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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동성애 혐오를 과학적인 양 포장한 책 ― 동성애가 선천인가 후천인가는 잘못 던져진 물음

길원평 교수가 대표 집필한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동성애 유발요인에 대한 과학적 탐구》(2014)는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기존 연구들(동성애 유전자 연구, 쌍둥이 연구, 호르몬 연구, 두뇌 연구 등)을 반박하며 동성애가 선천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린다.

《동성애 과연 타고나는 것일까?》, 길원평 외 5인 지음, 라온누리, 191쪽, 2014)

길원평 교수와 저자들은 이 책에서의 자신의 주장이 단지 종교적 신념이나 편견이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이라는 점을 애써 강조한다. "동성애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달"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그럴듯한 통계, 수식, 표, 그래프들을 가져다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학자’들도 이 점을 강조하는데, "그동안 각 개인의 정치적 성향과 사회 인식 편향 정도에 따라 달랐던 동성애 문제에 대한 과학적 접근을 가능하게 하는 책"(경희대 생물학과 교수 유정칠), "동성애 유발요인에 대한 과학적 탐구를 통해 진실을 알려주는 역작"(서울대 의과대학 교수 이왕재)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저자들이 '동성애는 선천인가 아닌가' 하는 물음을 던지는 의도는 명백하다. 동성애를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기 위해서다. 책의 서문에서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동성애가 선천적으로 결정된다면 동성애 치유가 불가능하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에서 벗어나려고 애쓰지 않고, 자신의 동성애를 인정하고 살 수밖에 없다. … 동성애를 도덕적인 문제가 없는 정상으로 인정해야 한다. … 반면에 동성애가 자신의 의지로 선택된 것이라면, 그러한 선택을 한 사람에게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가 있다."

애초부터 이렇게 동성애가 문제가 있다고 전제하고 쓴 책이 "객관적"이고 "과학적"일리 만무하다. 그렇기는커녕 이 사회에 널려 있는 동성애에 대한 역겨운 편견과 왜곡으로 가득 차있다.

동성애 유전자

이 책의 절반 이상은 동성애의 선천성을 반박한 서구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있다. 그 연구들 자체는 합리적 진실을 담고 있다. 예컨대 1993년 해머가 발견한 동성애 유전자 Xq28의 존재는 이후의 수많은 연구에서 부정됐다. 1991년 리베이는 남성 동성애자의 두뇌 전시상하부의 간질핵(INAH 3)이 남성 이성애자보다 작고, 따라서 INAH 3가 동성애와 연관이 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이후 많은 연구들로 둘 사이의 연관성이 부정됐다. 1952년 칼만은 일란성 쌍둥이의 성적 지향이 100퍼센트 일치한다고 발표했고 이후 몇몇 연구자들도 일란성 쌍둥이의 성적 지향 일치 비율이 상당히 높기 때문에 동성애가 타고난 것이라고 주장했다(일란성 쌍둥이는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아 시절에 동일한 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이 연구들은 표본에의 문제가 제기됐고, 2000년 이후 상당 규모의 표본으로 진행한 연구들에서 일란성 쌍둥이의 성적 지향 일치 비율은 대폭 감소했다. 즉, 오늘날 과학에서 인간의 성적 지향이 특정 생물학적 요인 때문이라고 보는 생물학적 환원주의가 더는 설 자리를 잃은 것이다.

그런데 길원평 교수와 저자들은 이런 연구들로부터 곧장 동성애가 후천적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근거가 없다고 해서 곧 인간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선택"하고 "의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일부 보수 기독교 단체들도 이런 전제를 공유하는데, 그들은 동성애자들이 ‘전환 치료’를 받거나 “마약을 끊는 듯”한 노력으로 동성애를 극복(탈동성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1970년 이후 시행된 ‘전환 치료’는 실패를 거듭했고, 오히려 치료 대상자들의 우울, 불안, 자살 시도만 증가시켰다.

〈미국소아과학회〉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성적 지향을 선택한다는 감각을 느끼지 않거나, 아주 약하게 경험한다"고 말한다. 인간의 성적 지향은 어느 순간 선택하는 게 아니라 사춘기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또,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난 중년이 돼서야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걸 깨달았다는 사람들도 많은데, 이처럼 인간의 성적 지향은 고정적이지도 않다.

근본적으로 도대체 왜 동성애라는 성적 지향을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은 논외로 치더라도, 길원평 교수는 최근의 연구들을 아전인수격으로 가져다 자신의 결론에 끼워 맞추고 숱한 논리적 오류들을 범하고 있다.

“동성애 유발 요인”

길원평 교수와 저자들은 책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들이 던진 질문에 대한 견해를 내놓는다.

