全) 회원 토론회가 세 번이었고, 그때마다 그는 정확히 연단 전체 시간의 절반을 보장받았다. 또, 그와 그의 분파 성원들의 글은 여러 차례 발간된 토론용 자료집들에 무제한 실릴 수 있었다. 그가 결코 까먹지 않고 언급하는 “29 : 1”은 2백50명 가까운 회원들이 청중으로 참석한 가운데 그의 분파 성원들은 많아야 10여 명밖에 안 됐고, 그나마 기가 죽어 선착순 발언을 앞두고 우물쭈물했기 때문이다. 징계는 경고에 그쳐 징계와 비(非)징계 사이의 것이었는데, 함께 의논하고 협의해서 만든 규칙을 어겨 놓고 단체 내 민주주의를 말하는 것은 실은 무제한적 개인 자유를 주장하는 것으로, 그의 자기 중심주의를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그가 중앙 간부들과 활동가들 가운데 단 한 명도 포섭하지 못한 건 분파 논쟁 때 충격적으로 드러난 그의 부정직과 기회주의 때문이었다. 바로 이 때문에, 그를 체험한 회원들은 전지윤이 다음과 같이 말해도 단순한 위선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내가 노동자연대 동지들의 주장에서 여전히 많은 부분을 공감·지지하며, 언제든 협력할 생각이 있으며, 무엇보다 그 동지들의 투쟁과 연대에 대한 헌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쪼록 내실있고 동지적인 토론을 통해서 이 나라 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고민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기회주의’로 말하자면, 특히 탈퇴 후 그가 전통이 다른 개인이나 그룹을 포섭하려 할 때 국가자본주의론도 재고할 태세인 것을 보면(북한 사회와 한 민족을 이루는 사회에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일관된 원칙 없이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이로운 쪽으로 행동하는 것을 가리키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이론은 흥정 대상이 아니다.
주
[i] 노동자 투쟁 동참에 대한 강조는 사실 2009년 초 다함께(노동자연대의 옛 이름) 대의원협의회에서 구체적 결정문으로 채택됐다. 하지만 이 글에서 자세히 다루기 어려운 몇 가지 단체 사정 때문에 2013년 여름쯤에야 실천으로 구현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전지윤이 신노선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분파 활동은 다함께의 진보당 탈당과 노동운동 개입 강화를 위한 독자적 활동 강화에 대한 반발의 산물로 볼 수 있다.
[ii] 여기에다 그 사이에 수집한 다양한 반SWP 이론들을 이리저리 조합하고 절충한 컬렉션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그 이론들은 단지 SWP만이 아닌 여러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논박된 것들이다. 가령 굴리엘모 카르케디와 앤드류 클리먼, 마이클 로버츠 등이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논증하고 실증하는 여러 논저들을 출간했다. 한편 이미 오래전에 리즈 보걸은 페데리치류(流)의 사회재생산 이론을, 헤스터 아이젠슈타인은 양성 분리론적(급진적) 여성주의를 논파했다. 레닌주의를 기괴하게 비틀어 놓은 것은, 게오르크 루카치의 헝가리인 제자인 타마쉬 크라우스가 몇 년 전에 쓴 저작이 1년여 전 영어로 번역됨으로써 간접적으로 논박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