"결론적으로 부모(잘못된 성역할 모델, 무관심, 과도한 애착), 친구(놀림, 왕따), 경험(우연한 동성애, 성폭행), 문화(음란물, 동성애를 미화하는 영화와 TV프로그램), 사회 풍토(권장하는 교육) 등 [저자들이 보기에 이미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경험에서 비롯한] 후천적 요인과 신체적인 요소(외모, 목소리, 체형), 성격, 이성에게 호감이 가지 않는 외모 등 [저자들이 보기에 동성애를 암시하는] 선천적 요인에 의해 동성애 성향(씨앗)이 마음에 형성될 수 있다. 후천적인 요인이 선천적인 요인보다 더 영향을 미치며, 선천적인 요인은 간접적이다." 복잡하지만 전형적인 순환논법이다. 요컨대 ‘동성애가 도덕적 타락을 낳았고, 타락이 동성애 요인과 만나 동성애를 낳는다.’

과학자입네 하는 사람들이 내린 결론을 보면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은 동성애자가 반대 성의 특성을 가진 사람(게이는 여성화된 남자이고, 레즈비언은 남성화된 여성)이라고 여긴다.(그러면 게이는 여성끼리의 사랑을 뜻하고, 레즈비언은 남성들끼리의 사랑을 뜻한다는 말인가?) 또 이들은 동성애자들이 항문섹스에 중독됐으며, 동성애에 한 번 중독되면 빠져 나오기 힘들다는 역겹고 낡아빠진 편견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들은 어떤 문제적 경험이 개인을 동성애로 빠지게 했다고 본다.

"유전적인 영향과 무관하게 비정상은 비정상." 즉, "유전적인 영향의 상대적 비율이 높다고 해서 그런 특성들을 반드시 정상이라고 인정하지도 않는다. 예로서, 유전적인 영향이 큰 알코올중독, 이혼 등을 정상이라고 권하지 않는다.”(저자들은 '쌍둥이 비교연구'에 따라 이혼과 알코올중독은 유전적 영향 비율이 50퍼센트 정도 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는 22퍼센트라고 주장한다.) 이는 모두 근거없는 억측일 뿐이다. 한국에서 이혼과 알코올 중독은 계속 늘고 있는데, 유전 이론으로는 이를 설명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동성애가 비정상이고 이들을 ‘정상’으로 바꿔야 한다는 우익들의 동성애 혐오를 사이비 과학으로 정당화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동성 결혼

그런데 이런 역겨운 책이 출판된 배경은 주목할 만하다. 저자들은 서문에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직접적 동기를 이렇게 말한다.

"2014년 6월에 전국 고등학생들이 치른 전국연합학력평가에서 동성애와 동성결혼에 관한 문제가 세 개 나왔다. 그런데 세 문제 모두 학생들로 하여금 동성결혼을 옹호하는 인식을 갖도록 유도하였다. … 동성애를 옹호하는 교육을 하면 다음 세대의 성의식이 왜곡되고 결국 서구처럼 동성애를 합법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 우리 대한민국의 국민 모두가 동성애는 타고나는 것이라는 오해에 빠지지 말고 바른 진리 위에 굳건히 서고 건전한 성윤리를 유지하기 바란다."

책의 마지막에서도 또다시 이렇게 강조한다.

"[한국 국민들이] 왜곡된 과학적 자료에 의해 서구의 많은 사람들이 동성애를 타고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던 것과 같은 전철을 밟을 것 같아 매우 우려된다. … 에이즈가 동성애로 말미암아 확산된다는 객관적 통계가 있음에도 서구에서는 동성애 합법화를 막지 못했다. 동성애자의 수가 많아져 압력 단체를 이루면, 어떤 이유와 명분도 동성애 확산을 막지 못한다. ... 동성애가 포함된 차별금지법이 만들어지면 동성애 확산을 막으려는 노력을 할 수 없다."

최근 서구의 많은 나라에서 동성 결혼이 합법화되는 등 법·제도적 차별이 완화됐다. 한국은 성소수자에 대한 제도적 차별이 여전히 심각하지만, 대중들의 동성애에 대한 우호적 인식이 급속히 확산됐다.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센터’가 2007년부터 2013년까지 39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로도, 한국은 동성애에 대한 수용적 태도가 가장 급격하게 증가한 나라였다. 특히 젊은 층에서 더 그렇다. 성소수자의 '명절'이라고 하는 ‘퀴어 퍼레이드’는 매년 그 규모를 경신하며 성장하고 있고 지난해와 올해 서울의 중심인 시청광장에서 열렸다.

이런 상황은 우익들에게 '한국도 동성 결혼을 허용한 서구처럼 될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성소수자 운동의 성장에 대한 반작용으로 2010년 무렵부터 보수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동성애 혐오 세력들이 신문 광고, 공개적 토론회, 집회 등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또, 이들은 "동성애는 죄"라는 조야한 선동에서 좀더 그럴듯한 논리들을 개발하려고도 하는데, 이 책도 그런 반작용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동성애는 선천인가, 후천인가?”

오랜 논쟁, 그러나 잘못 던져진 물음

동성애가 선천인지 후천인지는 오래된 논쟁이다. 19세기 말 최초로 대규모 동성애 운동을 이끈 독일의 의사 마르너스 히르쉬펠트는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에 동성애 해방의 열쇠가 있다고 봤다. 그는 동성애가 타고난 것이기 때문에 죄악도 범죄도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말까지의 동성애 조직도 거의 예외없이 동성애가 ‘선천적’이라는 설명을 고집했다.

이처럼 어떤 동성애자들은 동성애가 선천이라는 주장으로 자신을 방어하려고 한다. 사람이 생물학적 이유로 그렇게 됐다면, 달리 선택이 없었다면, 그것이 어떻게 범죄나 죄악이 될 수 있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다. 우선 동성애 선천성 연구들이 수차례 반박됐듯이 현재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동성애가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지를 입증할 수 없다. 무엇보다 생물학적으로 정해졌다고 해서 억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성별과 피부색은 유전적으로 결정되지만, 우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성차별과 피부색에 따른 인종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게다가 이런 주장은 동성애자가 생물학적 결함을 가지고 있다는 차별적 논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히르쉬펠트의 연구는 불과 몇 년 뒤 나치에게 악용됐는데, 나치 정부 하의 우생학자인 에른스트 루딘은 이 연구를 이용해 동성애는 유전되므로 모든 동성애자를 불임 상태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탈동성애 운동’을 하는 우익이 말하는 것처럼 동성애가 단지 특수한 사회 현상인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왜 동성애가 선사시대부터 자본주의까지, 서양과 동양 모두에서 언제나 존재했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또, 선택 사항이라면 동성애자들이 자신의 성 지향을 깨닫고 나서 온갖 억압과 천대 때문에 괴로워하고 심지어 자살이라는 극단적 행동까지 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 선택을 바꾸면 되니까 말이다.

잘못된 물음

동성애가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잘못 던져진 물음이다. 우선 이 물음은 매우 차별적이다. 왜 이성애가 선천인지 후천인지는 묻지 않는가? 왜 이성애 유전자를 찾는 연구도 없고, 이성애자들에게 언제 당신이 이성애를 선택했냐고 묻지 않는가?

둘째, 동성애가 선천인지 후천인지에 따라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바뀌거나 사람들의 동성애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히르쉬펠트가 해방의 열쇠가 동성애가 타고난 것이라고 입증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주장으로 정부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편 길원평 교수는 서구에서 동성애자들의 제도적 차별이 완화된 것이 대중이 동성애를 선천적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오늘날 몇몇 서구 나라에서 동성결혼이나 시민결합이 인정되고 유명인들의 커밍아웃이 늘고 대중의 동성애에 대한 인식이 개선된 것은, 무엇보다 수십 년간 계속돼 온 동성애 해방 운동의 성과다. 새로운 지식은 분명 사람들의 의식과 운동에 영향을 주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조차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유도 봐야 한다. 이는 동성애 억압의 뿌리가 자본주의 가족제도에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자신의 고유한 가족제도를 창출하면서 ‘동성애자’라는 범주를 만들었고, 자본주의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동성애 억압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합리적’ 지식과 설득만으로는 동성애 억압을 없앨 수 없다.

셋째, 성차별이 만연한 현 사회에서 타고난 것과 후천적으로 학습된 것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사회적·의식적 존재로서 인간의 성은 단지 생식의 수단이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감정(사랑, 유대감 등)과 연결돼 있다. 이는 여러가지 사회적·환경적·의식적·생리적 요소의 복잡한 상호과정 속에서 형성될 것이다.

저명한 진화 생물학자인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렇게 말한다.

“모든 과학자, 그리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사람의 사회적 행동에는 생물학적인 영향과 사회적 영향이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뒤얽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천성과 양육 중 ‘어느 쪽’이 사람의 행동을 결정하느냐가 아니라, 생물학이 사회조직의 가능한 형태들에 미치는 제약의 정도, 강도, 그리고 성격이다. 왜냐하면 그 요인들은 말 그대로 떼려야 뗄 수 없이 뒤엉켜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는 인간의 성에 대한 연구를 더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인간의 성이 이토록 억압돼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이런 연구가 진정한 진실에 도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다못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성적 지향이 동성애인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조차 제대로 알 수 없다. 킨제이 이후로 여러 사람들이(길원평 교수도) 동성애자 규모에 대해서 이러저러하게 말하지만, 동성애자들이 자신을 동성애자라고 밝히기 어려운 현실에서 이런 통계가 얼마나 정확할까? (물론 킨제이의 연구는 성 행위에 대한 당시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현실 사이의 간극을 폭로하는 진보적 구실을 했다. 이런 연구 자체가 모두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억압과 그것의 원천인 착취가 없는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성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사회에서만이 인간의 본성이 제대로 발현될 것이고,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다양한 성의 관계와 성애가 꽃필 것이다. 계급이 등장하기 이전(그래서 억압이 존재하지 않았던) 사회에 대한 연구들에서 이런 모습을 얼핏 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누구는 동성애자가 되고 누구는 이성애자가 되는지가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왜 동성애자와 성소수자들이 억압받고, 이 억압을 끝장내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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